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01강(렘17:19-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8월 30일(목)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안식일이 어째서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가?(렘17:19-23)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있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질책하고 있습니다(렘17:19-23). 그렇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어째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세는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제1장에서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창1:3, 6, 9,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의 뜻을 알아야 이 세상을 여호와의 뜻에 맞게 경영할 수가 있습니다.
그 청지기의 일을 사람에게 맡기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창1:26-28).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니고 있기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또한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때 이 세상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창1:31).
그러한 맥락에서 창세기 제2장에서는 모세가 사람들에게 여호와와 함께 안식함으로써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 거룩하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2:2-3).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의 중요성을 모르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떠나서 제멋대로 우상문화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 이유는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들처럼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으로 살고 싶지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 싶지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고 출애굽의 신이시며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출3:6-2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만을 자신들과 나라의 주인으로 섬기고 그 말씀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신6:4-9). 그런데 그것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면서 스스로가 자신들의 인생과 역사의 주인으로 살고 싶지 결코 누구의 하수인인 종으로 살고 싶지가 아니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태적으로 자기실현의 욕구와 권력에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종으로 살아가라고 모세오경이 명령하고 있으니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2) 둘째로,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눈에 이방인들의 우상문화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있으며 편리하게 자신들의 소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마치 요술램프의 종과 같은 신상과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실용적인 입장에서 신상과 우상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면서 편리하게 종으로 부리고 있는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신상과 우상을 도입하여 그것을 섬기고 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게 이방신상과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또 하나의 신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상이 종교적인 범신론이며 혼합주의입니다. 그러한 우상문화와 혼합주의 사상이 범람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에 있어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이 별로 없습니다. 열왕기하 제23장에서는 유다 왕 요시야가 가장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실시한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23:25). 참고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송아지 우상을 여호와로 만들어 섬겼기 때문에 요시야 왕과 같은 일신론적인 종교의 개혁이 있을 수가 없으며 그 때문에 주전 722년에 일찍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7:5-6, 21-23).
그런데 요시야 왕의 성전청결운동과 일신론적인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한가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히브리경전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라고 하는 조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에 의한 완전한 개혁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제23장의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하여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왕하23:3-25). 유다 왕 요시야가 모든 이방신상과 우상을 없애고 그 분향제단을 파괴하는 한편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죽였으며 유월절 행사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조치하였지만 어느 대목에 있어서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한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호와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라고 포괄적으로 지시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강조한 대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조부인 므낫세 왕이 55년간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악하게 통치하면서 우상을 과도하게 섬기는 한편 모세오경과 기타 경전을 철저하게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국에서는 불행하게도 경전과 더불어 율법학자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왕하21:1-17, 22:8, 13).
율법을 제대로 아는 선생이 없는데 누가 백성들을 율법책을 가지고 교육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문에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부디 모세오경을 비롯한 히브리경전을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라고 동족들에게 강력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렘17:19-23).
참고로, 그와 같은 입장에서 유다 왕 요시야의 성전청결과 종교개혁의 목적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의한 여호와신앙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국내외적으로 흩어져 있는 히브리경전의 사본들을 수집하는 운동을 벌이고 율법선생들을 양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당시의 패권국인 앗수르가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공격을 받아 동부전선에서 정신없이 전쟁을 하고 있는 좋은 기회를 엿보아 그 서쪽에서 유다 왕국의 발전을 도모한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국론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위한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여러 이방신상과 우상을 여호와와 함께 섬기고 있는 혼합주의적인 종교를 개혁하여 조상들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일신교를 크게 장려함으로써 종교적 사상적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종교개혁이었기에 진정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작업이 전무하며 그것이 혼합주의적인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개혁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급서하고 나자 그의 후계자들이 하나같이 요시야의 정책을 이어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왕하23:25). 도리어 우상문화가 극성했던 므낫세의 시대로 되돌아가버리고 맙니다(왕하23:26). 그에 따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마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3:27).
그러한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을 참조하게 되면(렘1:1-3)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어째서 그토록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주일 가운데 하루만이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기에 열과 성을 다하라고 강조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된다고 하겠습니다(렘17:19-23).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the people’s Gate)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렘17:19-20);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렘17:19a);
1)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 기록이 되고 있는 안식일에 대한 강조는 자신의 개인적인 권면이 아니라 강력하신 여호와의 말씀임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멀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되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망국의 백성으로 이방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들의 자손들이 먼 훗날 여호와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으로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2)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안식일에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며 그 앞에서 영적인 교제를 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공부하고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기본입니다(창17:1). 그렇게 매주 하루만이라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공부를 할 때에 한주간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도들도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선한 청지기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창1:1-3, 26-27, 눅24:44-49, 행6:4).
(2)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무리에게 이르기를”(렘17:19b-20a);
1) 예루살렘성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동쪽의 문 2개가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성전의 입구가 동쪽에 있는데 그 쪽으로 연결이 되는 성문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스데반 문’이라고 불리는 ‘사자문’(the Lion's Gate)이 있으며 또한 ‘황금문’(the Golden Gate, 미문)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이 그 둘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니면 그 둘 모두로 보입니다.
2) 주전 5세기 느헤미야 시대에 ‘수문’(the Water Gate, 느8:1)이 있고 그곳에 큰 광장이 있습니다. 우물물을 길러 많은 백성들이 모이므로 그곳에 넓은 광장을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그곳 광장에서 많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느8:1-9).
3)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서 그대로 실천을 하게 되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리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멀리하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다가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요컨대, 예루살렘 성문을 계속 출입하고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혀서 그대로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만나고 그 말씀을 배우는 거룩한 날이 적어도 7일 가운데 하루는 정기적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3)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렘17:20b);
1) 참고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 다음과 같은 9개의 성문을 건설하고 있습니다(느3:1-31, 8:3); ①양문(the Sheep Gate, 느3:1), ②어문(the Fish Gate, 느3:3), ③옛문(the Old Gate, 느3:6), ④골짜기 문(the Valley Gate, 느3:13), ⑤분문(the Dung Gate, 느3:14), ⑥샘문(the Spring Gate, 느3:15), ⑦마문(the Horse Gate, 느3:28), ⑧함밉갓 문(the Inspection Gate, 느3:31), ⑨수문(the Water Gate, 느8:3) 등입니다.
2)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그 정도로 많은 성문을 일일이 찾아가서 그곳을 통과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공부하고 실천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렘17:19b-20a). 그것은 신약시대에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과 벌써 맥이 닿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렘17:20b, 마24:13-14, 28:18-20, 행1:8).
둘째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17:21-2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렘17:21-22a);
1)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됩니다(출16:30). 그 이유는 매일 새벽에 내리는 양식인 만나의 생명력이 하루 뿐인데 안식일 전날에 거둔 곱절의 만나는 그 생명력이 특별히 이틀이기 때문입니다(출16:24, 29). 그러므로 안식일 전날에 거둔 만나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미리 요리를 해두고서 그 이튿날인 안식일에는 하루 종일 자신들의 천막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읽고 묵상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안식일에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틀치의 양식을 주셨는데 노동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여호와로부터 자신들의 기업으로 얻은 다음부터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활에 있어서 변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신위적으로 광야의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 이슬처럼 내리는 만나를 거두어서 양식으로 삼는 삶이 더 이상 아닙니다(수5:12).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게 되면 일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생산이 됩니다. 더 열심히 일하게 되면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가 있습니다. 자력으로 잘 먹고 잘 살며 남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가 있으며 인생의 낙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눅12:19). 그러므로 매일 새벽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만나를 얻어야만 하루의 생계가 가능했던 그러한 매일 양식에 종속이 되던 처량한 신세가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
3) 이제는 자신들의 역량으로 먹고 살고 더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세상인데 여호와의 안식일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신8:11-14).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율법으로 안식일에 열심히 배워보아야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신6:4-9). 남을 돕고 함께 잘 살기 위하여 자신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라고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고 있으니 그것이 실제적인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백성들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신10:18-20).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4) 역사적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있었지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조치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조부인 므낫세 왕이 히브리경전을 거의 없애 버린 터라 유다 왕국에서 율법학자가 사라지고 율법선생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한 시대이므로 안식일이 되어도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신앙의 기본을 허물고 있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렘17:21-22a)라고 강력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2)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17:22b);
1)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야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렘17:22b).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 앞에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형태로 주십니다(출19:4-8, 20:1-24:6). 모세는 그 율법으로 신정국가를 운영하면서 재판도 하고 있습니다(출18:13-16).
2) 그러나 일일이 소송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출18:18). 따라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의 관료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율법으로 교육시킨 다음에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출18:19-26). 그에 따라 큰 천막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들 관료들이 안식일에 율법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와 같은 전통을 회복하라고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17:22b).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기본적인 회복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매주 하루 안식일이라도 백성들이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신앙적인 결단을 했더라면 범신론적인 혼합주의와 무신론적인 우상문화에 빠져들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17:23);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렘17:23a);
1) 안식일이 되면 선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의 예배에 참석을 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집에서라도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렘17:23a).
2) 그들은 아예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를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러 예루살렘성전에 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보다 못하여 선지자가 그들을 방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듣고자 전혀 귀를 기울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3)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선지자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한평생 제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떠난 인간들의 범신론적 또는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4) 그러한 사고방식의 이면에는 율법으로 선민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고 있는 여호와보다는 아무 구속이 없이 그저 제물만 많이 바치면 백성들의 일방적인 소원을 잘만 들어주고 있는 이방신이나 우상이 훨씬 낫다고 하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2)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17:23b);
1) 자신의 의견이 남의 의견보다 더 낫다고 생각을 할 때 사람들은 그 목을 꼿꼿이 쳐들게 됩니다(렘17:23ba). 상대가 자기보다 하수로 보이기 때문에 거만스러운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태도를 피조물인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그 이유는 세상살이를 하는데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과 그 명령보다는 선민인 자신들이 선택하고 있는 세상적인 방법론이 훨씬 효과적이며 낫다고 하는 기본적인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정경에 적혀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습니다(렘17:23bb). 그리고 선지자가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3) 하루 종일 예루살렘성전이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공부를 해보아야 그것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아무 도움이 되지를 못한다고 속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큰 것을 하나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선택하고 있는 그 세상적인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현세적인 이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면 되지 상대방에게 어떠한 불이익이 돌아가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약육강식의 법칙입니다. 그러한 사회생활을 너도나도 영위하게 되면 당장은 자신이 이익을 볼지 몰라도 결국에는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윈윈’(win-win) 전략이나 ‘플러스섬’(plus-sum) 게임이 아니고 모두가 망하는 길입니다. 모두가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창6:3-7).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정확하게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들 성도들이 땅끝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간 성도들이 마침내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눅22:28-30, 계21:22-26). 그들의 이름이 벌써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5:24, 계21:27).
그러므로 아무쪼록 복음의 일꾼으로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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