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118강(렘22: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15. 09:27

예레미야 강해 제118(22: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916(주일)

 

여호와께서 다윗왕조의 번영과 멸망은 무엇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는가?(22:1-5)

 

본문의 바로 앞 대목에서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의 말기의 왕들이 국내적으로 정의구현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유다 왕국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21:11-14).

그런데 본문에서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그 반대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놀라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22:1-5). 그 비결은 한 마디로, 국내적으로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국제적으로는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22:3-4). 그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흔히 정의공의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정의’(正義, justice)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지만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하늘에 계시는 여호와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피조물인 인간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치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그리고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민족국가 뿐만 아니라 합중국(合衆國, 여러 개의 나라와 같은 주가 합쳐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 것)이나 연방(聯邦, 여러 개의 자치 주가 합쳐서 하나의 나라를 형성한 것)이라고 하는 다민족국가의 형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셋째로, 그렇지만 정치적인 집단인 국가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법정에서 선포하고 있는 집단 이기적인 정의가 옳다는 것이며 국제적으로도 그것이 통용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별로 추구하고 있는 자신들의 정의가 국제적으로 관철이 될 때 자국의 이익이 최대로 실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패권국’(覇權國, hegemon)은 자신들의 국내법으로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국제기구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례를 그 옛날 로마제국시대에서 벌써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의 질서가 전쟁없이 하나의 패권국의 법과 정의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에 의하여 유지될 때에 그것을 소위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Pax Roman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에는 Pax Americana’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4)  넷째로, 그러나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국의 집단 이기적인 정의를 우월한 군사력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관철하려고 하지를 말고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22:3-4). 참고로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이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똑같이 돌보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12:30-31). 사실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으로는 창조주의 공의를 올바로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적인 탐욕과 정욕이 이기적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21-24). 그렇다면 이기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이타적인 창조주의 사랑을 구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여호와의 구체적인 도우심이 두가지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나타하고 있습니다; ①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제물로 이 세상에 구속자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11:1-12, 53:1-12, 1:29, 24:44-49, 7:25, 8:1, 6:4-14). ②또 하나가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2:28, 24:49, 1:8, 2:1-4). 그에 따라 성도들에게 영적인 삶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8:2-6). 그러한 복음의 시대를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의 선지서 제31장에서 새 언약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31:31-34).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네 신하와 이 문으로 들어오는 네 백성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니라”(22: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22:1-2a);

1)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 10지파가 사라진 이후 선민의 정통성은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의 영광을 다윗왕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제국이 선민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쳤으며 그 찬란한 선민의 유업을 다윗왕조가 계승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선민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치는 메시아가 온다고 하면 당연히 다윗의 가문에서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선민 유대인들은 비록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이스라엘 10지파가 사라지고 없지만 다윗왕조가 살아 있는 한 선민의 정통성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다윗왕조 중심의 정통성이라는 사상을 선민 유대인들이 고수하고 있기에 주전 142년에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된 레위인들의 하스모니안 왕조를 정통성을 가진 유대인들의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속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다윗의 가문에서 정치적인 메시아가 나타나서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시 온 세상에 떨쳐 주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한 생각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 유다 왕국의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특히 선민들의 정통성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외치도록 지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22:1-2a). 그 다윗왕조의 유다 왕들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잊지 말고 반드시 명심해야만 하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엉뚱한 길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한 명쾌한 여호와의 지적이 이제부터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  네 신하와 이 문으로 들어오는 네 백성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니라”(22:2b);

1)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과 생각이 다르십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다윗왕조가 그들의 선민의 정통성의 중심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유다 왕국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을 출입하고 있는 백성들 모두가 여호와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22:2b). 그들 모두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나같이 실천을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종들인 그들은 더 이상 다윗의 후계자인 왕들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선민의 정통성을 다윗왕조에 떠넘기고 또한 여호와의 율법을 실천하는 일을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넘기고 백성들이 세상 편하게 제멋대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과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신분상의 차별이나 상하관계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의미가 본문 가운데 깊숙이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네 신하와 이 문으로 들어오는 네 백성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니라”(22:2b).

3)    역사적으로,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산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를 형성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일을 모두 최고지도자 모세에게 떠넘기고 자신들은 모세가 전해주는 율법만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0:18-21, 5:24-27). 백성들이 여호와의 강림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행동하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를 수용하고 있지만 모세의 기본생각은 다릅니다. 백성들 모두가 여호와의 영을 받아 선지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실천하는 그때를 그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11:29, 30:1-20). 요컨대, 믿음과 구원은 개인적인 결단에 달린 것이지 세상적인 신분이나 집단적인 소속에 의하여 그냥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둘째로,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신하들백성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22:3-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22:3a);

1)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국내적으로 정의를 구현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그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벌써 제 21장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21:12). 그런데 제 22장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국제적으로는 여호와의 공의를 실천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22:3a). 따라서 여호와의 백성들은 대내적으로는 정의를 실천하며 대외적으로는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2)    정의와 공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그렇게 두 바퀴가 온전해야 여호와신앙이 올바르게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자신들의 사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집단 이기적인 성격의 정의의 개념을 국제적으로 강요하게 되면 그것은 패권국의 만행이 되고 맙니다. 또한 국내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는 여전히 서로의 정의가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의 공의의 개념 곧 생명을 돌보고 살리라는 여호와의 뜻이 정의의 충돌을 해결하는 관건이 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좁은 개념의 정의보다는 넓은 개념의 공의 곧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명사랑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취지라고 하겠습니다(3:4, 12:30-31).

(2)  이방인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22:3b);

1)    널리 국제적으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또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정의사회를 구현하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사람들은 누구나 공의에 입각하여 이방인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는  살길이 막막한 고아와 과부의 생계를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의 구현이며 복지의 실현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은 벌써 모세의 율법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2:21-24).

2)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죄한 자의 피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직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형 가인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가 여호와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4:10). 그 무죄한 피를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된 땅도 그로 말미암아 그 땅에 여호와의 저주가 임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4:11). 더구나 노아의 홍수 후에는 육식이 허용이 되고 약육강식의 자연계와 인간사회가 도래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무죄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 피를 땅에 흘리게 한 자에게는 반드시 보복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9:5-6). 그에 따라 어느 족속이든지 그 땅에서 무죄한 자의 피를 과도하게 흘리게 되면 여호와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제15장에서는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이 그러합니다(15:16). 또 열왕기하 제21장에서는 므낫세의 유다 왕국이 그러합니다(왕하21:11-16).

(3)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신하들백성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22:4); 주변국의 이방인들에게 창조주 여호와의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명이며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의 실천입니다(19:4-6).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는 같은 피조물인 이웃을 사랑하며 생계가 어려운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이 정의사회의 구현입니다(10:18-19). 그러한 선민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다윗왕조를 축복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인 공의의 정신을 국제적으로 실천하고 국내적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면 다윗왕조의 왕들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22:4).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첨부하는 사진과 같이 예루살렘성의 황금문이 차폐가 되고 그 앞에 무덤만이 즐비할 것입니다.

셋째로,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2: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22:5a);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가 명령하시는 바 국제적인 공의의 실천과 국내적인 정의의 실현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약자의 재물을 탈취하며 힘으로 압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약소국을 침략하여 전리품을 획득하고 포로를 많이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이방인처럼 살아가면서 유다 왕국의 번영을 누리고자 시도하고 있는 다윗의 왕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그 나라에 분노를 부으십니다(21:12).

(2)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2:5b);

1)    포악하게 세상을 다스리게 되면 약자의 피가 그 땅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6:11-13). 그 옛날 노아의 시대에 세상사람들이 약자를 해치고 횡포를 일삼았기에 그 무죄한 자의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홍수심판을 내리십니다(6:1-7, 13).

2)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5:26-27). 그 결과 이방 나그네를 탄압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습니다(5:28).

3)    포악한 군주 므낫세의 뒤를 따라 유다 왕국 말기의 왕들이 하나같이 사회적인 약자를 해치고 무죄한 자의 피를 계속 흘리고 있습니다(왕하21:14-16, 23:25-27). 국내적으로는 정의가 사라지고 국제적으로는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입니다(5:31).

4)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 나라를 멸망으로 심판하고 마시는 것입니다(5:29-30). 무척 아끼시는 선민의 나라를 그렇게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방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25:29).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을 시키고 말겠다는 것입니다(22:5ba). 그 점을 알고서 부디 여호와의 공의의 실천과 정의의 구현에 앞장을 서는 성도들이 되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2:5bb).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깨닫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만 합니다(10:36-37).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생계가 어려운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25:40). 생명을 살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들의 사명입니다(3:4). 그와 같은 맥락에서 부디 여호와의 말씀의 뜻 그대로 공의의 실천과 정의의 구현에 앞장을 서는 성도들이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하였더라면 다윗왕조가 영원한 번영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윗왕조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성도들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려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시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의 영광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차폐된 예루살렘의 황금문과 무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