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 짙은 안개9(손진길 소설)
인생을 살다 보면 힘든 시기는 천천히 지나가고 좋은 시기는 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그런지 조우제가 자신의 집에 장경옥을 입주시키고 나자 세월이 빨리 지나가고 있다. 두사람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주 6일 동안 아침 일찍 라우스힐 집을 출발하여 동쪽에 있는 시드니 북쪽 해안가의 노스 쇼어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하루에 홈클리닝을 5-6집 정도 하고 나면 하루가 저물고 있다. 두사람은 예전에는 점심시간에 현지에 있는 ‘맥도날드’(McDonald's)나 ‘헝그리잭’(Hungry Jack's)과 같은 패스트푸드 점에 들러 빵과 칩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같은 집에 살게 되면서 이제는 그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새벽에 장경옥이 일찍 일어나서 간단하게 조반을 준비하면서 아예 점식시간에 먹을 수 있도록 2개의 도시락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우제와 장경옥은 오전 청소를 마치면 인근 공원에 차를 세워 두고 그곳 벤치에 앉아서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다.
장경옥이 별도로 과일을 챙겨오면서 보온병에는 따뜻한 국물과 커피까지 준비하여 가지고 온다. 그 덕분에 조우제가 호사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3월이 되자 그가 한번은 그녀에게 웃으면서 말한다; “이거, 내가 장상과 계속 청소하러 다니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요. 점심식사비용까지 엄청 아끼고 있으니까 말이예요!...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이 호호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돈도 돈이지만 건강을 생각해야지요. 옛날같이 계속 점심식사로 패스트푸드를 먹게 되면 몸에 이상이 생겨요. 신진대사가 잘 되지 않고 채소류가 부족하여 성인병이 찾아와요. 그러니 이제는 나이가 33세인 조형이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호호호… “.
그 말에 조우제가 고개를 크게 끄떡이면서 말한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렇지만 이 좋은 세월이 금년말에 끝날 것을 생각하면 그 다음이 문제가 되지요. 다시 옛날로 돌아가게 되니 그때가 나는 벌써 걱정입니다. 캘리빌의 짙은 안개 그 농무(濃霧)지역을 겨우 빠져나온 것 같은데 일년 후에는 다시 그 농무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마음속이 먹먹하여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저 조우제의 그 쓸쓸한 얼굴을 힐끗 쳐다볼 따름이다. 그날은 오후에 홈클리닝을 하면서도 장경옥은 조우제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청소를 마치고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장경옥이 조수석에서 남몰래 깊이 생각하고 있다; ‘다정도 병인가?... 나도 모르게 내가 마치 조형의 부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구나. 매일 함께 출근하고 하루 종일 붙어서 일하고 있으니 어느 사이에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
장경옥이 운전하고 있는 조우제 몰래 고개를 숙이고서 계속 생각을 한다; ‘더구나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에도 같이 한인교회에 출석하고 쇼핑도 함께 다녀오지 않는가! 나는 그만 그것이 좋아서 그 다음 일을 잊어버리고서 살고 있구나!... 금년이 지나면 나는 조형만 혼자 남겨두고 다시 공부하기 위하여 뉴카슬로 떠나가야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나?... ‘;
이제 나이 서른인 장경옥이 깊은 생각에 빠지고 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른쪽의 운전석에서는 조우제가 한시간 이상 신호등만 보고서 길을 달리고 있다. 운전 중에 다른 생각을 하면 그같이 위험한 일이 없다. 그래서 조우제는 일체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앞만 살피고 계속 달릴 따름이다.
며칠이 지나자 3월 16일 수요일에는 새벽 5시에 두사람이 라우스힐 집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스 쇼어에 살고 있는 고객 오데트와 마이어 부부가 새벽 6시반부터 자기 집을 청소해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날 조우제와 장경옥은 집주인 내외가 바닷가에 나가서 수영을 즐기는 사이에 빨리 홈클리닝을 마치고자 한다.
그 집청소를 끝내고 노스 쇼어 다운타운이 바라다 보이는 찰스의 펜트하우스로 이동하여 그 집에서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찰스의 부인은 남편이 돈이 많아서 아예 청소부에게 세탁까지 맡기고 있다. 따라서 그 집에서는 장경옥이 두배로 바쁘다. 주어진 시간내에 그 많은 빨래를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하여 전부 마쳐야 한다. 그러면 조우제가 빨래한 것을 개고 이어서 각방의 베딩(bedding)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이 많은 대신에 그 집에서는 청소비용을 곱절로 주고 있다. 덤으로 세탁과 베딩까지 일체를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찰스 부부가 어째서 그렇게 돈이 많은 것일까? 하루는 귀가길에 장경옥이 운전을 하고 있는 조우제에게 슬쩍 물어본다.
조우제는 운전에 신경을 쓰면서도 조용히 대답한다; “일찍 호주로 이민을 온 유대인 찰스는 시드니에서 섬유공장을 경영하여 큰 부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공장이 놀랍게도 시티 다운타운 중심지 조지 스트리트 남쪽 끝에 있어요. 그 땅값만 계산해도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지요. 그러니 노년에 이 정도의 호사는 누려도 되는 사람입니다…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이 다시 질문한다; “그렇게 부자 노인이면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벌써 나누어 주었겠군요?... “. 운전을 하고 있던 조우제가 잠시 신호등 대기가 걸리고 있는 사이에 천천히 대답한다; “나도 그 점이 궁금하여 사실은 유대인 부자인 찰스와 마이어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두사람의 대답이 동일했어요… “.
장경옥이 경청하는 것을 보고서 조우제가 이어서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에 10만불 정도 주고 그 다음에는 결혼선물로 집을 한 채 씩 주면 그것이 끝이라고 하더군요;
그 점을 생각하면 유대인 부자들이야 말로 가장 그 의식이 서구화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저는 그것이 이해가 되네요. 자신들이 호주에 와서 고생하여 돈을 벌고 자수성가를 했으니 자식들도 그 정도 각오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면 그 보상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사회와 제도를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
운전을 계속하면서 조우제가 고개를 끄떡인다. 생각보다 장경옥의 견해가 똑 부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한다; ‘간호보조원으로 생활하다가 호주로 온 장경옥이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어째서 대학진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일까? 서울에서 그 집안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
그러한 의문을 가진 조우제가 며칠후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집에서 장경옥에게 은근히 물어본다; “장상, 나는 부모님이 돌아 가시자 가업을 맡아서 대신 경영하고 있던 형내외가 그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 미국으로 도피하고 말았다는 우리 집안의 비사를 이미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곳 호주에서 힘들지만 그래도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한번 돈을 크게 벌어보고자 작심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장상의 경우에는 어떻게 된 것이지요? 저와 비슷한 집안환경인가요?... “.
그 말을 듣자 순간 장경옥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리고 있다. 조우제는 자신이 잘못 질문한 것인가 싶어서 얼른 말한다; “장상, 말하고 싶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장상이 괴로워하는 과거지사를 묻고 싶은 생각은 정말 없어요… “.
잠시후에 장경옥이 마음을 추스렸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한다; “저는 서울에서 일찍 도(都)목수로 이름을 날린 인동 장씨 윤자 수자 어르신의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오빠 3사람과 언니 한사람은 모두 저보다 10살이상 나이가 많아요. 해방 후 그리고 전쟁 후에 서울에서 한옥마을을 많이 지은 아버지는 큰 돈을 벌었지요. 그런데… “;
장경옥이 잠시 숨을 쉰 다음에 다시 말한다; “그 큰 재산이 그만 큰 오빠와 둘째 오빠의 삶을 망가뜨리고 말았어요. 공부를 잘하여 일류대학을 나온 두 오빠가 제 갈 길로 가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경영하고 사용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언니는 이화여대를 나오고 시집을 잘 가서 서울에서 잘 살고 있어요. 그렇지만… “.
조우제가 처음 듣는 장경옥의 집안이야기라서 계속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재산을 나누어 가진 두 오빠가 경쟁적으로 흥청망청하다가 그만 전부 탕진하고 말았어요;
바로 그때 제가 여고를 마치고 대학입학 시험준비를 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간호보조학원을 빨리 마치고 독립을 했어요. 그런데… “;
기구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셋째 오빠가 의사인데 일찍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았어요. 두 오빠는 동생에게 사정사정하여 모두들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들어가고 말았지요. 그것도 홀로 남은 어머니를 제게 맡겨 놓고 미국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
그 말을 듣고 있던 조우제가 얼른 질문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하는 언니는 어째서 친정 모친을 맡지 않았지요?... “. 그 말에 장경옥이 픽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 시집은 뼈대가 있는 가문이라 사돈을 맡아서 보살피는 그러한 외람된 일을 하지는 않는 답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대신에 언니가 조금씩 생활비를 보태어 주었지요… “.
말을 듣고 보니 그 다음이 궁금하다. 조우제의 생각을 아는지 장경옥이 속 시원하게 설명한다; “3년전에 미국에서 자리를 잡게 된 큰 오빠가 어머니를 모시고 갔어요. 홀로 남게 된 저는 한국에서의 간호보조원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이곳 호주로 들어왔지요. 이상입니다”;
남에게 실토하기 어려운 가정사이다. 그렇지만 장경옥은 조우제에게만은 그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째서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한편 장경옥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서 조우제는 계속 고개를 끄떡이면서 깊은 생각에 빠지고 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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