예레미야 강해 제170강(렘30: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11월 8일(목)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모든 족속을 심판하는 역사적인 종말을 준비하시는데 그때 믿는 자들은 구원의 자리에 어떻게 담대하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가?(렘30:21-24)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나면 이 세상에서는 선민의 나라도 선민의 지위를 가진 백성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때부터는 혈통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따지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여호와의 마음에 든 사람 다윗,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치기로 결심하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인물입니다. 나이 100세에 얻은 여호와 언약의 계승자가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자손의 번성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아들을 여호와께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믿고서 그 이상한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때 모리아 산 그 현장에서 ‘여호와 경외자’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창22:12).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에 대한 마지막 점검이 끝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창22:1-2, 10-18). 더 정확한 ‘하나님 경외’의 의미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제2장과 히브리서 제11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대제사장 엘리는 여호와보다 자신의 아들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두 아들과 엘리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그때 주시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선민이나 제사장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버리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혈통이나 제사장의 혈통을 더 이상 여호와 앞에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요1:12-13). 그러한 시대는 벌써 지나가고 있습니다.
2) 둘째,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전능하심으로 새로이 창조를 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과 이성으로는 이룰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성취와 실현을 여호와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맡겨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창15:6). 그와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가능한 영생의 부활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19). 그러한 부활과 영생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기꺼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께 바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인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의사결정을 한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참된 믿음의 경지인 것입니다(창17:1).
(2)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참조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든 자가 다윗입니다(행13:22). 그는 어째서 여호와의 마음에 든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이유를 히브리정경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사무엘상 제16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지도자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16:7). 그 말씀을 하시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유대인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행적 가운데 그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따르고자 행동하고 있는 대목이 과연 어느 것일까요?
2) 첫째, 사무엘상 제24장과 제26장에서 다윗이 어떠한 인물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10년의 세월을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왕인 사울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지지가 청년장군인 다윗에게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잡아서 죽이려고 혈안입니다(삼상18:7-11, 19:10-20). 그것은 정적(政敵)을 기필코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산(山)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웅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울과 달리 다윗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하지 아니하고 두번이나 살려서 돌려보냅니다(삼상24:7, 26:12).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왕으로 기름 부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은밀하게 그 목숨을 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삼상24:6, 26:9-11).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께서 직접 치리(治理)하실 것이지 신하인 자신이 함부로 여호와를 대신하여 월권행위(越權行爲)를 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주권을 경외하고 있는 다윗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3) 둘째, 여호와의 마음에 든 다윗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작은 이스라엘 왕국이 아니라 거대한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주변의 나라들을 치는데 있어서 다윗 왕은 연전연승입니다(삼하8:1-14). 그러나 마지막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정복함에 있어서 다윗 왕은 직접 출전하지 아니하고 조카인 요압을 대신 사령관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삼하11:1). 어느 사이에 다윗이 언제나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만을 믿고서 자만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그는 믿음에서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리는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게 됩니다(삼하11:2-5, 23:39). 그리고 흉계를 꾸며서 전장에서 우리야를 죽게 만듭니다(삼하11:14-17).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비유로 다윗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십니다(삼하12:1-9). 그때 다윗 왕은 자신이 형편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를 합니다(삼하12:13). 나단 선지자가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처벌을 남은 인생을 걸고서 그대로 달게 받겠다고 결심합니다(삼하12:10-12). 실제로 여호와의 예언 그대로 다윗 왕은 남은 인생 가운데 두번의 왕자의 난과 베냐민 지파 세바의 반란을 만나게 됩니다(삼하15:10-23, 20:1-22, 왕상1:5-10).
4) 셋째, 끝까지 칼날 위에서 모진 고난과 수치를 당하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그것이 여호와의 징계임을 알고 있기에 불평을 하지 아니하고 감수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 다윗은 끝까지 불평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처벌을 달게 받는 신실한 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의 연장선상에서 훗날 육신을 입고서 끝까지 여호와의 뜻을 이루고자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고도 의로운 종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사53:3-12).
(3) 셋째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멸망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요3:17). 인간사회에서는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대속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성도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십니다(요1:12-14, 29, 3:16).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영생의 하나님나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 성도들에게 기업으로 주고자 하십니다(눅22:28-30, 요3:13-15, 롬8:1-18, 계21:1-2, 22-27).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인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십니다(요6:38-40);
1)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주의 한 위격인 그 독생자의 영광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스스로 대속의 제물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빌2:5-8).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모든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로 대신 바치는 작업이기에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눅22:41-46).
2) 스스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체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보응의 제물이며 저주의 대상이므로 홀로 십자가 처형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절규 가운데 들어 있는 의미입니다(마27:46).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여호와의 종이 되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까지 감당하시는 등 매사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입니다.
3) 그 결과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시며 영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시는 주님이 되십니다(요14:16-20). 그 부활과 영생의 은혜가 이제는 대속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존귀한 희생의 제사를 바라보면서 그 속죄의 은혜를 입고자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빌3:10-16). 그러한 ‘새 언약’의 시대를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리스도가 오시기 600년 전에 벌써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으로 그의 선지서 제31장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렘31:31-34).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심하고 행동하는 성도들 가운데 여호와께서는 지도자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렘30:21a). 여호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고 그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알고 바르게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자를 여호와께서는 더 가까이 두시고 지도자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렘30:21b).
(2) 둘째,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혈통적인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남녀노소의 구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 마음속에 여호와를 가까이 모시고 그 말씀의 뜻에 순종하여 신실한 여호와의 종으로 한평생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며 여호와는 그들을 보호하고 주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며 친히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렘30:22, 롬8:15-18).
(3) 셋째,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악한 영들을 심판하십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을 영벌에 처하고자 하십니다(렘30:24a). 그리고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대속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척하며 스스로 의인이요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욕심껏 음란하게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과 악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함께 처벌을 하십니다(렘30:23). 그들 역시 악한 영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永罰)에 들어가게 됩니다(계20:10).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한 그들이기에 직접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비명을 지르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렘30:24b).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0:21);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렘30:21a);
1) ‘영도자’(領導者)와 ‘통치자’(統治者)는 비슷한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영어 번역본을 대조하면 미묘한 차이를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첫째, 히브리성경을 영어로 직역하였다고 하는 흠정역(欽定譯, King James Version)에 따르면, 영도자는 ‘nobles’이고 통치자는 ‘governor’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공화정(共和政)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nobles’가 원로원(元老院) 또는 귀족원(貴族院)에 해당하고 ‘governor’는 원로원에서 선출한 집정관(執政官)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2) ②둘째, 구미(歐美,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 따르면, 영도자는 ‘leader’이고 통치자는 ‘ruler’입니다. 그것은 신정국가(神政國家)나 제국(帝國)에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최고지도자인 모세가 정부나 군부의 장을 임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제국의 황제가 내치를 책임지는 왕을 임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③셋째, 구미지역의 신학교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 따르면, 영도자는 ‘prince’이고 통치자는 ‘ruler’입니다. 그것은 제국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오래 원정에 나설 경우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깁니다. 그러면 태자는 여러 명의 총리를 임명하여 정부를 이끌도록 조치합니다. 예를 들면, 신바벨론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나보니더스가 아라비아 반도의 반란을 다스리기 위하여 아예 그곳에 별궁을 짓고서 정예병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내치(內治)는 태자인 벨사살을 왕으로 삼아 그에게 맡깁니다(단5:1). 벨사살 왕은 휘하에 3명의 총리를 두고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단5:16, 셋째 통치자를 말함).
4) 어느 정도 공통적인 관념은 영도자(領導者)가 인간세상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도자는 세상적인 통치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를 바라보는 지혜와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훌륭한 영도자는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영도자와 통치자를 같은 민족 가운데서 선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렘30:21a). 그것은 창조주께서 벌써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원칙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어떠한 인물이 보다 여호와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현명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2)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0:21b); 여호와께서 아주 가까운 측근으로 두고자 하는 인물은 다음 두가지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자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제멋대로 가까이 오지를 아니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과 인사권을 철저하게 존중하고 있는 신앙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양의 우리를 맡기시고 목자로 발령을 하셨기에 그 양의 우리에서 풍성한 꼴을 양들에게 먹이기 위하여 목자는 말씀공부와 기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요10:10, 행6:4). 결코 다른 우리의 양을 탐을 낸다거나 자신의 우리를 인력(人力)으로 크게 만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 둘째, 여호와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정확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는 담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고 누리기보다는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찾아가고 그 앞에서 정직한 종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성도여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를 여호와께서는 아주 가까이 하시고 귀한 말씀을 위탁하시며 중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30:22); 시내 산 앞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계승하게 한 언약과는(출19:4-6)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렘30:22). 그 이유는 이 구절이 그 앞의 구절을 받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실 때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 마음이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청종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결심하고 행동을 하는 자가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으로 내주하여 역사를 하십니다(요14:16-20, 26-27). 따라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영적인 삶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훗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 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 것이라. 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렘30:23-24);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 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 것이라”(렘30:23);
1) 창세기 제3장의 말씀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악한 영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와 사망의 법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엡2:2, 6:12, 롬8:2). 그것은 일찍이 마귀의 화신인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그 탐심을 충동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한 영적인 타락에서 비롯되고 있는 사탄의 권세입니다(창3:1-7). 그 때문에 이 세상에서 육신적인 삶을 고통 가운데 살아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 바로 인류입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은 창세기 제4장 말미에서 아담의 아들인 셋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자”라는 뜻으로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현세에서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데서 벌써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창4:25-26).
2) 그러한 사람들의 구원의 간구에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응답을 하실까요? 그 예언이 벌써 하와를 징계하시면서 훗날 순수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머리 권세 곧 죄와 사망의 법을 부수어 버리는 것으로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창3:15). 사람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제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러한 죄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재앙으로 징벌하십니다(렘30:23a, 25:29). 그러나 그 분노를 먼저 악인의 머리 위에서 악한 생각과 계획을 심고 있는 그 악한 영들에게 퍼부으십니다(렘3:23b, 창8:20-22). 따라서 완전한 종말심판을 위하여 악한 영들을 먼저 징벌하고 그 다음에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백성들을 처벌하십니다(계20:2-3, 10). 그러한 악한 인간들이 소위 거짓선지자와 세상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행사하는 짐승들인 것입니다(계19:20).
(2) “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렘3:24);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기 제3장에서 시사하신 악한 영에 대한 처벌이 요한계시록 제19장과 제20장에서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순수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십니다(눅1:34-38).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도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후 3일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2) 그러한 사실을 성경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계획은 한 점의 착오도 없이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는 예레미야보다 100년 앞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
3) 이 세상의 종말심판을 보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벌써 그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계시는 진리의 성령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사실을 미리 알고 확신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역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담대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공생애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여호와의 종을 양육하는 일을 위하여 자신의 많은 시간과 노력 곧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으로 많은 성공의 기회와 재물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가까이 불러서 측근으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깊은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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