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107강(렘19: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6. 21:45

예레미야 강해 제107(19: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95()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선민 유대인들의 장로 및 제사장들과 함께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19:1-5)

 

선지자 예레미야는 제18장에 토기장이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입니다;

(1)  첫째,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이스라엘 족속도 여호와의 손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18:6).

(2)  둘째,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지 않고 잘 견디면 토기장이가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들어 내듯이 그렇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을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인 선민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8:7-8).

(3)  셋째, 그러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뜻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그 손으로 진흙으로 된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18:4, 9-10). 그것은 여호와께서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족속을 부수어 버리고 그 자손을 사용하여 새로운 만민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18:11-12, 16:14-15, 31:31-34, 11:1-12).

그와 같은 토기장이 비유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본문 제19장 제1-2절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장로들 및 원로 제사장들과 함께 질그릇 조각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하시드 문을 지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나중의 강해에서 검토할 내용입니다마는 제10-11절에서는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 제단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면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토기장이가 그 손에서 터져버린 그릇을 부수어 버리듯이 그렇게 여호와께서는 우상을 섬긴 유다 왕국의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19: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19:1-2a);

1)    본문 앞에 있는 제18장의 토기장이의 비유에 따르게 되면 토기장이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옹기는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으로서 그것은 여호와께서 만든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그릇을 사서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성 동남방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하시드 문을 통하여 골짜기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2)    여기서 하시드라고 하는 말은 질그릇 조각’(potsherd)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시드 문을 영역본인 NIV NRSV에서는 the Potsherd Gat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19:2). 그리고 KJV번역본에서는 하시드 문의 위치가 동쪽의 끝이며 남쪽에 가까운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그것을 동문’(the East Gate)이라고 적고 있습니다(19:2). 일부 학자들은 예루살렘성의 온갖 더러운 것을 내버리는 성문인 분문’(the Dung Gate)하시드 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3:14).

3)    고대 예루살렘성에서 성전은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왕궁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과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성문은 동쪽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편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①하나는, 성전의 문이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들어와야 예루살렘성전에 빨리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동쪽에 기드론 골짜기가 있으며 그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므로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으로 접근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4)    그런데 동남쪽에는 예루살렘 성내의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하시드 문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문으로 쓰레기를 밀어 아래로 떨어뜨리게 되면 그것은 남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와 동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가 만나고 있는 위치에 쌓이게 됩니다. 그것을 인부들이 분류하여 힌놈의 골짜기에서 처리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쓰레기 가운데에는 생활쓰레기, 부서진 질그릇 조각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시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의 하시드 문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한양의 시구 문과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5)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시드 문아래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옹기를 가지고 갈 때에 혼자 가지를 말고 반드시 백성들의 어른인 장로 몇 사람 그리고 나이가 든 제사장인 원로들 몇 사람과 함께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상을 심하게 섬기고 있는 그 골짜기에서 백성들의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해주고자 하는 심각한 말씀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2)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19:2b);

1)    예루살렘 성은 천혜의 요새지입니다. 평균 해발 780m의 고지인데 삼면이 깊은 계곡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협곡으로 통하는 내리막이 있는데 그 비탈의 양쪽 산에서 방어를 하면 통로의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남쪽 산에는 옛날부터 시온 산성이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군대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습니다(삼하5:6-9).

2)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은 동쪽 기드론 골짜기를 타고서 예루살렘성으로 접근을 하거나 아니면 북쪽의 계곡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북쪽의 협곡길인 통로는 엠마오와 아리마대를 거쳐 서편 해안길로 연결이 됩니다(23:51, 24:13). 그리고 요단 강변길을 따라 북동쪽 여리고에서 오는 사람과 물자는 아나돗 근처에서 남쪽으로 돌아 베다니를 거쳐 기드론 골짜기를 타고서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3)    그런데 기드론 골짜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경사가 제법 심하므로 나귀의 짐을 다른 나귀에 나누어 실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베다니의 동북쪽 곧 감람 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벳바게에서 나귀를 빌려서 그렇게 미리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그곳 벳바게에서 어린 나귀를 빌려서 타고 기드론 골짜기를 거처 예루살렘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19:28-44).

4)    예루살렘성의 남쪽 깊은 계곡인 힌놈의 골짜기는 본래 성에서부터 하시드 문을 통해 그곳으로 버려지는 온갖 쓰레기를 매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쓰레기와 오물에서부터 악취가 풍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드론 골짜기 쪽으로 이동을 하면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분향을 하는 장소가 나타납니다. 특히 그곳에는 암몬에서 도입한 몰렉신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는 도벳제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7:31). 왕이나 백성들이 자녀를 번제물로 몰렉에게 바치고 나라의 안녕과 가문의 번영을 크게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무죄한 희생자의 피가 골짜기를 적시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곳을 진작부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7:31-32, 19:2).  

둘째로,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19:3-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9:3a);

1)    다윗왕조 유다 왕국은 수도가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에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부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방에는 많은 유다의 성읍들과 산지와 들판들이 있습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주로 농업과 목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지방의 백성들이 왕도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특권층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에 절기 때마다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북동쪽4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제사장 성읍인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일부러 예루살렘 남쪽의 계곡인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동행한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원로 제사장들 앞에서 과감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첫마디가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9:3a)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2)    ①첫째, “예루살렘 주민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9:3ab)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 왕국의 귀족들과 부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귀족들과 특권층이 잘못 신정국가를 운영하였기에 여호와의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너희 유다 왕들”(19:3aa)이라고 하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유다 왕을 지칭하고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명의 유다 왕들이 여호와의 책망을 듣게 되는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레미야가 태어난 때의 유다 왕이 므낫세이고 그가 선지자 활동을 시작한 때가 요시야 왕 13년입니다(1:1-3). 그러므로 성군인 요시야 왕을 제외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유다 왕국의 왕들이 모두 여호와의 질책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왕하23:25-27).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19:3b);

1)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19:3bb)고 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이 파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①첫째, 여호와의 말씀을 당장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그가 동행한 장로들과 원로 제사장들입니다. ②둘째, 그들을 통하여 예레미야가 외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왕도의 부자들에게 전파가 됩니다. ③셋째, 주변의 이방인들에게도 전파가 됩니다.

2)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창조주 여호와는 이스라엘만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곧 그들만의 수호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9:3ba). 그러나 그것은 선민들의 지극히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므로 자연히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3)    비록 그것이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하여 예루살렘 근방에서 선포가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은 선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 발하시는 말씀이며 그 말씀의 능력은 그들 모든 인류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권능입니다. 그 권능은 어떤 종파나 족속이 함부로 자신의 울타리 안에 결코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3:14, 1:15, 27). 따라서 예레미야가 여기서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19:3bc)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19:4);

1)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성을 위한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보기에 그곳은 불결한 곳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땅은 모두 깨끗하고 심히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31).

2)    사람들이 그곳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가 불결합니다(19:4, 6:11-13). 역사적으로 유다의 왕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방신상과 우상을 도입하여 함부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며 신정국가의 왕으로 섬기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유다 왕국을 제마음대로 통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방 신이며 우상입니다. 그들은 제물만 바치면 어떤 소원이라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참으로 편리한 신들인 것입니다.

3)    그렇게 우상을 섬기는 유다의 왕일수록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들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므낫세 왕의 시대에는 많은 무죄한 백성들의 피가 유다 왕국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왕하21:11-16). 그 정도에 그치지를 않습니다.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은 나라의 번영과 왕가의 복을 구하기 위하여 몰렉 신에게 자녀를 번제로 바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왕하16:3, 21:6). 그 때문에 여호와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19:4).

셋째로,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19: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19:5a);

1)    암몬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 밀곰 또는 몰렉입니다. 그 신상은 거대하며 가슴에는 분향제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패망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 그곳 몰렉의 가슴 제단에 왕이 자녀를 번제물로 바칩니다. 그리하면 국면이 전환되어 왕국이 위기를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왕국의 존립과 번영을 바라는 암몬의 이웃인 이방의 왕들이 밀곰 신을 도입하여 섬기게 됩니다(왕하3:27). 그 가운데 불행하게도 선민 이스라엘의 대왕인 솔로몬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왕상11:5).

2)    가장 큰 속죄의 제사가 번제입니다. 속죄의 제물인 가축의 사지와 머리를 절단하고 몸통을 쪼개어 전부 제단에 불살라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6-9). 그런데 더 큰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왕이 정성을 바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잘못된 제례의식이 선민의 사회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몰렉이나 바알에게 어린 왕자를  번제로 바치는 인신제사입니다. 끔찍한 번제의 인신제사가 선민의 나라에서 국왕에 의하여 자행이 되자 여호와께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19:5a). 따라서 선민의 왕국의 멸망이 다가오고 마는 것입니다.

(2)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19:5b);

1)    창세기 제2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리아 산의 번제 사건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애초에 인신제사를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다는 것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시 고대사회에서 무지한 사람들이 최고의 희생의 제사를 인신제사로 시행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2)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되어 있는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26-27, 9:5-7). 그러므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여호와께서 그 산에 미리 준비한 숫양을 대신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22:13-14).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이방신과 우상에게 바치는 인신제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불임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세에 기적적으로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11:30, 18:11-12, 21:1-7). 그 귀한 아들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에 대한 시험이라고 하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22:1).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자신이 만든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아버지가 창조주이신 여호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을 여호와께서는 분명하게 알고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22:1)라는 구절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4)    그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 본문에서는 예레미야가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하거나 한 바가 아니니라”(19:5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같은 의미의 용어 세가지를 한꺼번에 사용하여 창조주의 뜻은 인신제사가 결코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훗날 완전한 대속의 희생제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14, 29, 3:13-17, 7:27-28).

결론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 남쪽의 골짜기인 힌놈에서 인신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암몬에서 도입한 몰렉과 시돈에서 도입한 바알에게 인신제사를 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번영을 도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을 선 유다의 왕이 히스기야의 부왕인 아하스이며 또한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입니다.

모세오경의 시작인 창세기 제2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쳐라고 하는 대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을 시험하여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90세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불임의 아내가 사라입니다. 그녀가 100세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여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만든 아들일까요?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들일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그 아들을 여호와의 뜻대로 바치고자 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급히 사자를 보내어 번제를 그만두게 하고 이삭을 구원하십니다. 그 대신에 숫양을 번제로 바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그 속죄의 양이 훗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믿고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평생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누구나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반면에 현세적인 성공과 번영을 위하여 사람의 목숨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되면 그 나라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기장이가 터져버린 진흙을 부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예레미야가 외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에 매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