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3강(롬3:1-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1. 16:23

로마서 강의 골자 제3(3:1-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53()

 

1.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결정하신 여호와는 어떠한 분이신가?(3:1-4)

(1)  유대인이 생각하고 있는 선민사상과 할례의 유익에 대하여(3:1-2);

1)    이방인 사도로 일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 출신이 선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정경을 가르치는 랍비 사울이었음.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에 대해서는 엄청 할 말이 많은 인물임.

2)    당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비해서 유대인은 훌륭한 구석이 많이 있으며 할례도 그 유용성이 범사에 많다고 주장하고 있음.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단 한가지만 우선적으로 설명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3:1-2).

3)    사도 바울이 여기서 생략하고 있는 설명을 로마서의 다른 대목에서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음; 첫째,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엄청 많다는 것임. 이방인들이 얻지를 못하고 있는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 안식일과 예배, 믿음의 조상들, 그리스도의 유대 땅에서의 출생 등이 그러한 것임;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영광언약들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약속들이 있고, (여호와를 섬긴 믿음의)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4-5).

4)    둘째,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심이 대단하다는 것임. 그러나 그 열심이 지나쳐서 그들의 인간적인 행위가 구원을 이룬다고 하는 자랑거리가 되고 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구원에서 멀어지는 문제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또한 지적하고 있음;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1-3).

5)    셋째, 구원이란 자기의 의로움을 크게 주장하거나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인간의 의나 정의개념에서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설명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남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1-13).

6)    넷째, 위와 같이 오로지 구원과 공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고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발견임. 그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지적과 동일한 것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남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1-13),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5:31-32),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5:34).

(2)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3:1-4)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51:4),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1-4).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선민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 이치는 하나라는 것임.

3)    둘째, 그 이치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임.  ,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믿고 맡기신 것이라는 설명임.

4)    셋째, 그러므로 선민들이 자랑할 수 있는 자신들의 유용성이란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임.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믿고서 맡겨 주셨다는 사실임.

5)    넷째, 따라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이란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과 신뢰 그리고 그 선택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는 것임.

6)    다섯째, 영생의 구원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도 참된 증거자는 하나님 뿐이심.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말씀을 맡기시고 말씀의 종으로 살아가게 하신 그것이 의로움과 구원과 영생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것임.   

(3)  사도 바울의 사상을 원용하여 자신의 교회론을 세우고 있는 신학자가 누구인가?(3:4)

1)    주후 5세기 튀니지 작은 도시 히포의 주교였던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그러함. 그는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구별이 되며 거룩함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성도들의 의로움이나 거룩하게 보이는 그들의 행위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

2)    성도들의 믿음이 미성숙하고 죄인의 모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고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며 성도들이 그 안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임.

3)    그러므로 이미 성도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된 줄 알고서 다른 성도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닮고자 하는 제자도에서 멀다는 것임. 그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용납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도와 주어야만 한다는 것임.

4)    보충설명을 하자면 성령님께서 그 일을 증거하고 도움을 주고자 진리로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것임. 사도행전에서 그러한 성령님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글이나 성 어거스틴의 주장이나 모두 이해가 가능할 것임.  

 

2.    선민 유대인의 불의로 말미암아 도리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있는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3:5-8)

(1)  선민 유대인의 불의로 말미암아 도리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에 대하여(3:5-8);

1)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5-8); 선민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믿고서 말씀을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선민 유대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항변이 가능하다는 사도 바울의 지적임. 그러한 바울의 자문(自問)에 대한 자신의 자답(自答)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2)    첫째, 일방적으로 신뢰를 하고서 말씀을 맡겨 놓으시고 이제 와서 선민 유대인들이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를 아니한다고 하여 여호와께서 진노를 하신다면 그것은 부당하지 않느냐?는 것임. 그러한 항변은 심판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3:6의역)라고 하는 비판과 같다는 것임. 그 항변이 성립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불의하신 창조주가 아니시기 때문임.  

3)    둘째,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여 불의한 종이 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이 감히 실천할 수도 없는 거룩한 것임이 증명이 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결과인가?라는 것임. 그렇다고 하면 불의한 종이라고 하여 진노를 하시는 하나님께서 위선자가 되시는 것임. 절대선을 행하시는 유일한 존재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위선자이며 불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과 심판 그리고 영생이라고 하는 모든 절차와 과정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임. 그러므로 그러한 발상은 그 자체가 사탄적인 것이라고 하겠음.

4)    셋째,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3:7-8a)는 반론이 있을 수가 있다는 사도 바울의 지적임. 그러나 그러한 항변은 성립이 되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가 거짓말과 악행을 자행하는 사탄과 악한 영들이 여호와에 의하여 정죄가 되고 마침내 영벌에 처해지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임(3:8b, 8:44, 1:5-6).

(2)  그러한 역설적인 인간의 역사의 반전에 대하여;

1)    첫째, 외경인 유다의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절차를 선물하기 위하여 가룟 유다가 스스로 배신자가 되고 내부고발자가 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함. 그것이 이른바 구원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유다의 불의한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하는 궤변임. 그것은 복음서에서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임(22:3, 13:27).

2)    둘째,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상이 유대교리에 반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행동이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사형집행권을 억지로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음(11:47-53, 18:31-32).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이 되셨으며 제3일에 그 공로를 부활하신 것임.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긴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인에 대해서는 주후 70년에 로마의 정예병에 의하여 그 성전이 불타고 고향에서 내쫓기게 되는 비참한 역사적인 심판이 하나님에 의하여 도래하고 마는 것임.

3)    셋째,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극도로 과학을 발전시켜 오늘날 과학지상주의가 만연하고 최첨단의 21세기 물질문명시대를 구축하고 인류가 지구촌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기상이변과 공해, 핵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세계적인 기아문제와 새로운 질병의 발생이 기승을 부리고 있음. 따라서 인류가 자신들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스스로 죄와 사망 그리고 역사의 종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역사가 진행할 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있는 것임.

 

3.    선민 유대인의 죄를 비판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잘못은 무엇이며 성도들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3:9-18)

(1)  선민 유대인의 죄를 비판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잘못은 무엇인가?(3:2-4)

1)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3:2-4);

2)    이방인들이 선민 유대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지 아니하였다고 비판하고 있음. 그것은 이방인들의 선민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임.

3)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방인들의 비판이 성립이 될 수가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동시에 말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여호와의 선택과 결정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있는 창조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참되시고 옳은 판단과 결정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깨달아야만 한다”(3:2-4 의역).

(2)  이방인들은 과연 선민 유대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으며 세상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3:9-18)

1)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4: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5:9),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10:7),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 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59:7-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6:1) 함과 같으니라”(3:9-18); 한 마디로,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음.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는 것임;

2)    첫째, 선민이나 이방인 교회 안의 성도이거나 바깥의 불신자들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이라는 것임(3:9).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다윗의 노래에 따르더라도, 인간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의인이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임(14:1-3).

3)    둘째, 그와 같이 죄인이 죄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에 불과한 것임.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는 어리석은 행동임. 이방인들이 선민들을 비판하는 것, 나아가서 불신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비판하는 것도 전부 그러한 것임.

4)    셋째,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정통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의 시편말씀과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죄인인 인간들의 행태를 열거하고 있음; ①그 혀로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그 입으로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여 남을 해치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3:13-14, 5:9, 10:7, 140:3). ②무죄한 자를 살해하는데 서슴지 아니하고 있으니 카인처럼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자신의 파멸과 고생을 초래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영적인 평강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임(3:15-17, 59:7-8). ③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무신론자와 같다는 것임(3:18, 36:1).

 

4.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자들에게는 이제 어떠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가?(3:19-24)

(1)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3:19-20)

1)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 문장임;

2)    첫째,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3:19a)라는 말은 그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험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셨다는 것임. 그러므로 율법은 인류의 대표로 선택이 된 선민 유대인들에게 먼저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임.

3)    둘째, 만약 인류의 대표인 이스라엘 족속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잘 지킬 수가 있으면 그것은 모든 인류가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는 예표가 되는 것임. 반대로 선민들이 율법을 자력으로 잘 지킬 수가 없으면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율법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b)라고 하겠음.

4)    셋째,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여 시내 산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백성으로 삼고 그 나라의 운영이 여호와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모세를 통하여 신정국가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지키는 법률체계로서 율법을 주신 것임(19:4-8). 그것은 행위적인 규범이기 이전에 내적인 규범임. ,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듯이(15:6, 17:1) 그렇게 십계명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율법의 뜻을 실천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임.

5)    넷째, 그렇게 율법을 준행하는 신정국가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경영하도록 한 결과 실패로 나타나고 있음;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3:20a).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모세는 한 마디로 답하고 있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b).

(2)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자들에게는 이제 어떠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가?(3:21-24)

1)    이제는 율법 외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1-24); 한 마디로, 이제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제사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임. 구체적으로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어 영생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임. 분설(分說, 나누어서 설명함)을 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여호와 앞에서 율법을 지킬 수가 있는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시험을 해본 결과 실패로 나타났다는 것임(3:23). 따라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제사의 효력을 의지하여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믿음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임(3:21, 24).

3)    둘째,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제사를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이 누구에게나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임(3:22).

4)    셋째,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이 히브리정경에 이미 예언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임(3:21).

 

5.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2:34)고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대속의 은혜로 보응이 되고 있는가?(3:25-26)

(1)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2:34)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1)    시내 산에 올라가서 모세가 40일 동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최고지도자의 장기간 부재로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여호와 신상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고 앞길을 인도 받자고 종용했음(32:1). 그 결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로 섬기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음(32:2-6).

2)    그 광경을 시내 산에서 내려다 보신 여호와께서는 모세 앞에서 대노하심(32:79).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이스라엘 자손들을 전멸시키고 오로지 모세의 자손만으로 새로운 선민을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심(32:10). 그에 따라 모세가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하여 일단 여호와의 진노를 거두게 하고 있음(32:11-14).

3)    그러나 완전한 용서를 받지를 못한 모세는 하산하여 백성들에게 분노하면서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림(32:19).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수어 그 가루를 시내물에 타서 온 백성들에게 먹이고 있음(32:20). 끝으로, 레위인으로 하여금 타지파의 백성들을 치라고 명령하여 동족상잔(同族相殘, 같은 민족이 서로 잔혹하게 싸우는 것)의 결과 3천명이 살해를 당하는 비극이 연출이 됨(32:26-28).

4)    그러한 긴급처방을 한 다음에 모세가 시내 산에 다시 올라가서 여호와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구할 때에(32:31-32)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다음과 같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섬겼음이더라”(32:33-35).

(2)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대속의 은혜로 보응이 되고 있는가?(3:25-26)

1)    출애굽기 제32장 말미의 내용 그대로 여호와께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그 후부터 여호와께 범죄한 그들의 죄를 일일이 기억하셨다가 훗날 보응할 날에 대속자를 통하여 한꺼번에 처벌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것임(32:33-35).

2)    그 말씀과 관련이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3장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5-26).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3)    첫째,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십계명을 위반한 모든 죄를 기억하셨다가 하나님께서는 보응하는 날에 한꺼번에 처리를 하시는데(32:34) 그 보응의 날이 바로 온전한 화목제물로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 보혈을 흘리시는 날인 것임(3:25).

4)    둘째,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믿고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를 이제 화목제물인 예수님께 보응하시고 그 죄를 간과하시는 것임(3:25). 그것이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은혜임(1:29). 그렇게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의 제물인 예수님께 죽음으로 전가하고 이제는 그 죄의 결과인 사망을 건너뛰시는 것임(12:12-14). 그것이 여기서 죄를 간과하신다는 말의 의미임.

5)    셋째,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의의 정신에 따라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모든 죄를 대속자 예수님께 전가하여 보응하셨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임(3:26).  

 

6.    율법의 의를 스스로 이루지 못한 죄인들이 대속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다고 한다면 남은 인생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그 믿음에서 실족하지 아니하게 되는가?(3:27-28, 17:4-10)

(1)  율법의 의를 스스로 이루지 못한 죄인들이 대속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주장과 어떻게 다른가?

1)    유대교의 율법선생인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음. 그런데 과거 랍비였던 사도 바울의 지적에 따르게 되면 그들의 노력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코드에 맞지가 않는 것임;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1-4).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보고자 함;

2)    첫째,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엄청 열심히 십 수년간 배움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 십대인 바리새인 소년들이 유명한 랍비의 문하에 들어가서 사숙을 하면서 히브리정경, 히브리전승, 랍비들의 주석 등을 공부하여 30세에 그 가운데 소수가 합격하여 율법선생인 랍비가 되고 있음.

3)    둘째, 그런데 랍비들이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잘못 시키고 또한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모범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외식적(外飾的, 바깥만 그럴 듯하게 꾸밈)인 신앙생활임.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전심전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이웃의 눈만 의식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척 시늉을 하고 있다는 것임. 그것이 외식이며 가증스러운 가식적인 신앙생활인 것임.

4)    셋째, 하나님 앞에서 율법생활을 제대로 하지 아니하게 되면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됨. 그 결과는 외식적인 율법의 준수에 불과하므로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결국 구원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임. 율법선생이 그러하므로 그들로부터 배운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생활도 마찬가지임. 

5)    넷째,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 앞에 솔직하고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인간의 결단과 노력으로써는 율법을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자복하라는 것임.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임.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고 사도 바울이 주장을 하고 있음.

(2)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다고 한다면 남은 인생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그 믿음에서 실족하지 아니하게 되는가?(3:27-28, 17:4-10)

1)    첫째로,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성도들은 먼저 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임. 만약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사람들 앞에서 눈속임 용으로 율법생활을 한 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의로우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변하게 되면 그것은 유대교인들의 생각과 같은 것임. 그와 같은 선민구원사상은 예수님의 지적에 따르게 되면, 종의 자세를 저버린 무익한 종의 주장에 불과한 것임(17:4-10).

2)    둘째로, 사도 바울이 적고 있는 본문이 다음과 같음;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7-28). 조금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음;

3)    첫째,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그 의로움을 인정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모두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서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님. 왜냐하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구원은 애초부터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임.

4)    둘째, 그러한 기본을 모르고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잘 지킨 그것으로 자신들이 의로우며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무효라고 하겠음. 그러한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헛되며 그러한 잘못된 모범을 쫓아가고 있는 백성들도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질책하신 것임(23).

5)    셋째, 선민들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자면 여호와께서 보내신 대속자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서 자신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서 청산을 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영생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유일한 길인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고 말하고 있는 것임.

 

7.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복음을 전파하며 예배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그 믿음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계시는가?(3:29-31, 14:16-20, 1:8)

(1)  성도들이 자력으로는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복음을 전파하며 예배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자력으로는 복음사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실토하고 있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조금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성도라고 하더라도 육신을 가지고 복음사역을 하고 있으므로 육신의 요구에 져서 영적인 예배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임.

3)    둘째,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는 영적인 능력이 죄의 법을 쫓고 있는 육신의 욕구를 능히 다스릴 수가 없으므로 결국은 죄와 사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현주소를 사도 바울이 확인하고 있다는 것임.

4)    셋째, 사도 바울은 육신의 탐심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영적인 힘을 공급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임.

(2)  모든 성도들에게 그 믿음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계시는가?(3:29-31, 14:16-20, 1:8)

1)    첫째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부활의 영이 임하여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무덤 속에서 부활하심(24:1-12, 8:11).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과 함께 40일간 사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다시 교육을 시키시고(1:3) 마지막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복음사역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심(24:44-49).

2)    둘째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와 성도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말씀하심. 그 말씀 그대로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성령님으로 내주하여 역사하심(2:1-13). 그에 따라 전도폭발이 일어나고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것임(2:14-47).

3)    셋째로, 그런데 성령님만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님. 성도의 속사람 속에 성령님께서 성전을 마련하시면(고전6:19-20) 그 속에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적으로 임재를 하시는 것임. 그 약속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6-20).

4)    넷째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가 성도들에게 이루어짐으로써  율법을 강조하는 선민사상이 어떻게 변화가 되는지를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29-31).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5)    첫째, 모든 피조물을 동일하게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구원한다는 것은 집단이기주의를 정의라고 부르짖고 있는 인간들이 좁은 생각과 부족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임. 오로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써만 그와 같은 공의의 실천이 가능한 것임.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임.

6)    둘째,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하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성령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임(8:11, 2:32). 그러한 사실을 진리로서 믿고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자들이 성도들임(1:8, 16:6-7).

7)    셋째, 그러한 믿음으로 복음사역을 하고 예배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선민 이방인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외식적인 모습으로 율법의 의를 이룬다고 하는 가식적인 주장은 사라지고 마는 것임.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율법을 지키는 성도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고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