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17강(렘21: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9월 15일(토)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내린 벌이 무엇인가?(렘21:11-14)
본문은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유다 왕국의 말기에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렘21:11-14). 그 예언의 말씀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통하여 억울한 백성이 없는 국가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정의로운 판결이란 기본적으로 탈취를 당하고 있는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구해내는 것입니다(렘21:12a). 그런데 다윗왕조의 왕들이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착취를 당하고 있는 자를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고 있는 자를 두둔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경영이 그러하므로 민심이 돌아서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진노하시고 유다 왕국에 그 분노를 부으십니다(렘21:12b). 그것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패망하게 되는 진짜 이유를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둘째로, 그와 같은 여호와의 예언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누차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선포한 바가 있습니다(렘1:1-3, 5:1-6, 6:12-15, 9:3-9). 그러나 그들이 하나같이 귀를 막고 듣지를 않습니다(렘7:13, 25-26). 그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1) 첫째, 역사적인 선례입니다. 100년 전에 중동의 패권을 자랑하던 앗수르제국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예루살렘성을 공격하다가 패전을 하고 물러갔습니다(왕하19:34-35). 그렇게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세력도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바벨론이나 그 어떤 이방인 강대국이라도 유다 왕국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여호와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는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한번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아닙니다(렘7:15). 다윗왕조를 돕지 아니하실 것이며 시드기야 왕의 예루살렘성이 함락이 된다는 것입니다(렘7:13-16, 21:4-6).
3) 둘째, 대다수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나 우리야와는 다른 내용의 예언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하나냐와 제사장 바스훗의 경우에는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와 싸우더라도 승리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렘20:6, 28:1-4).
4) 그러나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은 그 진위(眞僞,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가 다수결 곧 선지자나 제사장의 수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진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정직하게 대언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선지자 예레미야와 우리야 만이 정직하게 듣고 그대로 대언하고 있습니다(렘21:3-7, 26:20-24). 나머지 선지자나 제사장들은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거짓 예언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5:1, 31, 20:6, 38:1-6). 그러한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상실하고 있는 다윗왕조의 왕들이므로 유다 왕국의 멸망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5) 셋째, 예루살렘성과 그 주변의 성읍들이 하나같이 천혜의 요새지입니다. 높은 바위 언덕 위에 건축이 되어 있는 철옹성들이며 적군이 쳐들어 오는 유일한 통로인 골짜기는 양쪽의 높은 산성에서 협공을 하면 그곳이 바로 적병의 무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렘21:13).
6)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의 예언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14).
(3)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키고 시내 산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선민으로 삼으시면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출19:4-6).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방인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한평생 살아간 것처럼 그렇게 이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창12:1-3, 14:14-24, 20:7, 17-18, 21:22-33).
2) 둘째, 여호와의 제사장은 7일간만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와 위임의 제사를 드린 다음에(출29:35-37) 나머지 세월은 남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렘4:25-31). 그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른 나라와 족속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출19:6, 벧전2:9).
3) 셋째,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은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의 종의 거룩한 영적인 삶의 모습을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창21:22-23, 23:6). 그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거룩한 선민의 모습입니다.
(4) 넷째로, 이상과 같은 모든 것들은 선민들이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이방인들에게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여호와의 공의를 전혀 실천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마12:39).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의 말씀을 전혀 이웃나라 백성들에게 전해주지를 아니하고 그것을 자신들만이 독점적으로 누리고자 획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은 나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인 성도들에게 맡기고자 하십니다(사11:1-12, 렘31:31-34, 마24:14, 28:18-20, 눅24:44-49, 행1:8, 2:1-4). 그 대신에 선민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다윗왕조에 대해서는 국내적으로 정의라도 제대로 실천하라고 본문에서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렘21:12).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1-1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렘21:11-12a);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에게서 받은 말씀을 유다 왕국의 왕과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다의 왕’은 예레미야가 선지자 활동을 하고 있는 당시의 유다 왕국의 왕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군 요시야 통치 13년인 주전 627년부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주전 586년까지 가나안 땅에서 선지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렘1:1-3). 그런데 당시의 유다의 왕들은 성군 요시야를 제외하면 모두가 유다 왕국 말기의 악한 왕들입니다(왕하23:25-27).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들이 차례로 그러합니다.
2) 그 가운데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은 각각 3개월간 짧게 통치를 하다가 애굽과 신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맙니다(왕하23:31-34, 24:8-15). 그리고 애굽의 바로에 의하여 왕이 된 여호야김과 신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왕이 된 시드기야가 각각 11년간 유다 왕국을 통치하게 됩니다(왕하23:36-37, 24:17-20). 그들은 모두가 다윗왕조의 왕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유다 왕의 집“과 “다윗의 집”은 모두 ‘다윗왕조’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렘21:11-12a).
3) 그 다윗왕조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를 하십니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하의 예언의 말씀은 엄청 중요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므로 부디 다윗왕조의 왕들은 각별히 명심하여 시행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렘21:11-12a)라고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렘21:12b);
1) 그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것에 비해서 본문의 내용은 참으로 간단한 것입니다. 다윗왕조의 왕들은 매일 백성들의 송사를 판결함에 있어서 ‘정의’(正義, justice)를 실천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1:12ba). 여기서의 ‘정의’는 억울하게 압박을 당하여 자신의 재물과 권리를 강자에게 탈취를 당한 백성이 있으면 그것을 올바르게 구제하여 주라는 것입니다(렘21:12bb).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당시의 유다 왕국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가 있습니다;
2) 첫째, ‘정의’가 잘 실현이 되지 아니하는 악한 사회입니다. 강자는 약자를 압박하며 가난한 자의 재물과 권리를 탈취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자꾸만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자와 가난한 자는 발 붙일 곳이 없으며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강자만이 삶의 보람을 누리고 있으며 반면에 약자와 빈자는 노예와 같은 살을 살다가 천대를 받으며 삶을 끝내고 마는 비극적인 사회의 모습입니다.
3) 둘째, 다윗왕조가 국내적으로 정의사회도 구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제적으로 창조주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정신을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의 말씀을 나누어 주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의 죄사함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만 하는 선민들인데 전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출19:4-6, 마12:39).
4) 그러한 공의의 실천은 훗날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인 성도들에게 맡겨지는 새 언약의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렘31:31-34, 마8:10-13, 24:14, 28:18-20, 눅24:44-49, 행1:8, 2:1-4). 여기서는 우선 급한 정의사회의 구현이라도 다윗왕조의 왕들이 실천하라고 하는데 그것마저 이루어지지 못하여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렘21:12c).
(3)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c);
1) 일반적으로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그러합니다(출20:1-5). 그렇다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하고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섬기는 것은 어떠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2) 첫째,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조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막12:30-31). 그것은 국내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며 국제적으로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둘째, 그와 달리 피조물의 형상으로 신상이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신의 신으로 편리하게 섬기는 경우에는 그러한 생명사랑의 정신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일방적인 현세적 소원성취만을 탐욕스럽게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한 소원을 덮어 놓고 마치 능력 많은 램프의 요정과 같이 이루어 준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문화의 본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문화에 젖어 있는 사회는 현세적인 기복신앙과 이기적인 악행이 만연한 사회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4) 그러한 악한 사회에 대하여 여호와의 진노가 재앙으로 임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먼저 선민의 나라를 태워버립니다(렘21:12ca). 그 순서가 차례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며 그 뒤가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입니다(렘7:15). 그 다음에는 주변의 이방인 나라입니다(렘25:29a). 그 분노의 불길이 자꾸만 번져 나가게 됩니다. 결국에는 먼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방인의 나라들이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심판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렘25:29b). 피조물로써는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을 끌 수가 없습니다(렘21:12cb). 오로지 대속자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제사만이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유월절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줄 수가 있을 뿐입니다(요1:29, 롬6:4).
둘째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13-14); 역시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렘21:13a);
1)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인간의 역사와 그 속사정까지 모두 통찰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자랑하고 있는 철옹성과 천혜의 요새지 그리고 깊은 계곡에 대해서도 모두 그 지리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을 일일이 꿰뚫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그 옛날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시온산성이 그러합니다(삼하5:6-9).
2) 주전1,003년경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서 북진을 합니다(삼하5:5-6).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는 시온 산성과 그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 고지가 마음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부스 족속은 주전 14세기 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의 침략도 받지 아니하고 건재합니다. 그 이유는 해발 780m에 위치하고 있는 예루살렘이 깎아 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요새지이기 때문입니다.
3) 그 고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깊은 계곡을 통과하여야만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계곡 위에는 양쪽으로 절벽과 산성이 있어서 협공을 받아 전멸을 당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옛날 여부스 족속은 유다 왕 다윗을 놀렸습니다;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5:6). 하지만 여호와의 은혜로 다윗왕은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샛길을 발견하여 은밀하게 침투를 했습니다.
4) 그 결과 철옹성 시온산성과 예루살렘고지가 함락이 된 것입니다(삼하5:7-10).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들이,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렘21:13a)라고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면 언제라도 그 옛날 다윗을 시켜서 시온산성을 점령하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이방 강대국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성을 정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렘21:13b-14a);
1) 세상적인 눈으로 보자면 약소국 유다 왕국이 중동의 새로운 패권국이 된 신바벨론제국의 공격으로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25:1-7). 그러나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다윗왕조의 악행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왕하23:25-27).
2) 약 100여년 전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앗수르제국의 공격을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신위적으로 물리치시고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왕하19:34-35). 그러므로 앗수르제국은 한번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 온갖 죄악을 범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을 강력하게 처벌하고자 결심하십니다(렘7:15-16). 정의가 사라져버린 다윗왕조를 더 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렘21:11-12).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를 동원하여 치십니다. 그 때문에 선민의 나라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렘21:13b-14a).
(3)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14b);
1)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성의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절벽 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넓은 고지에 예루살렘성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계곡을 통과하여 그곳으로 기어올라와야만 하는데 그 계곡은 참으로 통과하기가 힘이 듭니다. 양편의 높은 산성에서 계곡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돌을 굴리면 적군들은 꼼짝 없이 그 계곡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하나의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계곡과 건너편 산에 불을 지르고 멀찍이 예루살렘의 통로를 포위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14b). 그렇게 몇 년을 지내게 되면 양식과 물이 떨어진 주민들이 항복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렘21:5-6). 실제로 그렇게 시드기야 왕이 정예병을 이끌고 예루살렘성에서 3년을 버티다가 마침내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5:1-7, 렘21:7).
결론적으로, 다윗왕조 말기의 4왕들이 통치하고 있는 유다 왕국은 소망이 없는 비참한 사회입니다. 극소수인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참으로 살기가 편하고 제멋대로 군림할 수 있는 좋은 사회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는 천대를 받으며 약자는 착취를 당하여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다수인 빈자와 약자들에게는 내일의 희망이 없는 유다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이 다윗왕조 유다 왕국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철옹성도 철통같은 방어진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징벌하고자 결심하셨는데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요새와 방어막이 그것을 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바다가 되고 말 따름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정의를 국내적으로 구현하고 국제적으로는 모든 생명을 돌보고 구원하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시온산성과 예루살렘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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