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4강(눅15:1-3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29. 04:09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4(15:1-3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12 14()

 

1.    유대 땅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천국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가까이 오고 있음.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고 있음. 그렇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은 것인가?(15:1-2, 5:29-30, 레위의 경우, 18:9-14, 바리새인의 기도, 19:5-7, 삭개오의 경우)

(1)  예수님의 인간론과 바리새인들의 인간론의 차이;

1)    모든 세리죄인들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5:1-2);

2)    예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이유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왔기 때문임.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식사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천국복음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오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3)    당시 선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정경의 하나님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또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있다고 예수님의 처신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음;

4)    첫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므로 모든 세리 및 죄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실에 예수님께서 동의를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 예수님께서는 성경선생인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미워하고 있는 세관원들이나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이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들어야만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임.

5)    둘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의인이며 구원의 대상이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죄인들 그리고 동족들로부터 관세를 거두어서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매국노인 세관원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음. 그러므로 자신들의 선민사상과 율법에 의한 구원사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는 예수님은 선지자의 자격조차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임.

6)    한 마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상대적인 의로움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임.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속과 중심까지 들여다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눈을 의식하라는 것임. 따라서 이 세상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 없으며 모두가 죄인들이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 훗날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고서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으라는 것임.

(2)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들의 정의와의 차이;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아니라 선민들의 정의의 개념인 것임. 구체적으로, 선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외세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하고 그들을 종으로 삼아 다스릴 수 있는 선민들의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떨치는 소위 시온의 영광이라고 믿고 있음.

2)    현실적으로, 선민 유대인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물리칠 수가 없으므로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다윗대왕이나 히스기야 왕 때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임(삼하8:1-14, 왕하19:34-36). 그것이 그들의 메시아 사상임.

3)    그러나 예수님께서 전파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는 선민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란 창조주의 눈으로 피조세계를 모두 불쌍하게 여기고 하나같이 돌보며 그 생명을 전부 구원해주고자 하시는 것임(3:16, 8:15-23).

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인 사람들이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자신들만의 정의로 주장하고 현세적인 복만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모두들 간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물리치심. 그 대신에 선민과 이방인, 그리고 자칭 의인과 죄인을 바리새인들처럼 인위적으로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모두를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자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임.

5)    요컨대, 예수님께서는 선민들만의 정의가 아니라 온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임. 그 사실을 자칭 의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임(15:1-2).

 

2.    주인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면 주인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하는가? 잔치비용이 양 한 마리의 값보다 더 들지 아니하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과연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마리에 들고 있는가?(15:3-7)

(1)  주인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는 이유와 큰 잔치를 벌이는 이유(15:3-7);

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 내었노라 하리라”(15:3-6);

2)    두가지 질문이 내재되어 있는 비유임; ①첫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다니다가 들에 둔 99마리에게 위해(危害)가 미치게 되면 어찌되는가? ②둘째,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큰 잔치를 벌이게 되면 그것은 비용이 더 많이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그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비유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밝혀지고 있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도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첫째, 잃은 양이 바로 죄인 한 사람이며 그 죄인이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나라에 들어오게 되면 그 값어치는 이 세상의 것으로 환산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임. 왜냐하면, 그 회개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아들같이 여기시기 때문임(1:12-13, 8:15, 21:7). 따라서 천국에서 큰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임.

4)    둘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있는 99마리의 양은 참으로 안전함.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있는 그것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는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고 계시기 때문임(10:27-29, 8:38-39). 그러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10:10-11)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고서 안심하시고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다니시는 것임.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과연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에 들고 있는가?(4, 7)

1)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구절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도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일까요? 아니면 죄인일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3:15);

3)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이 외식적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이심. 그 말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는 그러하지가 않다는 것임.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을 시켜서 대신 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임. 그 좋은 예가 안식일에 일꾼들에게 바리새인의 외양간에서 가축을 풀어내어 멀리 이끌고 나가 물을 마시게 하고 있다는 것임.

4)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두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죄인들임; ①하나는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고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임. ②또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임.  

 

3.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쓸면서까지 그것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드라크마가 도대체 어떤 언약을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찾고 그토록 기뻐하는가?(15:8-10)

(1)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쓸면서까지 그것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15:8-10)

1)    어떤 여자가 10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 내었노라 하리라”(15:8-9); 10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그 가운데 하나의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다고 하여 그것을 찾고자 온 집안을 쓸면서 샅샅이 뒤지고 있는 것임. 도대체 한 드라크마의 가치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 정도로 정성을 들여서 다시 찾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요?

2)    드라크마는 본래 헬라의 은전인데 그 무게가 은 4.3g. 그것은 로마의 은화인 데나리온과 같이 유대사회에서 한 사람의 장정의 하루 품삯을 말하고 있음(20:2). 그러나 데나리온이 은 3.88g인데 비하여 드라크마는 그보다 더 은의 무게가 많으므로 선호의 대상임.

3)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크마 한 개를 찾겠다고 온 집안을 쓸고 샅샅이 뒤지고 있는 것은 지나친 것임. 더구나 그것을 찾았다고 하여 친지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이치에 맞지가 않는 것임.

4)    따라서 그 의미를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 그 의미는 제7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 잃은 양의 이야기와 동일한 것임. ,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는 것임.

(2)  그 드라크마가 도대체 어떤 언약을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찾고 그토록 기뻐하는가?

1)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는 페니키아와 유대 땅에 있어서는 헬라의 은화인 드라크마가 귀해지고 그 대신에 로마의 데나리온이 많이 사용이 되고 있음. 그렇지만 드라크마가 여전히 선민 유대인들의 사랑은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두가지 때문임;

2)    첫째, 데나리온보다 은의 함량이 더 많으며 특히 드라크마에는 왕의 흉상과 장수하는 여러 동물들이 아름답게 조각이 되어 있음. 그러므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음.

3)    둘째, 각각 다르게 조각이 되어 있는 10개의 드라크마를 한 줄로 엮어서 귀한 예물로 사용하고 있음. 특히 신랑이 사랑의 고백으로 신부에게 주고 있는 아주 훌륭한 결혼 예물임. 그러므로 신부는 머리에 그 10개의 드라크마를 장식하고서 자신의 사랑과 정조(情操)를 자랑하고 있는 것임.

4)    그렇게 중요한 사랑의 징표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온 정성을 다하여 찾고 있으며 또한 찾아내면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큰 잔치를 벌인다는 것임.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의 회개를 기뻐하면서 그를 영생의 천국으로 맞이하여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   

 

4.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그 재산 중에서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차남과 차제에 두 아들 곧 장남과 차남에게 사전 상속을 해주고 있는 아버지의 행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15:11-12)

(1)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그 재산 중에서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차남의 태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5:11-12a)

1)    무신론자(無神論者)에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음; ①하나는 애초부터 자연과 이 세상은 우주의 어떤 법칙과 에너지에 의하여 자연발생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임. ②또 하나는 태초에 창조자가 있어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현재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임. 왜냐하면, 피조된 이 세상이 자연의 법칙 그대로 흘러가도록 버려 두고 있기 때문임. 그러므로 창조주는 죽은 것과 같으며 이 세상은 마치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다는 것임.

2)    따라서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탄생시키고 움직이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나 원리를 일종의 아르케로 깨닫게 되면 철학왕이 될 수가 있으며 신과 같이 이 세상을 잘 경영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 인도의 브라만 사상도 그와 비슷함. 우주를 탄생시킨 그 에너지인 브라만을 깨닫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타나고 있음.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으로 치부하고서 유산 가운데 자신의 상속분을 사전에 달라고 하는 것임(15:12a). 그것은 불효가 막심한 패륜아의 행위인 것임.

4)    부모님이 돌아 가셔야만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을 물욕에 눈이 어두어진 둘째 아들이 생전에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였으니 그것은 부모는 버리고 그 재산만 차지하여 제 마음대로 한 세상 살아보겠다고 하는 잘못된 욕심인 것임. 그것이 무신론자인 유물론자(唯物論者)의 사고방식과 같은 것임.

(2)  차제에 두 아들 곧 장남과 차남에게 사전 상속을 해주고 있는 아버지의 행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15:12b)

1)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이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비유로 적혀 있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5:11-12);

2)    두가지의 의문이 들고 있음; ①첫째, 아버지의 재산을 사전에 상속받아 아버지 집을 떠나서 제멋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하는 차남의 엉뚱한 욕심을 아시면서도 아버지께서는 어째서 그 소원을 들어주고 계시는가? ②둘째, 차남 뿐만 아니라 차제에 장남에게까지 재산을 나누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3)    첫째로, 아버지께서는 차남의 자유의지와 그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 잘못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를 해야만 한다는 것임.

4)    둘째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드러나고 있음. 차남 뿐만 아니라 장남에게도 동일한 배분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임. 그것이 공평한 것임.

 

5.    먼 나라로 떠나가서 재산을 탕진해버린 차남이 어째서 회개를 하며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가?(15:13-20a)

(1)  먼 나라 대처(大處)에서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마침내 처하게 된 비참한 상황(15:13-16);

1)    그후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5:13-16);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임;

2)    첫째,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 계시는 무신론자들의 나라에 가서 그 아들이 사치와 향락에 취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거룩한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는 것임.

3)    둘째, 영적인 빈곤과 함께 육신적인 곤궁함이 밀어 닥치자 호구지책(糊口之策, 입에 풀칠이나 하여 겨우 먹고 살고자 하는 방법)으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돼지를 치는 직종에 종사를 하고 있다는 것임.

4)    셋째, 하나님신앙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다가 육신적으로까지 궁핍하게 된 탕자를 이 세상에서 아무도 구원해주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임. 그 대목의 비유를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는 돼지의 먹이로 사용하지만 흉년에는 사람이 먹는 야생열매 쥐엄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현실감이 있게 설명하시는 것임. 메뚜기처럼 생긴 쥐엄나무와 그 열매에 대해서는 첨부한 그림을 참조하시기 바람.

(2)  탕자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가?(15:17-18)

1)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5:17-18); 아버지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를 대조함으로 말미암아 탕자의 마음이 돌아서고 있음.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음;

2)    첫째, 아버지께서는 일꾼들에게 양식을 풍족하게 주신다는 것임. 그러나 이방인의 나라에서는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굶주리게 된다는 것임.

3)    둘째,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 둘째 아들은 이제 스스로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있음. 그는 죄인의 심정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임.

(3)  회개의 내용과 새로운 각오(15:18-20a);

1)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15:18-20); 탕자의 회개의 내용과 새로운 각오가 다음과 같음;

2)    첫째, 자신은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것임.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패륜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모두 저지른 자라는 의미임. 그것을 히브리정경에서는 패역’(悖逆)이라고 부르고 있음(21:18-20).

3)    둘째, 패역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임. 따라서 그저 품꾼의 하나로 사용해주시고 굶어 죽지 아니하도록 조치만 해주시더라도 그것으로 감지덕지(感之德之)하다는 심정인 것임. 그것은 참으로 죄 사함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마음의 자세인 것임.

4)    셋째,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탕자는 이제 아버지 집을 찾아가는 회개한 아들이 되고 있는 것임.

 

6.    마을 입구에 매일 나와서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이제는 종이 되겠다고 하는 차남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 신원을 회복시켜주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15:20b-24)

(1)  예수님께서 비유로써 보여주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15:20b-23);

1)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0b-23);

2)    첫째, 아버지께서 집 나간 둘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는 대목이 비유로써 잘 나타나고 있음. 동구 바깥에 나가서 매일 같이 기다리다가 멀리서 탕자의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서 급히 달려가서 마중을 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차남은 감히 아버지를 바라볼 면목도 없어서 그저 죄인이오니 일꾼으로라도 삼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음.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다름. 아버지의 관대하고 풍성하신 마음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회개를 하고서 돌아와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기쁘다는 것임. 그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내리사랑인 것임.

4)    셋째, 그래서 차남의 신원을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시켜주고 큰 잔치를 베풀고자 하시는 것임. 그것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의인으로 맞이하는 천국의 잔치와 같은 것임.  

(2)  이제는 종이 되겠다고 하는 차남을 아버지께서 기쁘게 맞이하고 그 신원을 회복시켜주는 이유(15:24);

1)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2)    첫째, 아버지를 떠나서 하나님신앙을 잊어버리고 무신론자의 세상에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자는 죽은 자라는 것임. 더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그 달란트를 낭비한 자는 그 사명을 잃어버린 자라는 것임.

3)    둘째, 스스로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이미 다시 살아난 자라는 것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해주고 축하를 해준다는 것임.

4)    셋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달란트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작심하고 있는 자는 장차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가 있을 것이므로 새로운 일꾼을 맞이한 기쁨을 누리자는 것임.

5)    넷째,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고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은 이미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자를 말하고 있음. 예를 들면, 비유 가운데 먼저 등장하고 있는 장남과 같은 자임(15:11-12).

6)    참고로, 세례 요한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천국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들러리로서 함께 기뻐하는 자라는 것임(3:29). 그렇게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간 자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가서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벌리는 천국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는 것임.

 

7.    이미 자신의 몫을 차지하고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장남이 동생이 돌아온 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있는 깊은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15:25-30)

(1)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며 아버지 집에서 잘 지내고 있으면서 스스로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장남(15:12, 29);

1)    차남은 사전 상속을 받고서 아버지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가버렸음(15:11-13). 반면에 함께 재산을 상속 받은 장남은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함께 살고 있음(15:12, 25, 29).

2)    그런데 자신의 밭일을 하고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던 장남이 동생이 거지꼴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그를 환대하고 동네잔치까지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화를 내고 있음(15:25-28).

3)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화를 내고 있는 장남을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고자 하심(15:28). 그러나 장남의 비뚤어진 한 마디에 크게 놀라고 있음;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29-30);

4)    아버지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장남은 한 마디로 꿩 먹고 알 먹고 모든 실속을 취하고 있는 자임.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으므로 생활비가 들지가 않음. 그러면서 자신의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있으니 해가 갈수록 자신의 재물이 늘고 있는 형편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는 마치 자신이 나이가 많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인 것임.

(2)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 들이게 되면 아버지 집에서 자신의 재산이 축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남(15:30);

1)    장남은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면 아버지의 재산은 사후(死後)에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줄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음. 그런데 느닷없이 동생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 왔으므로 이제는 그를 쫓아내지 못하게 되면 선례에 따라 아버지의 재산을 또 나누어 가져야만 되는 것임(15:12).

2)    욕심이 많은 장남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임. 그러한 장남의 심술과 욕심은 마치 공의의 하나님을 선민만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도모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규정하고자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과 같은 고약한 심보라고 하겠음.

3)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장남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서 동생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득하시는 것임;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31-32).

 

8.    장남과 같은 선민들의 항변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계시는가?(15:31-32)

(1)  재산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영생과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임(15:12, 31);

1)    장남과 같은 선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음(5:1, 7:13, 106:48). 그 말의 뜻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처럼 언제나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애굽제국과 같은 이방나라들을 재앙으로 다스리시며 그들의 압제 아래에 있는 선민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해방시키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임.

2)    따라서 선민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구원과 세상적인 복을 주시고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선민을 섬기지 아니하면 저주를 내리신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선민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회개를 시키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인 것임.

3)    그와 같은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현세적인 하나님의 복의 독점사상을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음. 그것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장자의 속셈과 같은 것임.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와 구원의 대상이지만 장자인 선민 유대인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 회개와 구원의 대상인 것임.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남과 차남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과(15:12), 영생의 천국의 복을 넉넉하게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충분하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임(15:31).  

5)    요컨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복과 영생의 천국의 복까지 전부 장자라고 하는 선민들이 독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할 것임. 그 점을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신다고 하겠음(15:28-30).

(2)  이방인들이 둘째 아들처럼 그 영혼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그 정체성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선민과 성도는 천국에서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예수님의 말씀(15:32);

1)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한가지 요청을 하심. 그 내용은 이방인들이 둘째 아들처럼 그 영혼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그 정체성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선민과 성도는 천국에서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임(15:32).

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는 것임.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며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임(28:18-20, 22:28-30, 21:17-19, 1:8).

3)    그와 반대로 선민들처럼 못된 장남의 항변과 궤변을 늘어놓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임. 그러한 의미가 제32절 가운데 깊숙하게 내포가 되어 있다고 하겠음.

 

(가나안 등지에서 돼지의 먹이로 또는 흉년의 구황작물로 사용이 되는 쥐엄나무와 그 열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