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75강(렘13: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8월 4일(토)
어떤 포도주에 취하게 되면 선민들이 서로 다투다가 멸망을 자초하고 마는가?(렘13:12-14)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취하여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술에 취하듯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가죽부대에는 포도주가 가득 차 있는데 선민 유대인들이 피차 자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의견대립과 내분을 겪고 있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렘12:12-14).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가죽부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포도주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포도주는 세상적인 가치와 방법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선민 유대인들이 잔뜩 마시고 취하게 되면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첫째로,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취하여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든지 아니면 세상적인 가치와 방법론을 선택하여 이방인처럼 살아가든지 그 선택은 선민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신30:19-20).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이 너나없이 이방인들이 선호하는 세상적인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 그것에 취하여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것을 그냥 내어버려 두고 지켜 보십니다(렘13:13).
(2) 둘째로, 그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 취하게 되면 세상적으로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옳다고 하는 자랑과 교만이 일종의 과시욕으로 넘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세상의 술에 취한 선민 유대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노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비난하고 싸우게 됩니다(렘13:14a).
(3) 셋째로, 선민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들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게 되면 먼저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선민들이 더욱 이방인들의 포도주에 취하게 되면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왕하21:16).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심판하신 그 잣대를 가지고 선민들을 동일하게 심판하게 되십니다(렘13:14b, 왕하21:11-14).
사실 포도주에 취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에 취하여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엡5:18). 그런데 그 중추신경을 세상의 독주와 포도주를 잔뜩 마셔서 마비를 시켜버리게 되면 그때에는 그 옛날의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영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모든 능력이 사라져버립니다(창9:20-22). 따라서 마치 짐승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이방인들의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을 선민사회에서 보게 되니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시며 나아가서 그러한 행태를 계속하여 보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렘13:14).
한 마디로, 이방인들과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세상적인 잣대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이기적인 주장만 하고 있으니 그들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여기고 계속 보호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처럼 되어 버린 선민 유대인들을 여호와께서는 버려 버리고 다른 이방인의 나라처럼 강대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자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포도주는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를 담고 있는 가죽부대는 이방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것에 취하여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민 유대인들이 똑 같은 포도주를 자신들의 가죽부대에 담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본문에서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선민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포도주에 취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여 여호와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해법에 대하여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2:22).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렘13: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렘13:12a);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렘13:12ab)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십니다(렘13:12aa).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언뜻 듣기에는 그것은 창조주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젖과 꿀이 흐르는 그들의 땅 가나안에 금년에도 토지의 소출이 풍성하고 생활의 여유와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포도주 생산도 넉넉하게 될 것이라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은 선민 유대인들이 선뜻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죽부대’는 ‘술고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풍년이 찾아오고 있으니 선민들이 세상의 풍요에 젖어서 그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잘나서 좋은 땅에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신8:12-14, 17-20).
3)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 선민들이 풍요가운데 세상적인 교만과 자랑에 빠져서 우상을 섬기며 육신적인 쾌락과 욕심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도주에 취하여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마치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내용은 세상의 포도주에 취한 술고래들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혹평인 것입니다.
(2)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렘13:12b);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은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그 ‘포도주와 가죽부대의 비유’의 말씀을 선민 유대인들이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 생각에 그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그 내용이 바로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렘13:12b)라는 반응입니다.
2) 작년에도 자신들이 열심히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풍년을 누렸으니 금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면 똑같은 풍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농사의 신이며 풍요의 신인 바알 신에게 매년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고 있으니 그 땅에 대를 이어서 풍년이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입니다.
3) 과연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업의 신 바알을 자신들의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계속 풍년을 구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는 영적인 타락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여호와의 역사심판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렘13:13-14).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서 저주 가운데 계속 살아가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결코 원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4) 그와 같은 사실은 창세기 제3장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둘째로,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렘13:13);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렘13:13a);
1) 이방인의 신상과 우상을 도입하여 여호와를 대신하여 섬기고 있는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과연 누구 누구일까요? 사람을 만드시고 지금도 그 마음 중심을 정확하게 감찰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삼상16:7)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렘13:13a)들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 선지자 예레미야 당시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계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①첫째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정치적 지도자들로서 다윗왕조의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인 부자들입니다. ②둘째가 유다 왕국의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입니다. ③셋째가 유다 왕국의 모든 주민인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 마음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며 육신적인 삶에 푹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세상 포도주에 잔뜩 취해 있는 추한 선민 유대인들의 자화상이라고 하겠습니다.
(2) “잔뜩 취하게 하고”(렘13:13b);
1) 창세기 제1장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만드시고 제일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남녀로 만드십니다(창1:26-27). 그에 따라 사람들은 다른 생명체가 지니고 있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땅에서 만물을 선하게 관리하게 되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전개가 됩니다(창1:31).
2) 만약 그 반대로, 사람들이 여호와와의 영적인 교제를 끊어버리고 세상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신상과 우상을 섬기며 약한 자를 착취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짐승과 같은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선택사항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신명기 제30장에서 동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내(여호와)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9-20).
3) 그와 같이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문제는 자신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져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잔뜩 취하게 하고”(렘13:13b)라는 특이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 말의 뜻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선민들을 그렇게 잘못 선택하여 살아가도록 만든 그 책임의 일단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다고 하는 뉘앙스를 가지는 ‘사역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께서는 선민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적인 심판을 시행하시지만 훗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잘못을 하나님의 아들이 담당하게 하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시대를 열어 주십니다. 그러한 복음적인 의미가 벌써 본문 가운데 시사가 되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13:1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렘13:14a);
1)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 곧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인생 가운데 어떠한 잘못을 범하게 될까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선과 의의 기준이 되십니다(롬10:2-3).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고 말씀하십니다.
2) 그런데 여호와신앙을 떠나버린 인간들은 이제 상대적인 자신의 의로움과 선만을 내세우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상대방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더 낫다고 하는 자랑과 교만입니다. 따라서 피차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우기면서 상대방을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가족사이에서도 그리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를 않습니다(렘13:14a). 결국은 자신들이 옳다고 정의를 내세우면서 전쟁까지 불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렘13:14b);
1) 여호와의 창조주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또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곧 법이며 정의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과 전쟁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를 하는 자가 곧 정의라고 하는 생각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복을 주는 신이 바로 자신의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러한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우상 섬김이 사람들의 정신을 취하게 만들고 있는 포도주입니다.
2) 그러한 이방인들의 포도주를 선민 유대인들이 받아 마시고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선민의 모습이 사라지고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린 선민의 나라와 사회를 떠나 버리십니다. 그리고 선민의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렘13:14b). 그것은 그 옛날 노아 시대에 육신이 된 사람들을 여호와께서 떠나 버리시고 그 땅에 홍수심판이 임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창6:3).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13:14c); 노아의 시대 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만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심판이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13:14c)고 하는 구절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피조세계를 지배하는 영원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이방인의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 술고래와 같이 취해서 마치 짐승처럼 단순한 가죽부대와 같이 행동을 하고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시고, 사랑하지도 아니하시고, 또한 아끼지도 아니하시고 멸하신다는 것입니다(렘13:14b).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13:14c)가 의미하고 있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포도주에 잔뜩 취하여 그저 움직이는 탐욕스러운 가죽부대로 한평생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을 모시고 여호와의 말씀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것인지 누구나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대속의 제물로 오시기 이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속죄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은혜가 아직 임하지 아니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시대를 얼마나 앙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3).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그 심령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엄청난 은혜를 신앙생활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방인의 풍습인 신상과 우상을 섬기며 육체적인 축제를 벌이고 살아갈 일이 아닙니다. 포도주에 취하지 말고 성령님에 취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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