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5강(롬5:1-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3. 12:48

로마서 강의 골자 제5(5:1-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517()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선을 보이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무엇이 오고 있는가?(5:1, 15:6, 21:1-7, 1:12-13)

(1)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과 사래의 이해와 실천의 한계(15:4-6, 16:14);

1)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4-6);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여호와께서는 이루어 주실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브람이 믿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있는 것임.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통념과 세상적인 이치에 묶여 있는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인간적으로 모색하고 있음. 그것이 귀한 헌신이라고 생각하고서 사래가 안방마님의 체면과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씨받이 첩으로 제공을 하고 있는 것임(16:1-3). 그 결과 늙은 아브람이 젊은 첩 하갈과 동침함으로써 아들을 얻고 있음(16:4, 15-16).

3)    그와 같은 아브람과 사래의 인식과 행동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물학적인 생각과 사회적인 통념을 따르고 있는 것임. 즉 창조주의 능력을 인간의 고정관념 안에서만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하겠음.

4)    그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생각과 역사의 창조를 단순하게 물질적인 이 세상의 법칙으로 한정하고 마는 인간의 불신앙임. 더 쉽게 설명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능력으로 바꾸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 세상의 법칙 안에 가두고 마는 한심한 종교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임.

(2)  인간의 생각과 관습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17:17-19, 18:10-14, 21:1-7);

1)    평생 불임여성으로 늙어버린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낳도록 하신다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웃고 있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7-19).

2)    불임여성으로 늙어버린 사라 자신의 처지와 남편 아브라함의 늙은 몸을 생각하고서 사라는 감히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비웃고 있는 것임;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0-14).

3)    그러한 그들 부부의 불신앙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비웃음을 일년 후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서 현실적으로 믿게 되는 신앙적인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심.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웃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속의 아들이삭이 실제로 태어나는 것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8일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100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21:1-7).   

(3)  인간의 헌신과 제사를 뛰어 넘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22:10-14, 11:18-19);

1)    아브라함의 시대 사람들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헌신과 희생의 제사가 바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人身) 제사임.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여호와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아브라함 부부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에는 최대의 헌신과 희생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기로 결심을 하고 실행을 하고 있음(22:1-10).

2)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부부의 신앙의 상태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임(22:1-2). 다음과 같은 이유와 목적이 그 시험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겠음; ①첫째, 여호와께서는 다른 수호신이나 우상들이 원하고 있는 그러한 인신제사를 싫어하신다는 것임. 왜냐하면 생명의 창조주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고 그것을 제물로 받고자 할 리가 없다는 것임(1:26-27). 그래서 인신제사로 드려지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마련하시는 것임(22:13-14). 여기 모리아 산에서는 여호와 이레가 숫양이지만(22:13)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임(1:29, 5:1).

3)    ②둘째,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선은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음(18:19, 5:43-48). 반면에 이 세상을 지배하고 피조물을 해치고 있는 자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임(8:2, 2:1-3, 6:12).

4)    ③셋째,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을 아낌없이 행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것임(22:12-14). 그것을 히브리서의 저자도 밝히고 있음(11:19). 요컨대, 하나님 경외라고 하는 것은 ①여호와 이레의 은혜, ②부활의 역사, 그리고 ③영생의 구원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음.  

(4)  목숨과 현세에 묶여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영생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들(1:12-14, 3:13-16, 14:16-20, 24:49, 1:8, 11:16, 26);

1)    첫째, 말씀의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다는 것임(1:12-14, 3:13-17, 5: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2)    둘째,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서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땅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재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것임(24:49, 1:8);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3)    셋째,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성도들의 심령속에 마련이 된 성령의 전에 함께 임재하여 역사를 하신다는 것임(14:16-20, 8:1-2);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거하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6-2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4)    넷째,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가지고 살아간 자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얻게 된다는 것임(11:16, 2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2.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로 말미암아 어떠한 소망을 바라보고 있는가?(5:2-6)

(1)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5:2-4)

1)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 5:1)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 인내는 연단,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2-4);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음;

1)    첫째,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을 기적으로 얻게 됨. 그리고 영생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서 번제로 드리고자 한 것임. 그것을 보고서 여호와께서는 이삭을 살리시고 그 대신에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대속의 속죄양을 준비하여 그것을 바치도록 하신 것임. 그것은 영생의 하나님을 믿으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는 속죄양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심판을 면하고 부활과 영생의 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다고 하는 진리를 미리 보여주신 것임.

2)    둘째, 실제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발생했던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과 무덤 속 부활이 그 영생구원의 증거가 되고 있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대속자이며 구원주로 믿게 되면 자신에게도 이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과 같은 영적인 삶, 자신의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는 믿음의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확고하게 주어진다고 하는 것임. 그것이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 5:1)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5:2) 얻게 된 것임.

3)    셋째, 성도들의 거듭난 믿음의 인생 가운데 그러한 미래의 약속에 대한 즐거움만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님. 더 큰 은혜가 주어지고 있음.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 인내는 연단,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2-4)라고 설명하고 있음.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성도의 삶 가운데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인내로, 동일한 환난을 그 다음에는 더욱 거뜬하게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연단으로, 그 연단과 믿음의 성숙 다음에는 하나님자녀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으로 계속 주어지고 있다는 것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를 할 수가 있음.

(2)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떠한 소망을 바라보고 있는가? (5:5-6)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5-6);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보고자 함;

2)    첫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부활과 영생의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선례가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으며 또한 소망할 수가 있는 것임.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생한 그 부활과 승천이 제자들에게 있게 된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확인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그와 같은 성도들의 미래는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내세적인 것이므로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여 증거해줄 수 있는 영적인 도움이 절실함. 그에 따라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를 하시게 된 것임.

4)    셋째, 성도들의 거듭난 삶에 동행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한가지 사실을 증거해주는데 그 의미가 큰 것임.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게 되면 성도들에게도 예수님에게 발생한 그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생이 그대로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게 해주는 것임.

5)    넷째,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압축하고 계심;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구하는 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대속자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5:6) 성령님을 주시고 함께 인생을 살아 주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성도들을 영생의 천국으로까지 인도하고 있다는 것임(5:5).

 

3.    예수님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이며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때(5:7-8),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며 어떻게 부활의 소망을 가지며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5:9-11)

(1)  예수님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음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비교할 때 그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5:7-8)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사람들에게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그 절대적인 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임.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성령님을 임재시켜서 하나님의 공의와 선을 행하게 하고 부활과 영생을 주신다는 것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임. 여기서 사람들의 정의(正義, justice)와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가 다르기 때문에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보고자 함;

2)    첫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두가지로 보여주시고 있음; ①하나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임. ②또 하나는 선민들의 정의를 주장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임.

3)    둘째,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사람들의 정의와는 다른 개념임.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음. 따라서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한 집단의 이익은 반드시 다른 집단의 손해를 동반하고 있는 것임. 그것이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정의의 개념임. 그와 달리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주의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동등하게 돌보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시는 것임. 그것은 재화의 한정이라고 하는 기본전제를 깨지 아니하면 결코 이 세상에서 실현이 될 수가 없는 개념임. 따라서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힘입어서 실천하여야 하는 것임.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그러하며 부활의 능력을 선 보여주신 것이 또한 그러한 것들임.

4)    셋째, 자기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고 있는 이기적인 정의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게 되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반드시 죄인으로 정죄가 되고 처형을 당하게 됨.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제사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영생을 선물하신다는 것임.

5)    넷째,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그러한 대속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임. 성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또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임. 그러므로 성도의 거듭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것임. 성령님께서는 제멋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생에 따라서 성도들이 그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증거하고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것임. 그것이 성도들의 믿음생활이라고 하겠음.

(2)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며 어떻게 부활의 소망을 가지며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5:9-11)

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9-11);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음;

2)    첫째,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다음 세가지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임; ①예수님의 희생의 제사가 자신의 죄 사함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임. ②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임.  ③하나님을 대적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임.

3)    둘째,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자신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임;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임”. 성령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됨으로써 성도의 거듭난 삶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며”(5:11) 남은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임.

 

4.    아담의 DNA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사망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5:12)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모세오경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며(5:13-14) 사망을 이기자면 인류는 누구의 새로운 DNA를 받아야만 하는가?(5:15)

(1)  아담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인류의 본성에 저장이 되어 있는 아담의 DNA의 특징은 무엇인가?(3:1-19, 5:12)

1)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한 문장임;

2)    첫째,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임(5:12a).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의 유전자에 암세포가 발생했다는 것임. 아담이 지은 죄의 영향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임.

3)    둘째, 그 죄라고 하는 암세포는 육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생명까지 죽이는 무서운 것임. 따라서 사망이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것임(5:12b).

4)    셋째, 아담의 자손들에게는 그러한 DNA가 유전이 되고 있어(5:12c) 육신적인 삶을 탐닉하게 되면 그 향년이 120년으로 줄어들고 마는 것임(6:3).

5)    넷째, 그 밖에도 여호와께 죄를 범한 아담 부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창세기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며 그것 역시 그 후손들에게 유전이 되고 있다고 하겠음; ①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됨(3:8). ②타인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변명함(3:12-13). ③여자에게는 임신하는 고통과 출산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짐(3:16). ④남자에게는 평생 수고하여야 먹고 살게 되는 것임(3:17-18). ⑤향년을 맞이하면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임(3:19).

(2)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모세오경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5:13-14)

1)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5:13-14);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음;

2)    첫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 죄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것임(5:13).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어기는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임.

3)    둘째, 율법이 없어서 죄를 깨닫지 못한다고 하여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님. 왜냐하면, 모두가 아담의 후손들이므로 죄로 말미암아 유전자의 변형이 이루어졌으며 그 죄라고 하는 암세포 때문에 모든 인류가 사망에 이르고 있기 때문임(5:14a).

4)    셋째,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비극적인 현상이 발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른 아담이 와서 순종의 모범을 보인다고 하면 새로운 구원과 영생의 DNA가 인류에게 삽입이 될 수가 있는 것임(5:14b).

(3)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사망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하여 사망을 이기신 누구의 새로운 DNA를 받아야만 하는가?(5:15)

1)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5:15);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살펴볼 수가 있음;

2)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가 없게 된 이유는 아담의 DNA를 유전적으로 받고 있기 때문임(5:15a). 그렇다면 그 잘못된 유전자를 치유하는 방법은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것임(5:15b).

3)    둘째, 아담은 흙으로 만든 육신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 코에 들어가서 생령(生靈, living soul)으로 살아가는 존재임(2:7). 그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님의 능력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서 모태에서 태어난 경우임(1:34-35, 1: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고 내주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임(5:30, 8:29, 10:30).

4)    셋째,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류는 그 수가 너무나 많음. 그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실 수가 있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절실한 것임. 따라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시며 그 성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서 함께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아담의 DNA를 일일이 고치고 계시는 것임. 그것이 일종의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이라고 하겠음(5:15).

 

5.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줄 수가 있는가?(5:16-18)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5:19)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줄 수가 있는가?(5:16-18)

1)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6-18); 곰곰이 하나씩 뜯어 놓고서 생각을 해보면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아니한 문장임.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전제지식이 생략이 되어있기 때문임;

2)    첫째,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죄성이 육신에 스며들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고 그 잘못된 DNA가 후대로 유전이 되고 마는 것임.

3)    둘째, 그와 같은 죄성의 DNA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도려내거나 고칠 수가 없음.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요청이 되고 있음.

4)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성육신시키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DNA를 심어 주시는 것임.

5)    넷째, 하나님의 영적인 죄 사함과 칭의의 능력이 육신을 가진 인간을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여 보혜사로 내주 역사하시는 것임(14:16-20, 8:1-2).

6)    요컨대, 육신을 가진 인간의 잘못은 후대로 유전이 되는데 불과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한꺼번에 죄 사함과 칭의를 주며 보혜사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생의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임(5:16-18).

(2)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5:19)

1)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태초부터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는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DNA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DNA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고 있는 문장임. 그 두가지는 다음과 같이 다르다고 하겠음;

2)    첫째, 아담의 육신적인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불순종하는 DNA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말씀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임.

3)    둘째, 아담의 육신적인 후손들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조력자이거나 그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음. 따라서 그것은 인본주의이며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임. 비록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선전할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상문화에 불과한 것임.

4)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고 있음. 자신의 육신적인 탐욕과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생명살림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임(16:24).

5)    넷째,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음. 그것이 아담이 선을 보이고 있는 하나님 경외의 삶이며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신 하나님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인 것임.

 

6.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척하는 외식주의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고 한다면(5:20), 그러한 잘못을 벗어나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믿음생활의 모범을 보였으며 어떠한 은혜를 제자들에게 베풀고 계시는가?(5:21, 14:16-20, 24:49, 1:8)

(1)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척하는 외식주의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고 한다면(5:20), 그러한 잘못을 벗어나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믿음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계시는가?(21:34-38, 22:39-46)

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사도 바울의 언급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해주고 있는 것임;

2)    첫째, 율법의 역할이란 선민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육신의 정욕과 탐욕을 다스려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님.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이 율법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 그렇다면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이미 정의한 바와 같이, “그것은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으로 정직하게 나아와서 도움을 구하도록 하는 것임”(3:19-20 의역).

3)    둘째, 그에 따라 사람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의 죄에 대한 발견이 많아지는 만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게 될 것임(5:20). 그 모범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임; “습관을 따라 매일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해 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임”(22:39-46)

4)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게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빠져 있는 것임(18:11-12).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외식주의를 소위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멀리하라고 백성들에게 성전에서 힘주어 말씀하심(8:15, 21:34-38).

(2)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떠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가?(5:21, 14:16-20, 24:49, 1:8)

1)    이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 사도 바울이 인간의 하나님의 은혜를 대비하고 있음. 죄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생명으로 주어지고 있음. 그 은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게 하고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것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함;

2)    첫째, 죄를 청산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 마치 광야에서 모세의 놋뱀을 쳐다보듯이(21:8-9)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임(3:13-15). 예수님의 피 흘림의 제사가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희생임을 깨닫고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임.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임.

3)    둘째, 죄 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간주가 되었다고 하여 바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님. 그렇게 소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탐욕과 정욕의 이기적인 육신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임(7:21-24). 따라서 성도들이 자신의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또다른 보혜사께서 임재를 하심(14:16-17).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의 부탁으로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시는 성령님이심(24:49, 1:8).

4)    셋째, 성령님의 임재가 있다고 하여 완전한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 아직 두가지 점이 미흡한데 그것은 ①첫째, 주님의 교훈과 그 삶의 의미가 말씀 가운데 정확하게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임(8:1-2).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증거하여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선례와 모범이시기 때문임(14:26, 16:13-15). ②둘째, 예수님을 무덤에서 살리신 부활의 영이 성도 자신에게도 임재하여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자신도 정확하게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어야만 하는 것임(8:11). 그와 같은 확신이 있을 때에 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영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것임.

5)    참고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8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함께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음(8:9-16).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제14장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점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음;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