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OBS교재(손진길 작성)

창세기 제64과(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0. 10. 12. 00:49

창세기 제 64 (45:2-24) <OBS1-64>(손진길 작성)

 

[Q1] 요셉이 방성대곡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형제들만 남게 함(45:1).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요셉은 목놓아 크게 울었는데 그때 터져 나온 방성대곡은 애굽 사람과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림(45:2).

- 여기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놓아 크게 우는 요셉의 방성대곡은 ① 그 정체가 남이 말려서도 안되고 또한 말릴 수도 없는 이른바 스스로 눈물바다로 씻어내어야만 하는 가슴속의 응어리이며 ② 그 시기는 길이요 진리가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험한 인생 길, 한 맺힌 삶의 진정한 이유를 드디어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직전에 터져 나오며 ③ 그 성격은 그 동안 인생살이에서 묻은 때, 그 신발을 벗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음(3:5). 따라서 방성대곡이란 통과의례로 씻겨나가고 있는 것은 미움과 원망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인간의 정인 것임(45:1).

- 인간 요셉의 경우도 지난 22년 동안 ① 형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으며 ② 억울한 종살이와 옥살이에 몸부림쳤으며 ③ 자신을 사랑했던 아비 야곱과 사랑하는 아우 베냐민이 보고 싶어 그리움이 사무쳤다고 볼 수 있음. 그러나 그와 같은 기록이 전무한 요셉의 일대기임,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만 호소하고 사람 앞에서는 항상 진심을 숨기거나 억누르고 살았던 외로운 요셉의 인생이었기 때문임.

- 드디어 그 진심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또한 그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회개하는 형들 앞에서 터져 나온 것이 방성대곡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화해로 나아가는 영적 치유의 절차인 것임.

 

[Q2] 방성대곡으로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낸 요셉이 드디어 진술하는 두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 첫 번째 사실은 자신의 삶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고백이고 두 번째 사실은 앞으로 하나님 능력에 의존한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한 천명임.

- 첫 번째의 고백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 앞에 밝힌 요셉(45:3)은 자신의 인생역경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에 의지하여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기에 이름(45:5-8). 두 번째인 앞날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은 요셉이 선택하는 나머지 인생살이의 방향은 구체적으로 ① 아버지를 봉양하며 ② 모든 아버지의 것을 살피고 돌보는 것임(45:11, 17:6-8,12).

- 위와 같은 요셉의 깨달음과 모두를 살리는 삶의 태도는 100%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가 0%의 사심으로 행하는 믿음의 삶이며 온전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는 비결이 됨(17:10). 그 이유는 내 것을 다 아버지의 것으로 여기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자만이 아버지의 능력을 내 것으로(나를 통하여) 행사할 수 있고 그로써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임.

 

 [Q3]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깨달은 요셉(45:7, 50:20). 그러나 그의 깨달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닌데(4:13-15) 그 점을 보여주는 대목은 어디인가?

- 두 대목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남은 흉년 5년 동안 기경(起耕)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 것이라고 하는(45:6) 극단적인 예언이며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셨다고 하는(45:8) 과장된 표현인 것임.

-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만약 추수가 전혀 불가능한 흉년이 5년간 계속된다면 아무리 식량을 많이 저장한 애굽이라 하더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임. 그 이유는 식량 저장 가능기간이 4년 이내이기 때문임(상세는 제59 [Q3]). 더구나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이웃나라는 전멸의 위기임. 따라서 노아 홍수와 같은 대 재앙을 바라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말씀(8:20-22)에 비추어 볼 때 요셉의 표현은 미성숙한 극단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임.

- 둘째로, 당시 바로 왕의 절대권력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바로의 아비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바로 밑의 총리로 삼으신 것임(41:40-43). 따라서 요셉이 바로의 선생일 수는 있어도 바로의 왕권을 뛰어넘는 아비나 주가 된 것은 아님. 그 때문에 야곱 일행의 애굽 이주에 있어서도 바로 왕의 허락이 필요했음(45:17-21).

- 결론적으로 완전한 깨달음, 곧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하므로 믿는 자는 오로지 그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믿음과 지식의 성장에 한평생 매진할 수밖에 없는 것임(4:13).

 

 [Q4] 위기의식만 조장하는 극단주의, 현실적 바탕과 책임 없는 이상주의를 경계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 큰 재앙, 말세, 인류멸망과 극소수 구원 등의 시나리오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주의는 ① 인류의 번성, 땅의 올바른 경영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1:28)에 어긋나며 ②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 받은 자연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면 부인하고 있음.

- 또한 초()법적, 초 질서적, 초 자연적 이적과 능력 그리고 영적 권위만을 내세우는 이상주의는 ① 현실적 법 체제와 사회질서를 외면하지 아니하신 예수님(12:17)의 태도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② 땅의 하나님(12:1-3, 24:3,4,7)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임.

 

 [Q5] 요셉이 형들을 돌려보내며 “당신들은 노중(路中)에서 다투지 말라”(45:24) 언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 가나안으로 떠나 보낼 때 이복 형들에게는 각각 옷 한 벌씩만 주고 친동생인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5벌을 주었기 때문임(45:22). 그 옛날 채색 옷 사건(37:3,4)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심히 걱정스러운 요셉의 언급인 것임.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으로부터 잘못을 용서받고 선물까지 듬뿍 받은 형들이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극적 화해는 아직 성품변화를 수반한 완전한 화해와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인 것임. 그와 같은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음. 바꾸어 말하자면, 의화(Justification)가 바로 성화(Sanctification) 및 영화(Glorification)는 아닌 것임.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칭의를 받은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진정한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며 또한 수많은 인내와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