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6강(눅17:1-3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년 1월 11일(목)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두가지 종류의 실족(失足, 발을 헛디디어서 넘어지는 것)은 어떠한 것들인가?(눅17:1-4)
(1)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만드는 성도의 실족은 무엇인가?(눅17:1-2)
1) 첫째, 신앙상의 언행의 불일치가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만들고 있음(마23:3-4).
2) 둘째,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 그리고 위기에 빠진 자를 외면하는 성도의 행위가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만들고 있는 것임(눅10:30-37).
3) 그와 같은 외식적(外飾的, 겉만을 번지르르하게 꾸미는)인 신앙 그리고 생명을 돌보고 살리지 아니하는 신앙생활은 남을 실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생마저 위태롭게 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고쳐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심(눅17:2).
(2) 형제가 죄를 범하여도 경고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여도 용서하지 아니하면 어찌되는가?(눅17:3-4)
1)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것 두가지를 실천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심. 그것이 서로가 실족하지 아니하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에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시는 것임.
2) 첫째,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를 하라는 것임(눅17:3b). 그러한 경고가 있을 때에 서로가 스스로 조심을 하게 된다는 것임(눅17:3a).
3) 둘째, 형제가 경고를 받고 회개를 하거든 용서를 해주라는 것임(눅17:3c). 만약 경고가 없었더라면 그 형제는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임.
4) 그러므로 경고를 한 성도는 그 형제가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몇 번이라도 용서를 해줌으로써 이 땅에서 매인 것을 풀도록 하라는 것임(눅17:4, 마16:19). 그것이 영생의 천국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임.
2.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눅17:5-10)
(1) 사도들의 믿음은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부족한 것인가?(눅17:5-6)
1)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5-6);
2)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고 하더라도 뽕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는 능력을 행할 수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임. 그러므로 사도들의 믿음이 적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사하는 종의 자세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발생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신 것임.
(2) 믿음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자세가 문제라는 예수님의 지적에 대하여(눅17:7-10);
1)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맡길 수 있는 종의 조건이 다음과 같다는 것임;
2) 첫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행하는 종이라야 함. 둘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도록 하고 자신은 종의 도리만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임.
3) 셋째, 종으로서 당연히 주인이 맡기신 일을 행한 것이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임. 넷째, 자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처분에 대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감사하게 받아 들이는 종이라야 한다는 것임.
4) 그와 같은 올바른 종의 도리를 행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안심하고 맡기지를 못하고 계신다고 하는 예수님의 설명이신 것임.
3. 모세오경에서는 나병환자를 이스라엘 진영 바깥으로 내치라고 되어 있는데(민5:1-4)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이 정착하고 있는 오지(奧地, 먼 외딴 곳)마을에 오셔서 그들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가?(눅17:11-14)
(1)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나병환자들의 마을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와 그곳을 방문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눅17:11-12, 민5:1-4)
1) 모세의 시대인 주전 15세기 후반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인 주후 1세기 전반에도 역시 나병은 불치의 병임. 따라서 나병환자들은 모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을에서 격리가 되어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어서 살아가게 한 것임.
2) 그렇다면, 나병환자들의 정착촌이 어디에 형성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답변이 여기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눅17:11)라고 기록이 되고 있음. 그 말은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나병환자들을 그들의 경계 바깥으로 쫓아내었으며 갈릴리 지역에서도 주민들이 그들을 경계 바깥으로 내쫓았다는 것임.
3) 그 결과 나병환자들이 정착하고 있는 마을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그 경계선의 오지에 위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임. 그곳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 한국과 북한 사이의 경계지역인 비무장지대 정도의 위치이며 그곳에는 민간백성들이 살고 있지 아니하고 있는 그러한 오지(奧地, 먼 외딴 곳)가 되는 것임.
4)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어째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오지마을을 일부러 방문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임(눅17:12). 예수님의 의도는 그러한 오지마을 그것도 선민들에게서 배척을 받고 격리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도 천국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손길을 펼쳐야만 한다는 것임. 그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천국복음으로 전파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기본 입장이라고 하겠음.
(2) 그들이 멀리 서서 부디 치유해 달라고 외치는 이유와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인가?(눅17:13-14)
1) 예수님 일행이 자신들의 정착촌에 다가오자 나병환자들은 얼른 그 마을을 벗어나고 있음(눅17:12). 그 이유는 전염성이 강하고 율법에 의하여 격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들은 일반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절대로 아니되기 때문임(민5:1-4, 레13:45-46).
2) 그래서 나병환자 10명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자신들을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임;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 그들은 예수님을 그 옛날 나병환자인 나아만 장군을 고쳐준 선지자 엘리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임(왕하5:9-14).
3) 예수님의 답변이 다음과 같이 구체적임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눅17:14).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음; ①첫째, 멀리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은 다음에 그저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여주라고 하신 것임. 참고로 율법에 따라 제사장들은 나병의 발생과 치유를 진단하여 백성들에게 선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음(레13:2-37). 그러므로 그 말씀의 의미는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너희들의 몸을 보여주고 깨끗하게 나았다는 유권적인 진단과 선포를 얻으라는 것임.
4) ②둘째,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자신 있는 답변을 듣고서 그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마치 그 옛날 나아만 장군처럼 선지자의 말에 순종을 하고 있음(왕하5:13-14). 그러자 제사장들을 찾아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임(눅17:14). 그것은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있던 헤롯 안디바의 신하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에 가버나움 집에 있던 아들의 중병이 낫게 된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인 것임(요4:46-53).
4. 나병환자촌에서 고침을 받은 10명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어떠한 추가적인 은혜를 얻고 있는가?(눅17:15-19)
(1) 어째서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만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예수님께 오고 있는가?(눅17:15-16)
1)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눅17:15-16);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
2) 첫째,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기 위하여 길을 가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환부가 아물고 나병이 낫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됨. 둘째, 깜짝 놀란 그들 가운데 9명은 너무나 좋아서 빨리 제사장들을 찾아보고 치유의 확인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 셋째, 그러나 한 사람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낫게 해준 나사렛 예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달려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임.
3) 넷째, 의사 누가는 그가 선민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며 치유를 받은 채 예수님을 더 이상 찾지 아니하고 있는 나머지 9명은 선민 유대인과 같다고 말하고 있음. 그것은 불치의 병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게 된 사람들의 그 다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임; “선민 유대인들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서 그저 자신들의 생업만을 도모하며 율법에 따라 감사의 헌물만을 바치고서 살아가고 말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남은 인생 동안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의 은혜를 온세상에 전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임”.
(2) 그 사마리아 출신이 얻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가?(눅17:17-19)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10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9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7-19);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임;
2) 첫째, 불치의 병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낫게 된 그 사람들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고 계신다는 것임. 10명 모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이 예수님의 관심 사항이며 하나님께서 주시하시는 대상이 되고 있음.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들이 나음을 입은 거듭난 그 몸으로 복음사역에 동참을 하게 되면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겠지만 옛날처럼 제 마음대로 살게 되면 영생의 구원에서 다시 멀어지고 마는 것임.
3) 둘째,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계심.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갈릴리 서편지역에서 주로 복음사역을 하셨으며 때로는 갈릴리 동편과 북편의 이방인 지역 그리고 해변길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곧 페니키아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바가 있음. 그 결과 이방인들이 선민 유대인들보다 더 예수님을 환영하였다는 것임(눅10:13-16). 그러한 예수님의 총평에 대하여 그 근거로 제시가 되고 있는 것이 본문이라고 하겠음(눅17:18).
4) 셋째,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엄청난 은혜가 나타나고 있는 것임.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치유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신적인 치유에 그치고 있는 것임. 따라서 100년 안팎을 살고 나면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이며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육신인 것임.
5) 그에 비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진단과 선포는 다른 것임. 근본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창조주이시며 나를 영생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서 그 뜻을 받들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음(히11:1-2, 6). 그러한 믿음이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이제 시작이 되고 있기에 영생의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있는 것임(눅17:19).
5. 바리새인들이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인가?(눅17:20-21)
(1) 바리새인들이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이유(눅17:20a);
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눅17:20a); 바리새인들은 선민사상으로 히브리정경을 풀이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자들임. 그러므로 선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음.
2)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는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과 같은 것임. 자신들을 침탈하여 지배하고 있는 외세를 모두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고 그 옛날 다윗대왕처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땅을 차지하여(창15:18, 삼하8:1-14) 선민의 영광을 온세상에 다시 떨치는 것임. 그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며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임.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께 심히 당연한 질문을 드리고 있는 것임(눅17:20a).
3) 바리새인들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 그리고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이라고 하는 세속적인 신앙의 모습은 유대교 내의 것만이 아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천국복음으로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다시 공부한 바가 있는(눅24:44-49, 행1:3-5) 예수님의 제자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임. 따라서 승천하시기 직전의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임;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영적인 특징(눅17:20b-21);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b-21);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말씀하심; ①첫째,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처럼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제국이 아니라는 것임(삼하8:1-18). ②둘째, 중동이라고 하는 어느 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패권국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임(창15:18). ③셋째, 성도들의 마음 밭에서 자라고 있는 나라라는 것임(눅8:15);
2)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좀더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①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한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 들이게 되면 그 마음 밭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 ②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따르면, 죄와 사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쫓겨나고(롬8:2, 눅11:20)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성전을 건설하게 되면 그 속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것임(요14:16-20, 고전6:19).
3) ③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도들의 복음사역에 함께하시며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건설과정이라는 것임(마28:18-20, 눅22:28-30, 행1:8).
4) ④완성된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면 새 예루살렘성으로 이 세상에 임하게 된다는 것임.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며(사65:17-25)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의 예언인 것임(계21-22장).
6. 인자의 날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특징과 그 과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무엇인가?(눅17:22-25)
(1) 인자의 날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특징(눅17:22-24);
1)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념이 지극히 현세적이고도 이기적인 것임. 그 이유는 그들이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들의 나라를 현실적인 제국으로 중동 땅에 건설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임. 그와 같은 열망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일부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한 것임(행1:6).
2)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①첫째, 이 세상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눅17:20). ②둘째,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잘못이며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임하고 있다고 말씀하심(눅17:21).
3) 이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날 곧 ‘인자의 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또 제자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17:22-24).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음;
4) 첫째, 하나님나라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동일하다는 것임. 지금의 하늘과 땅에서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임.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수도로서 새 예루살렘성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게 되는 그 때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것 곧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임(사65:17-18, 계21:1-2).
5) 둘째, 아직 지금의 땅과 하늘이 존재하고 있는데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보이는 제국으로 임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저곳에서부터 임재하시고 계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유혹이며 시험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씀이신 것임(눅17:22-23).
6) 셋째,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아들의 영광으로 이 세상에 재림하시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마치 번개가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한꺼번에 동시에 번쩍이는 것과 같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렇게 임하실 것임.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특정하여 말하는 것은 거짓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는 것임(눅17:24).
(2) 인자의 날이 임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는 고난의 의미(눅17:25);
1) 첫째,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음;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17:25).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주님의 재림이 모두 약속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영광이라는 것임.
2)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받드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희생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먼저 이 땅에서 드리셔야만 하신다는 것임. 그 고난과 대속의 과정이 있어야 사도와 제자들이 온세상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으며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도 훗날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임.
3)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설명이 다음과 같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4)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고난을 먼저 받지 아니하면 성도들에게도 영광의 미래가 없다는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강조하고 계시는 것임.
7. 인자의 날에는 세상에 대한 심판과 개인별 구원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가?(눅17:26-30)
(1)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과 롯의 시대의 불심판의 공통점과 차이점(눅17:26-29);
1) 첫째로, 노아 시대 홍수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17:26-27); 한 마디로, 세상사람들이 세상적인 복락과 번성만을 추구했다는 것임.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불감증에 걸린 환자와 같음. 그 결과 전면적인 홍수삼판으로 말미암아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임.
2) 둘째로, 롯의 시대 소돔과 고모라 등지의 주민들은 어떠했는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8-30);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민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것임. 생활이 넉넉하고 재산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어 세상적인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것임.
3) 그러므로 경제적인 성공과 인간적인 쾌락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하고 있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 및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고려해불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임.
4) 셋째로, 그에 비해서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 전면적인 심판의 성격이라면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서 발생한 불심판은 국지적인 심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겠음. 무지개 언약으로 말미암아 전면적인 홍수심판이 다시는 발생하지 아니하고(창8:21, 9:11-17) 제한적인 불심판만이 내리고 있다는 것임(창19:24-25, 신29:23).
(2) 예수님의 재림 때는 어떠하다는 말인가?(눅17:30)
1)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30)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대목임.
2) 그것은 예수님 재림 때의 세상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노아 시대의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 및 롯이 살고 있는 성읍의 주민들의 삶의 모습과 동일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임. 그러므로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그들의 공통점과 같다고 하겠음; “경제적인 성공과 인간적인 쾌락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하고 있으므로 여전히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 및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고려해불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임”.
8. 인자의 날에 재물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게 되면 어찌 되는가?(눅17:31-33)
(1) 심판의 날에 자신의 재물에 미련을 둔 경우(눅17:31-32);
1) “그날(인자가 나타나는 날, 눅17:30)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추수할 곡식이)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1-32);
2) 보통 세간살이는 집안에 있고 추수할 농작물은 밭에 있음. 그러므로 피난을 가더라도 세간을 챙기고 곡식을 장만하여 집을 떠나는 것이 맞는 수순임. 그러나 세상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노아의 홍수심판 때나 롯의 시대의 불심판처럼 예고도 없이 일시에 밀어 닥친다는 것임. 따라서 그렇게 여유 있게 피난살림을 챙겨갈 시간이 없는 것임.
3)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단 한가지 롯의 처가 소돔 성에 두고 온 자신의 재물이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그 사건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것임(창19:17, 26, 눅17:32).
(2) 심판의 날에 자신의 목숨에 미련을 둔 경우(눅17:33);
1)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
2) 첫째, 참으로 명쾌하신 예수님의 언급이심. 이 세상에 대한 종말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려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임. 따라서 유한한 육신적인 삶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현재의 하늘과 땅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상 곧 만민이 구원을 얻어 함께 영생을 구가할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한다는 것임.
3) 둘째, 성도들은 헌 장막 또는 헌 옷과 같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영생이 깃들어 있는 부활의 새 몸을 입어야만 한다는 것임. 그러한 영생구원과 천국복음의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여전히 유한한 목숨만을 보전하고자 끝까지 노력한다면 그러한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불행한 자가 되고 말 것이라는 예수님의 너무나 친절하신 설명이라고 하겠음.
9. 예수님께서 어디에 재림을 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나 구원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무엇인가?(눅17:34-37)
(1)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재림을 하시는가?(눅17:37)
1) 역사적으로 멸망과 구원이 동시에 나타난 경우가 몇 번 있음. 대표적인 경우로서 두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음; 첫째, 출애굽 당시 유월절 밤이 그러함. 애굽의 제국에서 애굽인들의 가정에서는 그날 밤 장남의 죽음과 가축의 초태생의 죽음이 동시에 임하고 있음(출12:29-30). 그와 달리 고센 땅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가정에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장남과 가축의 초태생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얻고 있는 것임(출12:21-24).
2) 둘째,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성의 주위가 그러함. 하나님의 사자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원정군 18만 5천명을 그날 밤에 도륙하고 만 것임(왕하19:35). 반대로, 그들이 물러가자 예루살렘성에 갇혀 있던 선민 유대인들은 모두 구원을 얻고 있는 것임(왕하19:34).
3)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자리 그곳에 임하셔서 동시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재림의 장소도 이 세상의 종말심판이 임하고 있는 그 자리라고 하겠음.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독수리가 날아 들고 있는 그곳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심;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눅17:37).
(2)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얼마나 구원을 받게 되는가?(눅17:34-36)
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34-35);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음;
2) 첫째, 종말심판에 있어서는 심판 직전에 데려감을 당하고 있는 자가 마치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는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음(눅17:34-35, 창6:18-22). 그렇게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하여 휴거가 되고 있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으며 남아 있는 자들은 세상의 멸망과 더불어 그 운명을 같이하고 마는 것임(살전4:17).
3) 둘째, 남녀를 막론하고 휴거를 당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자와 그러하지 못하고 종말심판에 들어가게 되는 자의 비율이 ‘1대1’로 나타나고 있음(눅17:34-35).
4)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제7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14만 4천이니”(계7:4)라는 구절을 너무 좁게 해석하여 세상의 종말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자의 수가 그렇게 적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본문의 취지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는 풀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고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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