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99강(렘17:12-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27. 13:28

예레미야 강해 제99(17: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828()

 

예레미야가 동족들에게 그들의 생각과 행동 가운데 무엇을 고쳐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문에서 시사하고 있는가?(17:12-14)

 

본문을 언뜻 보면, 12절은 시편의 찬양과 같고, 13절은 창세기에 기록이 된 인간의 타락과 같으며, 14절은 여호와께 고침과 구원을 간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그 세 구절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그것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족들에게 어떻게 하면 여호와께 돌아가서 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은근히 말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지를 잠깐 설명을 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유다 왕국이 망하고 예루살렘성전이 붕괴가 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 성소를 두시고 그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망국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17:12).

(2)  둘째로,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고 음란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나라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17:13a). 그러므로 아직도 여호와의 말씀을 영생의 생수로 마시며 영적인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창조주 여호와께 돌아가는 천국에의 소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17:13b).

(3)  셋째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피조물인 인간의 잘못을 온전하게 고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모든 우상문화를 떠나야 합니다. 오로지 전능하신 창조주의 권능을 찬송하면서 여호와 앞에 나아가 고침을 받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라고 예레미야가 동족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17:14).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영화로우신 보좌,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17: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영화로우신 보좌,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17:12a);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창세기 제1장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동족들에게 은근히 권유하고 있는 대목입니다(1:1-2). 왜냐하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성전에 성막을 모시고 오래 율법에 따른 제례의식과 안식일을 지켜오는 동안에 그만 창세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의 보좌의 영광을 잊어버리고서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주전 722년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이후 홀로 남은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자신들만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전에 출입하면서 율법규정에 따른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 앞에서 안식일을 지키게 되면 선민 유대인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서 다윗왕조가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3)    과연 그러할까요?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냐와 같은 거짓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신바벨론제국과 맞서 전쟁을 하더라도 승리는 유다 왕국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8:1-4).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신앙을 버린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다윗왕조가 망하고 망국의 백성으로 이방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습니다(6:1-8, 7:8-15).

4)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의 생각과 역사섭리가 선민 유대인들이 집단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피조세계인 우주 그 바깥에 영화로운 보좌를 가지고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1:1, 17:12a). 태초부터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들을 그 권능의 물로 뒤덮으시고 그 바깥에서 팽창하는 흑암의 세력을 제어하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2).

5)    그와 같은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그 전능하신 창조주의 영광을 천국의 보좌와 함께 묵상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전 그 깊은 지성소 언약궤와 속죄소에만 여호와께서 임재하여 계시면서 선민 이스라엘의 수호신으로만 일하고 계신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를 이기적인 선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가두어 버린 엄청난 패역함입니다.

6)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제때 드리고 안식일 예배만 잘 드리면 선민 유대인들이 아무리 이방신을 섬기고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에 젖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는 항상 자신들을 구원하여 준다고 하는 이상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선민들이 어리석은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있는 불신앙입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지성소에 가두고 선민들의 이기적인 영광만 추구하였기에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7)    그와 같은 당면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의 보좌가 태초부터 피조세계의 바깥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높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을 비추고 있어 피조세계가 온전히 운영이 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7:12a). 그것이 현세적인 이기적 신앙을 벗어나서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첫번째 관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편에서도 많은 지혜자들과 선견자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8:1, 19:1, 47:1-9, 67:1-3, 82:1, 90:1-2, 93:1-2, 94:1-2, 97:1-12, 99:1, 100:1, 104:1-9, 108:4-5, 113:1-4, 121:1-8, 123:1-2, 127:1, 148:1-14, 150:1).  

(2)  우리의 성소이시며”(17:12b);

1)    멀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17:15, 34).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이 전부 황폐하게 되고 맙니다. 그 찬란한 예루살렘성전도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민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여호와의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25:21-22)

2)    예레미야는 이 땅에 있는 성전과 지성소는 불에 타고 파괴가 될 수 있지만 하늘 위에 있는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성소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선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그 지성소를 생각하지 말고(7:4) 하늘 그 위에 있는 창조주 여호와의 성소를 믿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라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면하고 있습니다(17:12b). 그것이 믿음회복의 첫번째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7:1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17:13a);

1)    소망이라고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의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미래에 이루어질지 아니할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래의 실현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를 믿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소망은 그 뿌리를 믿음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을 정의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한 것일까요?

3)    소망의 대상에 대하여 역시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

4)    믿음의 열조들은 땅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기를 원하면서 믿음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기업을 얻고자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나그네와 같은 믿음생활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기록입니다(11:16, 26).

5)    사실은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을 얻는 것이 모든 믿음의 열조들과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앞에서 그 종으로 살아가는 믿음생활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히브리서 저자와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현세적인 축복을 누리고자 현실에 안주하면서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다음과 같이 영위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을 자신들 선민들만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지를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가 창조주이심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다가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하는 것이 선민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7)    ②둘째, 현세적인 복을 얻고자 이방신상과 우상을 도입하여 전부 섬기고 있습니다. ③셋째,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쾌락과 향락을 누리는 것이 그들의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④넷째,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세상적인 퇴폐와 향락을 누리고 살더라도 예루살렘성전에서 절기를 지키고 속죄의 제사를 매년 드리며 안식일을 잘 지키게 되면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여전히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8)    그와 같은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한 결과 선민의 나라가 차례로 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선민의 나라인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방인들의 차례가 됩니다(25:29).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시고 그때부터는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누구나 멸망으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4:13-14). 그것은 조국이 망하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인생의 결말이 될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기록인 것입니다(17:13a).

(2)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17:13b);

1)    하늘에 있는 성소흙에 기록이 되는 것이 묘하게도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성소를 바라보고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믿음생활을 한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이 되고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지만(10:20, 21:22-27) 이 땅에 소망을 두고 현세적으로 그리고 이기적으로 육신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그 기업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그들의 삶의 기록마저 흙에 묻혀서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7:32-34, 7:21, 12:19-21).

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17:13b)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삶만을 추구하면서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게 되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영생의 구원을 얻지를 못하고 그 육신의 죽음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12사도의 이름은 흙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12대문의 기초석에 새겨져 있다고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21:13-14).

(3)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7:13c);

1)    훗날 사마리아 수가 성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나이 많은 과부를 만나서 우물물을 좀 나누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4:5-7). 그녀는 유대인으로 보이는 예수님이 이방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말합니다(4:9).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수가 성의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고 말씀하십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는 사람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할 수 있는 생명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우물물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우물물을 계속 마셔야 생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적인 생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하늘 보좌 앞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생명수입니다(22:1). 그러므로 그 생수는 사람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3)    그 생명수가 흘러나오고 있는 강가에 생명나무가 뿌리를 박고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22:2).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뻗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온전히 실천하는 삶을 본받아 살아가게 되면 그 영생의 생수를 마시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써 그러한 생수를 마시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14:16-20, 1:8).

4)    그와 같은 새 언약의 시대를 소망하라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기서 은근히 권면하고 있습니다(17:13a, 31:31-34). 그 이유는 그의 동족들이 여호와를 떠남으로써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영생의 구원을 주는 생수도 얻지를 못한 채(17:13c) 마침내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마치 흙에 새긴 이름과 같은 덧없는 인생들이 되고 말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17:13b). 그러므로 이제는 영생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구원의 생수를 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셋째로,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7:14);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17:14a);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의무입니다. ②둘째, 창조주만이 피조물인 인간을 온전히 고칠 수가 있습니다.

2)    여호와가 아닌 다른 존재 곧 어떠한 피조물이나 영적인 존재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사람을 온전히 고칠 수가 없습니다(1:26-27).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아닌 다른 영체나 피조물이 사람을 고친다고 함부로 손을 댄다면 그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선지자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부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여 고침과 구원을 받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방 땅에서 우상을 계속 섬기게 되면 온전한 고침을 받지를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허망한 인생들이 되고 말 것임을 명심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7:14b); 영생의 구원은 창조주 여호와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7:14b). 그러므로 조국이 망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창조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므로 망국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예레미야는 동족들이 모두 하늘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에 소망을 두고서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망국의 백성으로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생의 생수를 마시면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의미가 있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조국이 망하고 이방 땅에서 망국의 백성으로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생의 천국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큰 소망입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70년 가까운 세월을 남과 북으로 헤어져서 살아온 가족들이 다시 만나 짧게 상봉을 하고 있는 눈물의 현장이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 짧게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혈육들이 살아서 이제 다시 언제 만나게 될지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이제는 이 땅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로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산가족의 소망과 믿음을 선지자 예레미야는 동족들이 이제는 가져야만 한다고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