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68강(렘11:18-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 00:15

예레미야 강해 제68(11:18-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728()

 

고향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1:18-23)

 

유다 왕국 말기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왕과 귀족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아나돗의 제사장들로부터도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11:18-23).

어째서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말씀을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대언하고 있는 예레미야가 다윗왕조로부터 그리고 고향의 제사장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그 연유와 당시의 상황을 본문을 참조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은 공의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11:20a).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을 독점하고자 합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나라이므로 여호와의 복과 구원을 받을 자격자는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주변의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모르고 또한 죄악을 범하고 있는 죄인들이므로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는 것이 옳다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예레미야가 사람의 마음속을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20b). 선민 유대인들은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여호와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만, 여호와의 율법과 절기를 지키는 척 꾸미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이기적인 소원을 그곳에서 빌고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육신적인 쾌락과 정욕을 추구하면서 죄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등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제물을 많이 바치고 정성을 보이면 비는 자의 소원성취를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문화가 선민 유대인들의 마음에 쏙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족인 유다 왕국의 왕과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의 죄악이 이미 망한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같아졌기 때문에 이방 강대국에 의하여 유다 왕국도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    첫째, 그와 같은 예언을 선민 유대인들이 극히 싫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예언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핍박하고 있습니다(11:19).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자 고향에서부터 내쫓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11:21). 그것은 훗날 예수님의 경우와 같습니다(4:16-30).

2)    둘째, 선민 유대인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의인들이며 선민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나라를 버리실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도 분명히 그러했습니다(왕하19:34-35).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지켜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3)  셋째로, 여호와의 생각과 판단은 선민 유대인들과 다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1)    첫째, 여호와의 판단의 기준은 진작에 사무엘상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삼상2:30-31).

2)    둘째, 위와 같은 여호와의 엄중한 선언을 선민들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비록 영적으로 타락하여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선민의 나라 만큼은 보호하여 주실 것으로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무엘상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셋째, 실제로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냐와 같은 거짓선지자의 달콤한 말에 현혹이 되고 있습니다(28:1-4). 그 이유는 거짓선지자의 말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입니다.

(4)  넷째로, 유다의 왕과 백성들이 거짓선지자의 말을 물리치고 속히 한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회개하였더라면 그들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금과 같은 그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맙니다. 그 결과 유다 왕국은 끝장이 나고 그들은 이방나라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들의 미래상을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때에니라”(11:22-2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1:18-19);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11:18);

1)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힘있게 외치면 그 권능의 말씀 앞에 세상사람들이 모두 청종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입장과 피조물의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조금 살펴봅니다;

2)    첫째, 피조물인 사람들이 창조주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주장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이므로 마치 자식과 같이 사랑스럽고 귀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모두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3)    둘째, 선민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피조세계는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살기다툼의 현장입니다. 남보다 적게 가지게 되면 굶주리거나 종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많이 차지하고자 남을 도와주고 돌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4)    셋째,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동족이 아닌 다른 백성들도 돌보라고 공의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론을 통일하여 강한 적과 맞서야 하는 시국에 자국민의 정신전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이적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동족으로부터 먼저 배척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리 언급을 하여 주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11:18). 참고로, 그와 같은 이치를 훗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2)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11:19a);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인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동족들인 선민 유대인들과 맞서서 싸우지를 말라고 하십니다(11:19aa).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동일한 여호와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그 뜻이 무엇일까요?

2)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있는 동족들의 불신앙이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선민들을 돌이키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고쳐서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다시 사용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인내와 긍휼을 베풀고 계십니다(9:22-24). 그에 따라 선지자를 구하기 위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여호와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아니하십니다(26:52-54).

3)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기준에 대하여 창세기 제15장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6). 여호와께서는 각 족속의 죄악을 재는 기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주머니에 무죄한 자의 피가 가득 차게 되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쫓아내십니다. 그에 따라 가나안 일대에서 죄악을 많이 행한 아모리 족속이 쫓겨나고 그 대신에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찬가지로 선민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죄악을 많이 행하게 되면 그 주머니가 가득 차게 되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열왕기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왕하21:11-12).  

5)    선민 유대인들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11:19ab). 그 의미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여금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지 못하도록 그 입을 막아 버리고자 합니다. ②또 하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의 사회에서 힘을 얻지 못하도록 아예 그 공의의 정신의 뿌리를 잘라버리고자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선민사회에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므낫세 왕의 시대가 그러합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자인 요시야 왕이 즉위 18년에 겨우 예루살렘성전에서 모세오경의 경전 하나를 구해서 읽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22:3, 8-11).

(3)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1:19b);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그 뜻은 다음과 같이 간단합니다;

1)    첫째, 예레미야를 죽여서 다시는 선민사회에서 여호와의 말씀 운운하는 입을 놀릴 수가 없도록 하자는 모의를 그의 동족들이 감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11:19ba).

2)    둘째, 약관의 나이에 선지자가 되어 여호와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고향사람과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는 젊은이 예레미야는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1:19bb).

둘째로,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11:20-21); 역시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11:20a);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판단을 하시고 어떠한 능력을 행하시는 창조주이신지를 여기서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여호와께서는 공의로 판단을 하신다는 것입니다(11:20aa).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사람들의 정의’(正義, justice)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법정에서 의로운 것으로 판정이 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비록 집단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는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그러나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릴 수가 있어야 진정 의로운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집단 이기적인 정의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서로가 옳다고 전쟁을 벌인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사람은 이웃사람을 속일 수가 있지만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으므로 그 속마음을 투시하시는 능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1:20ab, 4:13).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진심으로 행해야만 합니다. 속마음은 여호와의 말씀을 배척하고 있는데 겉으로만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있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질책하고 있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입니다(23:13-29).

4)    넷째, 그 내심을 모르고서 이웃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외식적인 율법행위자를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칭찬할지 몰라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처벌의 대상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회개를 하고서 여호와 앞에 신실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11:20b);

1)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돗의 제사장들로부터 그리고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원통함에 대하여 그것을 그들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으로 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의 입장에서 오로지 자신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만 기도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맡겨 놓게 되면 고향사람들과 동족들에게 유익이 있게 됩니다.

2)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파송한 말씀의 대언자인 선지자를 선민 유대인들이 배척한 그 책임을 반드시 물으신 다음에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비록 그 처벌이 유다 왕국의 멸망과 이방 땅에서의 유배생활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다시 여호와신앙으로 돌아오는 회개의 운동이 발생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미래가 나타나는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보고 싶어합니다;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11:20b). 참고로, 그와 같은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9-21).

(3)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11:21);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인 아나돗 제사장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살피고 계십니다;

1)    첫째,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 10리길 곧 4km지점입니다. 그 성읍은 베냐민 지파가 아론의 후손들인 제사장들을 위하여 내어 놓은 4개의 성읍 가운데 가장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입니다(21:17-19). 그곳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난 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1:1). 아나돗이 예루살렘의 북쪽 교외 마을이므로 그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성전에 나름대로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런데 아나돗의 제사장들이 약관의 나이에 선지자가 된 예레미야가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2). 그 이유는 30세 이상이 제사장들인데 자신보다 어린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공의의 정신을 전파하고 있으니 그것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조국인 유다 왕국이 멀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있으므로 부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라고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7:15). 그 외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있는 고향사람들은 이제 선지자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그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4)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식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더 큰소리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고향사람들이 어떻게 예레미야의 입을 막아버릴까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11:21). 그와 같은 그들의 내심을 여호와께서 아시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자 하십니다.  

셋째로,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을 벌할 때에니라”(11:22-23);

(1)  첫째,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에서 영적인 지도자는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들이며 세습제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혈통적인 긍지와 종교적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에서 자신들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당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에 불과한 예레미야가 젊은 나이에 선지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감히 거룩한 제사장인 자신들 앞에서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곧 나라가 이방인 강대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만다고 건방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2)  둘째,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부지런히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러한 불행한 미래가 도래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의 적을 쳐부수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포와는 달리, 여호와께서는 선민들에게 죄사함과 평강의 은혜를 주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성가시게 떠들고 있는 예레미야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합니다(11:21).

(3)  셋째,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종교적인 제례의식에 빠져서 속죄의 제사만 정기적으로 여호와께 드리면 유다 왕국은 아무리 영적으로 부패하다고 하더라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는 날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11:23). 그때에는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아나돗 성읍이 전쟁터가 될 것이며 전체 주민이 몰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11:22).

(4)  넷째,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시리아를 통과하여 남하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요단 강을 건너 오고 있습니다. 그때 북쪽의 관문인 기브온과 아나돗을 공격합니다. 예루살렘 북쪽 통로를 지키고자 유다 왕국의 병사들이 필사적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돗에서의 전투가 치열합니다. 그 결과 전쟁터로 내몰린 아나돗의 청년들이 모두 전사를 하고 맙니다. 신바벨론의 원정군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서 그 주변의 지역을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고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미래가 예레미야에 의하여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을 벌할 때에니라”(11:22-23)고 상세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도 고향인 나사렛에서 주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여호와의 만민구원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5:43-48). 선민들만 영광을 누리고 여호와의 축복을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민들에게 ①첫째, 하나님의 축복인 복음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도 전파하고 ②둘째, 이방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선민 유대인들이 부디 제사장나라답게 살아가라고 외쳤으니 그 반대가 오죽이나 심하겠습니까?(4:16-30)

똑같은 핍박과 환난을 예수님보다 600년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에서 먼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훗날의 예수님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자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심정을 기도로써 말씀드리고 그 보응을 여호와께 맡겨버립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과 육신적인 죄악 때문에 선민 유대인들은 조국이 망하고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살아가게 되는 고난을 당하지만 나중에는 유대인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초대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는 환난과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만 아뢰고 아무쪼록 원수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제사장들의 성읍과 레위인들의 성읍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