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 짙은 안개(손진길 소설)

농무, 짙은 안개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8. 10. 10:25

농무, 짙은 안개2(손진길 소설)

 

조우제가 고개를 들고서 장경옥에게 대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아득한 과거의 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흐릿하고도 아득한 눈으로 조우제가 허공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돈을 벌어야만 합니다. 그것도 많이 벌어야 합니다. 적어도 저의 형보다는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미래를 앗아가 버린 그에게 복수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

그것이 무슨 말인가?’, 장경옥은 조우제의 말을 똑똑히 들으려고 집중하다가 일순간 그의 눈을 쳐다보고서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 만다. 그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무슨 피맺힌 한이 있는지 혼자 넋두리삼아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짧은 말에서 한가지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 한가지가 장경옥의 입장에서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녀가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갑자기 일가친척 한사람도 없는 호주로 온 이유와 그날 우연히 듣게 된 조우제의 말의 의미가 서로 맞닿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조우제의 말로는 그의 복수의 대상이 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경옥의 입장에서는 형이 아니다. 그녀의 오빠들이다. 그녀가 차지해야 하는 정당한 몫을 전부 앗아가 버린 몰염치한 인간들이 바로 그녀의 오빠들인 것이다.

사람은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을 때에 연민과 동정심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우연히 조우제로부터 마음속의 신음소리를 듣게 된 장경옥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일까? 그날 노스 쇼어 모스만과 맨리의 부자동네에서 5군데 집청소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차안에서 장경옥이 제안을 한다; “조형, 오늘은 모처럼 제가 저녁식사를 살게요. 차를 이스트우드(Eastwood) 주차장에 세우고 중국식당에 들러 저녁식사를 함께해요…”;

그 말을 듣자 조우제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그날은 고속도로를 타지 아니하고 국도를 타고서 레인코브를 지나 한참을 달려서 이스트우드로 들어선다.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이스트우드에는 한식당과 중국식당이 성업 중이다. 그 가운데 장경옥이 조우제를 안내하고 있는 곳은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저렴한 중국식당이다;

그 식당에는 조우제가 벌써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티를 일체 내지 아니하고 장경옥이 안내하는 대로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녀가 메뉴판을 보면서 조우제에게 말한다; “저녁시간이므로 따뜻한 핫팟(hot pot) 요리가 좋을 것 같아요. 메뉴판을 보시고 결정을 하세요… “.

조우제는 메뉴판을 힐끗 본 다음에 순순히 말한다; “장상이 좋은 대로 주문하세요. 저는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어요. 따뜻한 국물과 밥만 있으면 됩니다”. 그의 말을 듣자 장경옥이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순간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일본사람인가? 장상이 무어야. 이름을 부르기가 미안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구만… “.

장경옥이 가지와 두부가 많이 들어가는 핫팟 요리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서 조우제가 속으로 생각한다; “장상은 허례허식이 없구나. 실속파이구나. 그런데 내가 그녀를 장상이라고 부른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

사실이 그러하다. 비록 서로 이름을 알고 같이 파트너가 되어 집청소를 하기로 했지만 아직 한달이 되어도 서로가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지 모르고 있다. 호칭을 생략하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말을 하면서 그저 묵묵히 함께 청소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녀를 태우고 나오는 길에 그만 캘리빌 동네에 엄청난 안개가 끼어서 그 놈의 농무 때문에 서로가 말문이 터지고 만 것이다. 조우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캘리빌(Kellyville) 바로 북쪽에 있는 교외지역 라우스힐(Rouse Hill)이다;

오늘 아침에 라우스힐에서 출발하여 장경옥이 살고 있는 캘리빌 마을에 들렀다가 그만 갑작스런 농무 때문에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그 고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장경옥이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32살의 젊은 청년 조우제29살의 처녀 장경옥이 그러한 제안을 하는 것이므로 마다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떠버리가 아닌 그는 그저 조용히 장경옥이 안내하는 대로 따르고 있다. 그가 경상도 사람이므로 더욱 말수가 적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말문이 열리자 장경옥은 그것이 아니다. 그녀는 서울사람이다. 그러므로 경우를 따지고 신세를 진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갚고자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 조우제에게 생고생을 시킨 것이 미안해서 저녁식사를 산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방 땅 호주 시드니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고 하는 것이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러한 처지이므로 좋은 요리를 살 수는 없다. 기껏해야 저렴한 중국식당에서 핫팟 요리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 조우제가 전혀 말이 없다. 그저 순순히 그녀가 주문하고 식사를 권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울 처녀 장경옥이 조우제에게 말한다; “조형은 고향이 어디에요? 말투와 억양으로 보아서는 경상도 사람 같은데요… “. 조우제가 먹는 것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대답한다; “저는 고향이 경남 마산입니다. 바닷가이지요. 대대로 경남에서 살아온 함안 조씨입니다. 그런데 장상은 어디에요?... “;

이왕 자신의 고향을 말했으니 장경옥의 고향을 묻는 것이 실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조우제가 용기를 내어 질문하고 있다. 그 말에 장경옥이 제법 상세하게 대답하고 있다; “저는 순전히 서울 토박이예요. 공부를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지요. 그런데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져서 간호학원을 다니고 간호보조원 생활을 오래했어요… “.

그 말을 듣자 조우제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젊은 나이에 모진 고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단신으로 호주에 와서 집청소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곳 호주는 아직 기회의 땅입니다. 그러니 참고서 인내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있을 거예요. 전통적인 보수사회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이민 국가이지요. 실용주의 계약 사회이니까요…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이 약간 고개를 갸웃한다. 조우제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말이 나름대로 정제가 되어 있는 느낌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금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장경옥이 대뜸 묻고 있다; “조형은 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잘 했는가 봅니다. 사용하는 용어가 꼭 선생님 같으시군요… “.

그 말에 조우제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여기는 이민 사회입니다. 한국에서 공부 잘 한 것이 별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사회이지요. 이 나라 사람들이 이민 온 한국사람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직종에서 어느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에는 호주사람들이 청소 잘하는 능력을 저에게 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허허허… “.

자조적인 웃음기를 보이면서 조우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장경옥은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럴 것이다. 호주사람들이 간호보조원인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병원에서 궂은 일을 담당하는 그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장경옥은 그 정도에 만족할 수가 없다. 자신은 반드시 공부를 더하여 정식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 일단 알엔’(RN)이 되기만 하면 호주에서는 나름대로 대우가 좋다;

 그 일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적어도 2년 이상 마음 놓고 공부를 하자면 5만불이 있어야 한다. 그 돈을 이곳 시드니에서 벌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차제에 장경옥이 조우제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5만불을 여기 시드니에서 모으자면 얼마나 청소일을 하면 될까요?... “. 조우제가 잠시 생각을 한 다음에 정직하게 대답한다; “2년 정도 일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유학비자를 유지해야 하므로 거기에 돈이 들어가겠군요… “.

그 말을 듣자 장경옥이 고개를 끄떡인다. 자신이 지금 영어학원에 돈을 내고서 유학비자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년간 열심히 청소를 하여 아껴 쓰고서 착실하게 돈을 모은 다음 다시 시드니 북쪽에 있는 뉴카슬로 가서 간호대학에 등록해야 한다;

따라서 식사를 끝내고 캘리빌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장경옥이 결심한다; ‘나는 반드시 정식간호사 자격을 따고 말 것이다. 그래야 영주권도 얻고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다!... ‘.

과연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녀의 오른쪽 옆자리 운전석에서 조우제가 운전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이 이루지면 좋겠구만젊은 날의 짙은 안개가 여기 호주에서 활짝 걷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