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38강(눅24:1-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년 4월 5일(목)
1. 금요일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오후 3시경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셨다고 하면 채 40시간도 경과하지 아니한 시점인데 그렇게 일찍 부활하셔야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24:1, 23:44-46, 22:53, 요14:18-20)
(1) 예수님께서 음부에 머무신 시간의 의미(눅24:1, 23:44-46, 22:53, 막15:35, 요14:18-20);
1) 안식일 전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막15:25) 6시간 후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신 것임(막15:34-37, 눅23:44-46).
2) 유대교지도자들은 무교절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이므로 그 복되고 거룩한 날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 형을 잠시 멈추어 달라고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있음(요19:31). 다만 십자가에서 내려온 죄수가 도망을 칠 우려가 있으므로 그 다리를 분지르고 있는 것임(요19:32).
3) 예수님의 경우에는 십자가에서 그 육신을 내려서 점검해보니 벌써 운명을 하셨기에 로마병정이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러서 확인사살을 하고 있음(요19:33-34). 그 장면에 대한 요한복음의 설명이 정확하면서도 확실한 이유는 그가 당시 그 십자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음(요19:25-27).
4)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처형을 받도록 만든 죄 많은 유대인들의 왕이며(요19:11, 19-22) 피조세계를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속죄양이 되고 계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 36). 그러므로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인 아론 및 모든 백성들의 죄짐을 안수로 받은 ‘아사셀 양’이 광야에 버려져서 죽음을 맞이하듯이(레16:10)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죄짐을 모두 지고서 음부의 세계에 들어 가셔야만 하시는 것임.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대제사장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임(레16:17-34).
5)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만민의 죄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마치 아론처럼 하나님의 전까지 출입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있음(벧전2:9).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들을 사용하여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임(마28:18-20). 그렇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는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생명이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일시적인 단절을 의미하고 있음. 그러한 맥락에서 자신을 떠나가시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예수님의 외마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하겠음.
(2) 그렇게 일찍 부활하셔야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24:1, 23:44-46, 22:53, 요14:18-20)
1)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음부의 세계에 보내시는 것은 창세기 제3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마귀와 악한 영들이 현세에서 행사하고 있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롬8:2) 깨어버리기 위해서는 완전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음부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의 머리 권세를 깨어버리셔야만 하는 것임. 그렇게 사탄과 마귀의 권세를 초전박살하시고 급히 무덤에서 부활하셔야만 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음;
2) 첫째, 흩어진 사도와 제자들을 다시 모으시고 재 훈련시켜서 세상 끝까지 복음전파의 일꾼으로 내보내시는 일이 급하셨기 때문임(눅24:44-48).
3) 둘째, 빨리 제자들을 재교육하시고 승천을 하셔야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하나님의 영을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내주시킬 수가 있기 때문임(눅14:49, 행1:8).
4) 셋째,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하나님의 전을 건설하게 되면 주님께서 영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그 전에 임재하실 수가 있는 것임(요14:16-20). 그렇게 되어야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모든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삶을 인도하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임(행16:6-7).
5) 넷째, 죄와 죽음이라고 하는 어둠과 절망의 세력이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오래 지배하는 것을(눅22:53, 23:44-46)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원하지 아니하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40시간도 채 못되어(안식인 전날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을 하심, 눅24:1) 속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14:18-19).
2.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어떤 여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가?(눅24:1, 10, 23:54-56, 요19:25)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어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가?
1)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눅24:10);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눅8:3)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의사 누가는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임.
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28:1); 사도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것으로 적고 있음.
3)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16:1-2);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외에 사도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적고 있음. 참고로 살로메에 대해서는 마가가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다시 적고 있으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모라고 기술하고 있음;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막15:40-41),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4)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20: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적고 있는 것임. 이상 복음서의 저자에 따라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의 수가 1-3명이라고 달리 적고 있지만 그 공통점은 막달라 마리아가 꼭 들어가 있다는 것임.
5) 그러므로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그 부활의 증거를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겠음(눅24:1-10, 요20:1-10). 남자인 사도들이 아니고 여제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게 된 것이 은혜라고 하겠음(요20:11-18).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서 복음으로 전파하고 있는 성도들의 수에 있어서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다고 하겠음. 그러한 측면에서 역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인 셈임(창3:15).
(2)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목적이 무엇인가?
1)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눅23:54-24:3);
2)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로마총독에게 용감하게 요청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임(눅23:50-53). 그는 친구인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향품 처리하여 부자의 빈 무덤에 장례를 치러준 것임(요19:38-42).
3) 예수님의 어머니나 이모 및 숙모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등은 산헤드린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향품 처리하고 장례를 치루고 있는 과정에 참여하지를 못한 것임. 따라서 그날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그것을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주고자 무덤을 찾아간 것임.
4) 그들은 예수님께서 3번이나 자신의 부활사건을 예언하였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그 예언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임(막8:31, 9:31, 10:33-34, 눅18:34, 24:11).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죽은 선지자가 다시 부활한 사례가 없기 때문임. 그러므로 빈 무덤을 보고서 그토록 놀란 것임(눅24:1-2).
3.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들여다 보고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눅24:2-5)
(1)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옮겨져 있음(눅24: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눅24:1-2). 그 의미가 다음과 같음;
2)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시신을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굴 속에 안치하고 있음. 따라서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반드시 굴 입구를 큰 바위로(막16:4) 막아 두고 있음;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3) 둘째, 예수님의 시신인 경우에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생각에 따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 가서 숨긴 다음에 생전의 예언 그대로 부활하신 것이라고 혹세무민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임(마27:62-64). 그러므로 로마총독의 허락을 얻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그 무덤 입구를 큰 바위로 굳게 막고 밤새도록 철저하게 경비를 부탁한 것임(마27:65-66).
4) 셋째, 이상과 같은 상황을 정리해보면 인위적으로 그 바위를 일부러 옮긴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조치하신 신위적인 역사인 것임(눅24:2, 4-5, 마28:2).
(2)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보임(눅24:3-5);
1)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3-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임;
2) 첫째, 의사 누가가 이 구절에서 심히 독특한 표현을 한번 사용하고 있음; “주 예수(the Lord Jesus)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눅24:3); 여기서 ‘주’(主, Lord)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임; ①하나는 주인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을 부르는 호칭임(요20:15). ②또 하나는 여호와나 천사와 같은 우월한 영적인 존재를 부르는 호칭임(창18:3, 19:2). 의사 누가는 지금까지 ‘주 예수’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아니했음. 그런데 무덤 속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처음으로 묘사하면서 그 표현을 단 일회 사용하고 있는 것임(눅24:3). 그로 미루어 보아 의사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간 예수라는 측면과 영적인 주인이라고 하는 두가지 요소를 이때부터 확실하게 가지게 되셨다는 사실을 특기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그냥 나사렛 예수님으로서 사도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는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이시기에 그 사역의 현장에 묶인 바가 있음. 그러나 이제 인간의 육신을 벗고 영생의 몸을 입으시고 계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도와 제자들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실 수가 있게 되신 것임(요14:18-20, 20:19).
4) 셋째, 사도 마태는 천사가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바위를 옮겨 놓고 그 위에 앉아 있다고 적고 있는데(마28:2) 마가는 무덤에 들어가서 여인들이 그 천사를 보았다고 적고 있음(막16:4-5). 그에 비해서 의사 누가는 무덤 속에 들어간 여자들이 그 속에서 두 천사를 보았다고 적고 있는 것임(눅24:3-4). 묘사와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여인이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천사를 만났다고 하는 사실인 것임.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첫번째 증거인 것임.
5) 넷째,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두 천사를 여인들이 두려워하고 있음. 그러한 영적인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는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천사로부터 듣게 된 것임;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
4. 두 천사의 말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언을 생각해보라는 것인데 그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취가 되고 있는가?(눅24:6-8, 18:31-34)
(1) 두 천사가 전하고 있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눅24:6-7)
1)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24:6-7);
2) 첫째, 무덤 속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3일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임(눅24:6). 그것이 부활의 새 소식임.
3)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미 3차례나 생전에 예언하신 것인데 그것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임(눅24:7).
4) 셋째,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의 상식과 능력 밖의 일이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임. 그러나 생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성취가 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때에 그것은 가능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임(사48:6-7).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예언의 말씀이 오로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실현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고 하겠음(히11:1-2).
(2) 예수님의 생전의 예언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되자 여인들이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눅24:8)
1)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눅24:8); 생전에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예수님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언을 여인들이 기억해내게 되자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화된 것을 깨닫게 됨. 따라서 그냥 그 무덤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오게 됨.
2) 첫째,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부활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여인들은 그 기쁜 부활의 소식을 사도와 제자들에게 먼저 전하게 됨(눅24:9).
3) 둘째, 민박집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여제자들에게도 그 부활의 소식을 전한 것임(눅24:10).
4) 셋째,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생전의 예언의 말씀과 더불어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질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에 따라 새로운 창조를 하시고 계신다고 하는 정확한 믿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임.
5. 빈 무덤을 확인하고 천사의 말을 전해 들은 여인들이 숙소로 돌아가서 다른 여인들과 11사도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자 11사도들의 반응과 행동은 어떠하며 그것은 그 옛날 무엇을 닮아 있는가?(눅24:9-12, 민13:30-14:10)
(1) 여인들의 말을 전해 들은 11사도들의 반응(눅24:9-12, 막16:10-11);
1)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11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눅24:9),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 가니라”(눅24:11-12); 의사 누가는 11사도 가운데 10명이 믿지를 못하고 있으며 다만 사도 베드로만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현장확인을 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임.
2) 마가복음에서는 아예 마리아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으나 그들은 처음에 아무도 믿지를 아니했다고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이 되고 있음;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10-11).
3) 예수님께서 생전에 3번이나 예언으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3일만의 무덤 속 부활을 사도들에게 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일이 발생하자 어째서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굳게 확신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4) 그 이유는 두가지라고 하겠음; ①첫째, 역사적으로 선례가 전혀 없는 완전히 생소한 일이기 때문임. ②둘째,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속하는 새로운 창조에 관한 것이기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아니하기 때문임.
(2) 11사도 가운데 한두 명이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닮아 있는가?(눅24:12, 요20:2-10, 민13:30-14:10)
1) 의사 누가는 11사도 가운데 사도 베드로만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현장확인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음(눅24:1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사도에 대한 기록이 없음.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저자인 사도 요한 자신과 사도 베드로 등 2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빈 무덤임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임(요20:2-10).
2) 그러므로 11사도 가운데 9명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믿지 아니하였으며 2사도만이 무덤을 찾아가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임. 그와 같은 사실은 민수기 제13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12정탐꾼의 이야기와 비슷함. 똑같이 40일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탐지하였는데 10정탐꾼은 그 땅을 악평하고 있으며 거인족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음(민13:31-33). 그 반면에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등 2정탐꾼이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이므로 여호와의 약속과 능력을 믿고서 북진하여 그 땅을 얻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임(민13:30, 14:6-9).
3) 그 말을 들은 24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10정탐꾼의 악평을 선호하는 한편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민13:30-14:2).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불신임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온 길을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임(민14:1-10).
4) 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약속과 능력을 불신하고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불신임하고 제멋대로 지도자를 뽑아서 남하를 하고자 하였기에(민14:1-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성세대가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다가 죽고 마는 처벌을 내리신 것임(민14:29-35).
5) 그와 같은 불이익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성도들은 예수님의 예언과 그 부활의 소식을 믿고서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그 부활과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기회를 얻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한마디로, 성도들의 믿음생활인 것임.
6. 안식 후 첫날에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떠나고 있는 두 사람은 누구이며 부활하신 에수님께서 그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24:13-18, 2:43-45, 요19:25, 행15:13-14)
(1) 안식 후 첫날에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떠나고 있는 두 사람은 누구인가?(눅24:13-18, 막16:12-13)
1)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24:13-14),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24:18);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전후하여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그후의 소식을 듣고 있었던 남자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이제는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 것임.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하는 것임.
2) 같은 이야기가 마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이 되고 있음; “그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16:12-13).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24:13-18, 2:43-45, 요19:25, 행15:13-14)
1) 사도 요한은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이모, 막달라 마리아 등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까지 와서 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2) 사도 요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예수님의 이모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면,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숙모일 가능성이 농후함. 그렇다면, 글로바는 예수님의 삼촌이며 그의 집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0km에 있는 엠마오인 것임. 목수 요셉은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동생인 글로바의 집이 있는 엠마오를 들렀던 것으로 보임(눅2:44-45).
3) 특히 예수님의 사촌동생으로 알려지고 있는 장로 시므온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제3대 총회장을 역임하게 됨(행15:14). 그는 사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친동생인 장로 야고보의 뒤를 이어서 예루살렘교회와 총회를 맡고 있는 것임.
4) 그렇다면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는 원로인 글로바와 그의 아들인 시므온이라고 하겠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가운데 원로이며 집안의 어른인 숙부 글로바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부활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임(눅24:15-31).
7. 최근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글로바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눅24:19-24)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글로바 부자에게(눅24:15-1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눅24:25-27)
(1) 글로바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눅24:19-24);
1)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눅24:19-24); 글로바의 진술은 다음과 같이 예루살렘의 최신 뉴스를 요령 있게 정리를 하고 있는 것임;
2) 첫째,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두루 뛰어난 선지자 예수님을 유대교지도자들이 시기하고 배척하여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였다는 것임(눅24:19-20). 하나님의 큰 선지자를 제멋대로 처형하고 있으니 산헤드린 대공회도 문제가 많다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대목임.
3) 둘째, 자신과 제자들은 선지자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속국백성으로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줄 것으로 기대를 하였다고 하는 것임(눅24:21a). 그러나 그렇게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던 그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임. 따라서 그들은 슬픈 빛을 띠면서 걷고 있는 것임(눅24:17).
4) 셋째, 십자가에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조심스럽게 들려오고 있다는 것임(눅24:21b-24). 처음에는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는 두어 명의 사도들이 확인을 하였으나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라는 것임.
(2) 글로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24:15-17)
1)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5-17);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주로 세상 경험이 많은 글로바가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을 이야기하고 그의 아들인 젊은이 시므온이 아버지에게 모르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임.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동행을 하시는 것임.
2) 글로바가 예수님의 숙부라고 한다면 장조카인 예수를 금방 알아보는 것이 정상임. 그런데 전혀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음;
3) 첫째, 죽은 선지자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부활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선지자 나사렛 예수도 십자가 처형이 됨으로써 그 일대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임. 그러므로 죽은 예수가 살아날 수가 없으므로 자신들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은 인물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임.
4)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생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무덤 속 부활의 예언을 3차례나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혀 믿지를 아니하고 있음. 그것이 바로 믿음과 영적인 눈이 소경이라는 것임(눅24:16, 사6:9-10).
(3) 글로바 부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눅14:25-27);
1)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조금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얄팍한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임. 영적이며 창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선지자들이 예언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것을 미련하게 피조물의 식견으로 그것도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를 하고자 하고 있으니 참으로 깨달음도 믿음도 별로라고 하는 것임.
3) 둘째, 나사렛 예수가 진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그리스도라고 하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하는 제물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임(뉵24:26). 그와 같은 속죄의 방법론이 모세오경과(레16:8-10민18:1-2) 선지서에(사53:3-12) 수록이 되어 있음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글로바 부자에게 설명하시는 것임(눅24:27).
4) 셋째, 그와 같은 사실을 믿지를 못하고 단지 선민사상에 젖어서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선민들을 잘 살게 해줄 것이라고만 믿고 있으니 참으로 미련한 백성들이라는 것임(눅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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