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1강(롬1:1-3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0. 03:57

로마서 강의 골자 제1(1:1-3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419()

 

1.    유대교의 랍비였던 사울이 회심을 하고서 기독교인이 되어 그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가 로마의 교인들에게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1:1-2, 5-6, 9:1-22)

(1)  유대교의 율법선생인 랍비 시절 사울이 믿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6:8-15, 8:1-5, 9:1-2, 22:3-5, 3:5-6);

1)    길리기아 다소 성 출신인 랍비 사울은 일찍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바리새인의 큰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히브리의 경전 및 전승 그리고 주석 등을 배워서 나이 30(4:3, 3:23) 랍비가 된 인물임(22:3). 그는 선민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현세적으로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을 실현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임(3:5). 더구나 랍비 사울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유대교리의 파수를 위하여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처형하여야 한다고 하는 소위 과격한 샴마이 학파의 추종자로 보이는 것임(3:6, 8:1-3, 9:1-2).  

2)    집사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하여 생각을 해보면, 랍비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감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대교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헬라파 기독교인인 집사 스테반과 대 논쟁을 벌인 것으로 보임(6:9, 22:3). 집사 스데반이 율법을 거스르고 있으며 성전을 헐고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하였기에 랍비 사울은 그를 산헤드린 대공회에 고발하고(6:11-14) 율법에 따라 기드론 골짜기로 끌고가서 돌로 쳐죽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임(8:1, 22:20). 그러한 기록을 참조하면, 랍비 사울은 소위, ①율법 지상주의, ②예루살렘성전 지상주의, ③예수의 부활 불가능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인물임. 분설(分說, 나누어서 설명함)을 해보면 다음과 같음;

3)    첫째, 바리새인이며 유대교의 랍비인 사울은 율법 지상주의에 푹 빠져 있음;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서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는 율법선생임(10:3, 5). 따라서 랍비 사울은 바리새인과 유대교인들이 보기에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규례를 철저하게 지키고(7:8-9) 십일조 생활과 금식기도에 모범이 되고 있는 인물인 것임(18:11-12).  

4)    둘째,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며 그곳에서만 여호와께서 임재를 하신다고 랍비 사울이 굳게 믿고 있음; 그 옛날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면서 지성소 언약궤와 그 뚜껑인 속죄소에 임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25:20-2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항상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에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임(왕상8:1-11, 9:3-9).  솔로몬 성전이 불탄 다음에는 다시 건축이 된 제2성전에 임재하여 계신다고 선민 유대인들이 믿고 있음(6:15-18, 4:20). 그러므로 유대교의 선생인 사울도 앞장을 서서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권위가 여호와께서 유일하게 임재하여 계시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임.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의 권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라도 이단이라고 하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26:61-62, 6:14).

5)    셋째, 선지자인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랍비 사울이 믿고 있음; 그 옛날 큰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린 경우가 각각 있음(왕상17:9, 17-24,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과부의 아들을 살림, 왕하4:8, 20-22, 32-37,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이래로 죽은 선지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난 경우는 전혀 없는 것임.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했다고 전하고 있는 그 제자들의 주장을 랍비 사울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음. 그것은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므로 탄압하고 근절을 시키는 것이 옳다고 랍비 사울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임(8:1-3, 9:1-2, 22:3-5, 19-20).

6)    참고로, 율법선생인 랍비들은 바리새인들이므로 당연히 부활사상을 지니고 있으며(23:8) 그것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음. 그 핵심내용을 베다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음; “세상의 종말이 있게 되면 모두가 부활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임(11:24). 그러므로 그것은 종말론적인 부활사상에 불과한 것임”. 마르다는 살아 생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대속의 주요 생명의 구원주로 믿게 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얻게 된다고 하는 예수님의 부활사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님(11:25-26).

(2)  다메섹 도상의 영적 체험이 사울에게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9:3-22, 22:6-21);

1)    첫째, 대낮의 태양빛보다 더 강한 빛이 갑자기 나타나 다메섹 도상에서 랍비 사울을 비추고 있는 것임(9:3). 그 강한 빛에 노출이 된 사울의 눈은 그 자리에서 당장 멀어져 버린 것임(9:8). 눈은 멀어졌지만 히브리정경에 밝은 랍비 사울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음; “그것은 피조물인 태양의 빛보다 더 강렬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자신에게 임재했다는 것임(21:23-27, 22:4-5). 그러므로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면 자신은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임(6:1-9)”.

2)    둘째, 그 강한 빛 가운데 사람의 음성이 들리고 있음(9:4). 그러므로 랍비 사울은 그 사람의 음성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있음(19:19). 이제 자신이 말라기 선지자의 뒤를 잇는 귀중한 선지자가 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 그런데 사람의 음성으로 여호와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심(9:4).  너무나 의외의 말씀에 사울이 크게 당황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고 있음; “주여 누구시니이까?”(9:5a). 그 대답의 음성이 사울을 거듭 놀라게 하고 있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b).

3)    셋째,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을 태양 빛보다 강한 빛으로 직면한 사울은 여호와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이 세상에 나사렛 예수로 오신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임.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각성은 오로지 랍비 사울에게만 한정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임. 그러므로 그 사실을 사울이 당시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사울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 강력한 영적인 빛을 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임(9:7). 당연히 그들의 눈은 멀쩡한 것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한 사울의 눈만 사흘동안 멀어 있는 것임(9:8-9).

4)    넷째, 랍비 사울은 자신이 체험한 영적인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두차례나 간증하고 있지만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백성들이 별로 없음(9:3-22, 22:6-23). 그러나 사울은 그 놀라운 영적인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유대교적인 신념체계가 한순간에 전부 무너져버린 것임. 왜냐하면, 그가 박해하고 있던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분신이었다는 사실이 여호와의 영광과 음성으로 증거가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신론의 재정립이 필요해진 것임. 그것은 산술적인 유대교의 유일신론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신비로운 삼위일체 하나님 이론으로 그의 신론이 옮겨가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임.

5)    또 하나 지적을 해야만 하는 것은 그의 구원론의 변화와 이방인 사도로서의 사명의 부여인 것임; 자신은 백성들 앞에서 모범적인 율법생활을 한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의인이며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울의 생각이 깨어져버린 것임. 그 결과 자신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지도자들처럼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말았으니 그 죄가 너무나 큰 것임. 그러므로 그의 고백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율법생활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원론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죄인들이 그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임. 따라서 자신과 같이 회개한 성도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임.  

(3)  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가 되어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3:3-16);

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0-16);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복음전파의 공생애를 살아감으로써 그 고난의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곧 부활을 얻고자 한다는 것임.

3)    둘째,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복음전파에 전력질주를 하고 있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시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임. 그렇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그 영생의 부활을 얻기까지 이방인 사도로 끝까지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4)    셋째, 사도 바울은 자신만이 이방인 사도이며 복음의 전파자라고 결코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음.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복음사역을 계승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도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임. 그것이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부활을 자신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된다고 하는 것임.

(4)  로마의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의 정체성(1:1-2, 5-6);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1-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5-6); 정체성은 신분과 사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음;

2)    첫째, 바울은 자신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임(1:1a);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여 지금은 성령님과 함께 영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임재하여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는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임(16:6-7). 그러므로 바울에게 물으면 그의 멘토는 예수님이심. 그리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의 종인 바울의 사명인 것임. 

3)    둘째, 바울은 예수님의 종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임(1:1b-2); ①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와 목적이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음(1:2).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짐을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것임(53, 1: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인 것임(1:1b-2).

4)    ②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온세상에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의 사명인 것임. 그것은 그 옛날 하나님의 복음을 예언으로 전했던 선지자들의 뒤를 잇고 있는 것임. 그러나 큰 차이는 사도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온세상에 전한다고 하는 것임.

5)    셋째, 그러한 신분과 사명은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임(1:5-6);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도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온세상에 전하는 사도적인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임.

 

2.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 의미가 무엇인가?(1:3-6, 16:25)

(1)  구세주를 보내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1:1-3);

1)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1:1-3);

2)    첫째, 하나님의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신 것임.

3)    둘째,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성취인 것임.

(2)  하나님의 복음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1:4-6);

1)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4-6);

2)    첫째,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복음의 성취인 것임. 이제부터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임.

3)    둘째,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으로 무덤에서 살려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인이 되시며 세상의 권세를 능력으로 장악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28:18-20).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임.

4)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가 얻은 그것을 자신들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음;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16:25-26).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정이 된 자신의 삶이 바로 사도 바울에게는 나의 복음이라는 것임.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도 나의 복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기를 그가 원하고 있는 것임.  

 

3.    사도 바울은 로마시에 있는 초대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으며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7-13, 15:22-24, 19:21)

(1)  사도 바울이 자생적인 로마교회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1:7-9, 18:1-4)

1)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않고 너희를 말하며”(1:7-9);

2)    첫째, 로마시에는 사도들이 아직 복음전파를 하지 아니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서신으로 문안을 한다는 것임(1:7).

3)    둘째, 로마시를 방문한 적이 없는 사도 바울이 로마시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생활에 대하여 전해 듣고 있는데(1:8) 그 이유는 그가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기 때문임(18:1-2a). 그때가 주후 50년대초인데 그들 부부는 로마시에 있는 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주후 40년대 후반에 발생한 로마시에서의 유대인 축출조치에 따라 그리스 고린도로 건너와서 천막제조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임(18:2b-4).

4)    셋째, 자생적인 로마시의 초대교회는 본래 유대인교포들과 로마시민들이 함께 세운 개척 교회로서 그 믿음이 뜨거운 교회였음. 그렇지만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축출령에 따라 로마인들만이 남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어려움을 겪고 있음. 그 점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임(1:9).

(2)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10-13, 15:22-24, 19:21)

1)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0-13);

2)    첫째, 사도 바울은 로마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전해주기를 원하고 있음.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면 서유럽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모교회의 역할을 능히 수행할 수가 있기 때문임(1:10-12).

3)    참고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에 두루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임. 그동안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에 이르기까지 대도시 중심으로 거의 복음을 전파하였으므로 이제는 이태리의 로마시와 그 이서지역에 대하여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기를 원하고 있음(19:21, 15:22-24).

4)    둘째, 특히 로마시는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제국의 권력과 부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곳의 교회는 그 영향력이 큰 것임.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곳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스페인의 다시스에 이르는 서유럽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임. 그러나 그 길이 아직 열리지를 아니하고 있음(19:21, 15:25-28). 따라서 그는 그 일을 위하여 미리 로마교회에 복음을 적은 이 서신서를 뵈뵈 편으로 보내고 있는 것임(1:10-13, 16:1-2) .

 

4.    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구원의 진리라고 굳게 믿고서 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1:14-17)

(1)  주님께 빚진 것을 이방인에게 갚기 위한 것임(1:14-15);

1)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4-15);

2)    첫째,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던 자신과 같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이방인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평생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사랑과 구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음(22:19-21).

3)    둘째, 그 받은 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방법이 남은 인생을 다 바쳐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복음에 대하여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임(1:14). 

4)    셋째, 그 일을 더욱 힘차게 하기 위해서는 로마제국의 수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성도들을 복음으로 견고하게 하여 서유럽에 대한 선교의 기지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임(1:15).

(2)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기 때문임(1:16-17);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2)    첫째,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온세상에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임.

3)    조금 더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사도 바울은 그 옛날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유대교리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줄 알고 있었음. 그러나 다메섹 도상의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이제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있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셨기에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임.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구현이 되고 있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일한 구원의 진리라고 전파하고 있는 것임”.

4)    둘째, 선민 이스라엘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성막과 성전 그리고 속죄의 제사에 관한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율법에 따라 선민들처럼 속죄의 제사를 번제단에서 드리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죄 사함과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임.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온전한 속죄의 제물로 스스로 희생하였기에 그 사실을 믿고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음.

5)    그러므로 이제는 성전제사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임. 따라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고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임.

 

5.    하나님께서 인생과 자연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1:18-20)

(1)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이 무엇인가?(1:18-19)

1)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2)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역사적으로 심판을 하셨는데 그 근거의 하나는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본능적으로 이미 심어 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임(1:18-19a). 여기서 사람들에게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은 세가지임; ①첫째가 양심이고, ②둘째가 직관이며, ③셋째가 영적인 존재와의 교제의 능력인 것임. 

3)    둘째,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또는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셨는데 그 기록물이 히브리정경이며 또한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한 전승들인 것임(1:19b). 그 가운데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관심은 어떻게 심판 가운데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임. 그 관심에 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명인 것임.

(2)  자연에 계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1:20)

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2)    첫째,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계기는 자신들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인 것임(1:20a). 부모가 자식들에게 그리고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완전한 인생과 무한한 생명력을 주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음.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임. 따라서 창세기 제4장 말미에 기록이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mortal body’라는 의미를 가지는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부디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하였다는 것임(4:26).

3)    둘째, 유한한 인간이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신과 같은 무한한 장수를 누리고 영원한 영광을 과시하고자 하고 있음.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허망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생을 구가하는 신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임(1:20b).

 

6.    여호와 신앙을 버린 자와 무신론자들의 공통적인 타락상이 무엇이라고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가?(1:21-25)

(1)  여호와 신앙을 버린 자의 비극은 무엇인가?(1:21-23, 20:1-6, 32:1-10)

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2)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고 있지만 여호와신앙을 떠나고 있다는 것임(1:21).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임. 그것보다는 제멋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세상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나은 인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임.

3)    둘째로, 그렇게 여호와신앙을 버리게 되면 다음과 같은 비극을 경험하게 됨; ①첫째,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추구한 결과가 허망하게 됨. ②둘째, 세상적인 지혜를 추구한 결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영적인 안목과 분별력이 사라지고 마는 것임. ③셋째, 만만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소원성취와 성공을 구복신앙으로 빌고 있는 것임.

4)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리고(20:1-6)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축제를 벌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잘못 섬긴 우상문화의 비극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것임(32:1-10).

(2)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무신론자들의 비극은 어떠한가?(1:24-25)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24-25); 무신론자들의 특징과 그들이 직면하는 비극이 다음과 같음;

2)    첫째, 무신론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고 사람의 진리로 대체를 하고 있는 것임. 이 세상과 자연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로 섭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사람들의 지혜로 경영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인 것임.

3)    둘째, 하나님이 주신 영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한 결과 사람의 가치를 물질적인 측면에서 계량하고 마는 것임. 따라서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육체적인 향락을 추구하고 비윤리적인 성행위가 만연하고 마는 것임.

4)    셋째, 물질적인 세상과 육신적인 세상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서 세상적인 성공에 도취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므로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무신론자들의 죄를 만물의 주인이시며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서하지 아니하시는 것임.

 

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고 계시는가?(1:26-28)

(1)  진리를 버린 그들을 비진리대로 살아가도록 내어버려 두심(1:26-27);

1)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1:26-27);

2)    첫째, 어떤 남녀관계와 부부생활이 정상적이며 하나님의 진리인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알기 쉽게 창세기 제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과 가정제도로 설명하심(2:20-25).

3)    둘째, 그런데 여호와신앙을 버린 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자를 모두 아내로 취하게 되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일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제도가 깨어져 버린 것임(6:2-5). 그 결과 비극적인 홍수심판이 도래한 것임(6:7).

4)    셋째, 오늘날 성적인 타락과 가정의 파괴는 그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님. 더욱 악하게 되어 육체적인 부끄러운 욕심이 남녀구분과 정상적인 성생활을 완전히 파괴하고 만 것임. 비진리가 진리를 구축하듯이 비정상적인 남녀관계가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모두 뛰어넘고 말았으니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너무나 비극적인 퇴폐사회의 모습인 것임(1:26-27).

(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는 무신론자들이 당하고 있는 개인적인 비극과(1:28) 사회적인 비극은 무엇인가?(1:29-32)

1)    첫째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임. 그렇게 그 마음속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상실하고서 제마음대로 자신의 탐욕과 정욕대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 자로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임.

2)    둘째로, 무신론자들이 만든 사회의 비극적인 모습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열거를 하고 있음;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9-32). 나름대로 분류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3)    ①첫째,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 다음과 같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등임”(1:29a). ②둘째, 사회적으로 표출이 되고 있는 그들의 악행이 다음과 같음;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1:29b-30a).

4)    ③셋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1:30b). ④넷째,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버젓이 다음과 같은 악행을 일삼고 있음;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31).

5)    ⑤끝으로,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여 서로를 칭찬하며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고 있음.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지 아니하며 집단적인 이익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설혹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임(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