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2강(롬2:1-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1. 02:12

로마서 강의 골자 제2(2:1-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426()

 

1.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의로움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2:1-3)

(1)  판단하는 자와 판단을 받는 자가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떠한 자들이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1)    사도 바울의 인간론은 한 마디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이라는 것임(3:9-10).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인간론과 동일한 것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는 말은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창조주 하나님 뿐이시라는 의미임. 왜냐하면,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으며 오직 상대적인 선만을 행하고 있기 때문임.

2)    그렇다면, 절대적인 선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피조물을 꼭 같이 사랑하고 돌보며 그 생명을 전부 살릴 수 있는 창조주의 의지이며 능력인데 쉽게 말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정신인 것임. 그와 달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인 선은 다음 두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 ①하나는 이기적인 것임. 따라서 집단적으로 서로 옳다고 인정을 해주면서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정의’(正義, justice)를 내세우고 있음. 그리고 인간의 이기적인 정의를 마치 하나님의 공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음. ②또 하나는 비교론적인 것임. 따라서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함을 지적함으로써 그 반사적인 이익으로서 자신의 옳음과 완전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임.

3)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들의 비극은 죄인인 자신들이 서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완전함과 의로움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지를 못한다는 것임. 오히려 그와 똑같은 잘못을 본질적으로 당사자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자신이 비판하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음.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2:1-2).

4)    바울의 말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맥락인 것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1-5).

(2)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판단만이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역사 가운데 형식적인 이단논쟁만을 일삼은 자들은 누구인가?

1)    중세의 유럽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발달하여 대학을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학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음. 그 결과 형식적인 논리와 궤변이 성행하게 되었음.

2)    토론을 통하여 학문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서로 자신의 이론이 옳으며 더 낫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이 지나쳐서 나중에는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부치면서 자신들의 학파가 옳다는 점을 강조하는 풍조가 만연이 되고 말았음.

3)    그와 같은 잘못된 사례를 벌써 사도행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6:8-13). 

4)    토론과 논쟁에 그치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서 처형을 하고자 하는 행태를 보이고 만다는 것임. 그러한 사실을 주의하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경고가 다음과 같은 것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

 

2.    하나님의 역사심판이 매우 느리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2:4-5)

(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은 언제까지 계속이 되는가?(2:4)

1)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용납하심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그 전에 죄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 죄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좋은 사례가 민수기 제20장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음; “출애굽 제40년 정월에 모세와 아론은 새로운 세대로 구성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들어왔음. 이제 새로운 세대로 이스라엘 군대를 편성하고 지휘체계를 갖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벌할 준비를 갖추고자 하는 것임. 그런데 38년 만에 돌아온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그 옛날의 우물에서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아니하고 있음. 목이 마르게 된 백성들이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하고 있음.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 간구하여 그 처방을 얻어 내고 있음; 그곳에 있는 큰 반석에 모세와 아론이 조용하게 명령하여 샘물이 솟게 하여 백성들과 가축들에게 마시도록 하라는 것임.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대나 신세대나 변함이 없이 무려 40년간이나 여호와와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광경을 보고서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분노를 먼저 동족들에게 터뜨리고 있음. 그와 같이 미성숙하고 반역하기를 떡 먹듯이 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들은 더 이상 물을 만들어 제공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하면서 모세가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치고 있음. 그것은 다시는 번복하지 아니하는 자신들의 의사결정임을 백성들 앞에서 밝히고 있는 행위임. 바로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역설적으로 그 반석에서 엄청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여 모든 백성과 가축들을 살려 주시는 것임.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을 저버리고 백성들에게 역정을 내고 그들의 잘못을 비판한 모세와 아론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해에 광야에서 죽는 것으로 심판하시고 마는 것임”(20:2-13 요약).

3)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생활 40년을 지내면서도 여전히 구세대나 신세대나 별로 차이가 없이 물이 없으면 여호와와 최고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는 것을 보고서 모세와 아론이 분노하면서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있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긍휼하게 여기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여 살 길을 마련해주시는 것임.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베푸심은 모세와 아론의 경지를 훨씬 뛰어 넘고 있다고 하겠음.

4)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죄 사함과 살길 마련은 아닌 것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전부 계산하여 심판하고 처벌하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벌써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2:33-35). 한 마디로, 대속자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시고 보응할 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임.

(2)  여호와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날이 되면 무엇에 근거하여 판결이 이루어지는가?(2:5)

1)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 제 고집과 제 마음대로 인생을 살게 되면 그 내용이 일일이 기록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임.

2)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여호와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영생이냐 영벌이냐가 평생 동안 지은 그 죄를 가지고 결정이 되고 마는 것임.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벌써 말씀하시고 계심;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지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7-29).

3)    또 하나의 기준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면할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시인하고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 그러한 고백과 진심어린 회개가 있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임.

4)    그리고 거듭난 인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상급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임(22:28-30, 8:16-18).

 

3.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고 누구에게 진노하시며 분노하시는가?(2:6-8) 또한 그것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2:9-10)

(1)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고 누구에게 진노하시며 분노하시는가?(2:6-8)

1)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2:6-8);

2)    사도 바울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인생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음; ①첫째, 참고 선을 행하는 자임. 여기서의 선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으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한다는 것임. ②둘째, 썩어질 세상의 영광보다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임.

3)    반면에 여호와의 진노로 심판을 받게 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자임; ①첫째,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세력과 자신들의 교리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임. ②둘째,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아니하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자들임.

(2)  또한 그것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2:9-10)

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2:9-10);

2)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 세계선교여행을 하고 있음. 그가 지금까지 3차례의 선교여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한 대상자는  크게 보아 유대인 교포들과 헬라인들임. 구체적으로는, ①시리아의 안디옥교회의 유대인 성도들과 헬라인 성도들, ②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여러 도시의 유대인 교포들과 헬라인들, ③그리스반도와 마케도니아의 유대인 교포들과 헬라인들임.

3)    바울이 교포사회의 유대인들과 현지의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결과 한가지 깨닫고 있는 사실이 있음. 그것은 하나님말씀의 진리를 예수님처럼 실천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영적인 상태가 다르다는 것임.

4)    구체적으로 ①첫째,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생명살림의 천국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영적인 평강이 찾아온다는 것임. ②둘째, 그 반대로 생명살림의 복음을 거부하고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이익만을 극대화하고자 몸부림을 치게 되면 그 심령속에 영적인 불안과 죄의식만이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임.

 

4.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심(2:11, 삼상16:7).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과 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키는 율법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2:12-13)

(1)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靈的 基督論, spiritual Christology)의 핵심이 무엇인가?

1)    첫째, 랍비 사울이던 시절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사람의 음성으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4)고 하는 말씀을 들은 당사자임(9:3-9). 그는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히브리정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교훈 및 행적을 비교하면서 오래 묵상한 사람임(1:14-19).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음성으로 임재한 실체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재림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임. 그러므로 그는 생전의 예수님의 제자나 사도는 아니었지만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영이신 주님을 만나 그의 제자이며 사도가 된 자임(고전15:8). 따라서 그는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이방인들에게 자신처럼 그렇게 영적인 주님을 만나서 그 제자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고전11:1, 3:13-16). 그것이 그의 독특한 영적 기독론의 기본이라고 하겠음.

2)    둘째, 주님께서는 생전에 육신을 가지시고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셨지만 이제는 영적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임(14:1-3, 18-19). 그 일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영을 성도들에게 성령님으로 보내어 주신 것임(24:49, 14:16-17, 1:8, 2:1-4).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제는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내주 역사하시면서 성도들에게 영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임(2:1-47).

3)    셋째,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성전을 마련하고 계시기에 그곳에 성자(聖子, son of God)께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임재하실 수가 있는 것임(8:29, 14:20).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8장에서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음(8:1-39). 따라서 로마서 제8장이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의 결정판이 되고 있음.

4)    넷째,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에 동참한 바가 있는 의사 누가는 그가 적고 있는 사도행전 제16장에서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기고 있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투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6-7).

(2)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은 율법의 의와 어떻게 결부가 되는가(2:11-13)

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2:11-13);

2)    첫째,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은 그가 생전의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관계가 분명하게 영적인 관계라는 사실에 기초를 하고 있는 것임.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육체가 아니라 그 속사람 곧 영적인 상태와 마음의 중심을 먼저 보시고 영적으로 임재를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는 말씀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2:11)  말씀은 상통(相通, 서로 통함)하는 것임.

3)    둘째, 율법의 의()는 마음 속에서부터 그 율법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도 그 율법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임.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육신의 이기심과 현세적인 탐욕 때문에 율법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임.

4)    셋째, 그 대안으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잘 실천하는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음.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외식적(外飾的)인 율법생활에 불과한 것임. 그러한 외식적인 율법의 준행으로써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제23장에서 그토록 통렬하게 지적하신 것임.

5)    넷째, 사도 바울은 율법의 중요한 역할이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3:20).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만 하는 것임; “자신은 율법을 온전히 준행을 하려고 하지만 육신적인 탐욕 때문에 도저히 율법의 의를 이룰 수가 없으므로 대속자를 보내어 주시고 영적인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율법이 선민들에게 주고 있는 참으로 중요한 기능임.

 

5.    창조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특별계시와 자연계시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면 율법은 선민들에게 주어진 특별계시임.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2:14-15) 그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2:16)

(1)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2:14-15)

1)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4-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운영을 위한 법률인 율법으로 전해진 바가 없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일종의 특별계시인 율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을까요?

2)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아는 신앙생활이란 것이 율법을 가진 선민들보다 어렵다고 하겠음.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창조 당시에 인간의 심령속에 그리고 자연 속에 각각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주신 것임. 사도 바울은 자연계시인 그것을 인간의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다음 두가지로 보고 있음; ①하나는 자연의 흐름과 움직임 가운데 들어 있는 창조주의 솜씨를 깨닫는 인간의 지성적 이성적 능력이며 ②또 하나는 인간의 심령 속에 내재가 되어 있는 하나님을 알 만한 영적이고도 직관적인 장치들인 것임. 각각 나누어서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음;

3)    첫째, 피조물의 세계인 우주와 삼라만상의 자연적인 흐름과 그 움직임의 이치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임. 그 점은 이미 로마서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4)    둘째, 사람을 창조할 때에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창조주를 알 만한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였는데 그것이 창세기 제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한 것임(1:26-27). 그 선험적(先驗的, pre-monial)인 능력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양심에 담겨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임(2:14-15). 그것은 로마서 제1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 것임;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 자신의 본성과 양심을 거슬러 살고자 하면 훗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자신의 본성과 양심이 일종의 고발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그것은 마치 선민들의 율법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보고 있는 것임. 그러한 견해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는 신중하게 본문에서 괄호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음(2:14-15).  

(2)  그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2:16)

1)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2:16); 자연계시 가운데서 창조주를 발견하는 인간의 능력과 자신의 심령 속에 담기어 있는 본성과 양심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영적인 존재임. 하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삶을 탐닉하고 있는 육신적인 욕구 때문에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가지를 아니하고 있는 존재임.

2)    구체적으로, 사람들은 자연계시를 무시하고 있음. 더구나 자신의 본성과 양심마저 외면하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임.

3)    그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의 법정에 있어서 인간들의 모든 변명과 핑계를 원천봉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가지 장치를 마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설명하고 있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심판의 기준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임. 인간과 똑 같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같은 환경 가운데 성장한 나사렛 예수가 살아간 그 과정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임.

4)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옹호할 수 있는 하나의 논리적인 주장이 남아 있음; “그것은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영적인 삶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일반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특혜가 없지 아니했느냐?는 것임”. 그와 같은 차이를 메꾸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강림이며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음. 그러므로 그때부터는 그러한 핑계와 변명이 전혀 통하지를 아니하게 된다고 하겠음.

 

6.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이며(2:17-20) 율법을 가진 것 만을 자랑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떠한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법 위에 있다고 하는 생각) 사상에 빠지고 어떠한 법비’(法匪, 법을 악용하는 비적을 말함)가 되고 마는가?(2:21-24)

(1)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인가?(2:17-20)

1)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든 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17-20). 율법을 가진 선민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사도 바울의 문장임.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음;

2)   첫째, 율법 속에 담기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것을 율법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자랑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는 것임.

3)   둘째, 율법을 공부하고 그 뜻을 알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백성들이 진실로 무엇을 실천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임. 따라서 율법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면 선민들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사랑하여 살리라는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임.

4)   셋째, 선민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구원을 얻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가르쳐주어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참된 율법선생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다는 것임.

5)   참고로,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설명은 모세의 기록과 통하고 있는 것임. 모세는 그의 기록인 출애굽기 제19장에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시는 역할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책무를 말하고 있음(19:4-6).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의 일원이 되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거룩한 중보기도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임(18:23-32). 또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이방인을 구원하는 선민의 역할론은 예수님께서 선민들에게 재삼 주지시키고 있는 요나의 기적과 같은 것임(12:39-42).

(2)  율법을 가진 것 만을 자랑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떠한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법 위에 있다고 하는 생각) 사상에 빠지고 어떠한 법비’(法匪, 법을 악용하는 비적을 말함)가 되고 마는가?(2:21-24)

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2:21-24); 한 마디로 선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철저하게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임. 그 점을 사도 바울은 십계명과 이사야의 예언에 비추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임;

2)    첫째,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임(2:22b). 하나님의 것인 신전의 물건을 사유화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임(2:22c).

3)    둘째,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지 그것을 모범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실천하고 있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임(2:21a). 따라서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간음죄와 절도죄를 은밀하게 행하고 있는 것임(2:21b-22a).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범행은 결국 백성들에게도 만연이 되고 마는 것임.

4)    셋째, 이방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확하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눈 여겨 보고 있음.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실족하고 있다는 것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거룩하게 율법을 지키는 척 하지만 내적으로는 은밀하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율법대로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그와 같은 이중적이면서 가식적인 신앙생활이 이방인들에게도 포착이 되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우습게 여기며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게 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임(2:23).

5)    넷째, 사도 바울은 이사야 제5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언을 인용하고 있음(52:5).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이 모든 선민사회에 유포가 되고 만연이 된 결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이상 선민의 사회를 보호하실 실익(實益)이 사라지고 마는 것임. 그 결과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그 백성들이 이방의 제국에 잡혀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되는 역사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임(2:24). 그와 같은 말씀은 뒤집어서 풀이를 하게 되면, 성도들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직하게 지키고 실천하게 되면 결코 성도의 사회는 망하지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모독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임.

 

7.    율법을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과 그 속뜻을 살펴서 진심으로 행하는 것과의 차이는 할례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있는가?(2:25-29)

(1)  선민들이 이방인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주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1)    ①첫째가 율법이고 ②둘째가 할례임. ③셋째가 성전이고 ④넷째가 제례의식임. ⑤다섯째가 안식일 규례이며 ⑥여섯째가 희년(禧年, 50년 마다 종을 해방시키고 기업을 되찾게 하는 것임) 제도임. 그 가운데 역사속으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이 희년 제도임. 그 다음이 선민들의 국가의 멸망과 더불어 찾아온 성전과 제례의식의 실종임.

2)    주후 930년경 이스라엘 제국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2년에 둘로 쪼개어져 북쪽에는 이스라엘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시작하게 됨(왕상12:12-20). 남쪽에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계속됨. 그러자 여로보암1세는 백성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성전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둘 만들어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남쪽 국경도시인 벧엘과 북쪽 국경도시인 단에 세우고 우상숭배를 시작함(왕상12:27-33). 그 우상을 철폐하지 아니하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계속 사용되다가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들을 주전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망하게 하신 것임(왕하17:6, 22-23).

3)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은 유일한 선민의 나라의 정통성을 가지고서 대내외적으로 위의 6가지를 자랑하고 있었음. 하지만 주전 680년경 므낫세 왕이 우상을 심하게 섬기고 백성들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자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역시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말았음(왕하21:11-13, 25:1-7). 그러므로 주전 530년대에 페르시아 제국의 호의로 일부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제2성전을 주전 516년에 재건할 때까지 실제로 성전문화와 제례의식은 사라지고 만 것임.

4)    2성전시대가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진입으로 끝나게 되자 선민 유대인들은 중동과 지중해에 흩어져버리고 그들의 성전문화와 제례의식 역시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임. 유대인들의 회당(會堂, synagogue)이 오늘날 성전을 대신하고 있다고 하겠음. 그에 따라 오늘날까지 선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은 세가지임; ①첫째가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임. ②둘째가 매우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시행하고 있는 할례인데 그것은 태어난 지 8일만에 사내아기에게 행하는 포경수술임(17:9-12). ③셋째가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 규례임(16:28-30).

(2)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꼭 집어서 선민의 신앙상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와 내용은 어떠한가?(2:25-29)

1)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5-29); 사도 바울의 문장의 표현력과 설명의 논리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글임. 그의 논리의 전개과정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풀이를 간략하게 해보고자 함;

2)    첫째,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4:16)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다음과 같은 믿음생활의 비결이 바울의 글을 해석하는데 근간이 되고 있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그러므로 육신에 행하고 있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정직하게 준행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임. 그에 따라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2:25)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임.

3)    둘째,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라고 선민들이 무시를 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의 제자답게 진실되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실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결과는 외식을 행하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선민들보다 훨씬 나은 믿음생활이라는 것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음;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26-27).

4)    셋째,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용어를 구사하고 있음.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을 표면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심령 곧 마음과 영을 이면적인 것을 정의하고서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임;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2:28-29a). 참고로, 마음에 행하는 할례육신의 할례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벌써 모세에 의하여 지적이 되고 있는 것임(10:16).

끝으로, 사도 바울이 온전한 신앙생활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한번 더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음;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9b).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들의 믿음 생활이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주님처럼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임. 결론적으로, 그것이 일찍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과 동일한 것임(창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