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2강(눅13: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11월 30일(목)
1.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성전에서 돈을 빌린 이유와 그것에 항의하다가 피를 본 갈릴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대인 두어 사람이 구태여 예수님께 전하고 있는 이유는 각각 무엇인가?(눅13:1)
(1)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성전에서 돈을 빌린 이유;
1)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에서 수로공사를 하다가 자금이 부족하자 예루살렘성전의 당국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함. 수로공사는 공공사업에 해당하므로 예루살렘성전의 관리자들이 성전의 돈을 로마총독에게 지급해준 것이라고 함.
2) 그러나 예루살렘성전에 성전세를 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님.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서 내국세를 거두어서 행정비로 사용하고 있는 로마총독부가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바친 헌금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항의시위를 한 것임.
3) 로마총독부는 그 시위가 로마를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철저하게 진압을 한 것으로 보임. 그 때문에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것으로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임(눅13:1).
(2) 항의를 하다가 갈릴리 사람들이 다친 사건을 구태여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전한 이유;
1) 그런데 문제는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근교의 유대 땅에서 한창 복음사역을 하시고 계시는데 그곳을 찾아와서 유대인 두어 사람이 구태여 최근에 발생한 그 시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임(눅13:1a). 그것도 그 시위의 현장에서 하필이면 갈릴리 사람 몇 사람이 피를 흘린 사실을 예수님과 주위의 회중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떠들고 있다는 것임(눅13:1b).
2) 그 소식을 그곳에서 전하고 있는 그들의 의도는 다음 두가지로 보임; 첫째, 로마총독이 선민 유대인들의 항의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임. 만약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선민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있는 로마총독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임.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준엄한 추궁인 것임.
3) 둘째,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이 설혹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한다면 자신의 고향사람들이 로마군대에 의하여 억울하게 부상을 입었으므로 로마총독을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옳다는 것임.
4) 그 옛날 하나님의 선지자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고 있는 애굽의 황제 바로를 찾아가서 여호와의 뜻을 전하고 동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는데 나사렛 예수님은 어째서 그러한 움직임이 전혀 없는가? 하는 항의의 표시라고 하겠음.
2. 갈릴리 사람이든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별로 구별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3:2-4)
(1) 시위현장에서 피를 흘린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가?(눅13:2)
1)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2);
2) 고대사회의 인과응보의 법칙이 통하지 아니한다고 정확하게 말씀하심.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시위현장에서 그 갈릴리 사람들이 해를 입은 것은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임(눅13:2).
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모든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임(눅13:3, 롬3:9-12).
(2) 예루살렘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가?(눅13:4)
1)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
2) 예루살렘의 실로암에서 망대가 붕괴되어 18명의 사람들이 압사를 당한 적이 있음을 예수님께서 거론하심(눅13:4a). 그때 죽은 18명이 하나님께 숨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눅13:4b).
3) 그때 그곳에서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도 전부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할 죄인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것임(눅13:3).
(3) 결국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인가?(눅13:3)
1)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임;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3) 오십보백보에 해당하는 그러한 상대적인 인간의 의로움으로는 절대적인 선을 요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에게서 율법을 배운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니 그것이 실로 딱한 노릇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이신 것임.
4) 선민들이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를 한다면 그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만 하는 것임.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야 하며(창12:1-5) 예수님처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복을 전해 주어야만 하는 것임(마15:21-28, 요4:10-42, 행1:8).
3. 포도원에 해당하는 선민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무화과 열매가 무엇이며 또한 열매가 없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주고 계시는 기회가 무엇인가?(눅13:6-9)
(1) 어째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있는가?
1) 히브리정경에서 포도원은 선민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임. 특히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음;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5:7a).
2)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음;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b).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눅13:6) 곧 여호와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바라고 있는 무화과의 열매가 여기서 정의와 공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임. 그 깊은 의미는 다음 두가지라고 하겠음;
3)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에게 생계가 어려운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생계수단이 없는 레위인들과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셨는데(신10:18-19) 그러한 사회정의를 실천하지 아니했다는 것임.
4) 둘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고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음(출19:6).
5)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선민우월사상만 내세우고 있지 이방인 구원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다는 것임(마12:39).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엄청난 잘못인 것임. 한 마디로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인 것임.
(2) 포도원지기는 어째서 무화과나무를 잘 가꾸고 그 열매를 주인에게 바치고 싶어하는가?
1)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데 선민들이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음.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원지기로 선민의 사회에 오셔서 그들에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하여 예물로 올려드리라고 강조하시고 계시는 것임(사66:20, 마28:18-20).
3)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게 하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는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과 같은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젖어 있는 자들임. 그렇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심판을 말씀하시고 계심(눅13:7).
4)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음.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남은 인생을 회개하고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임(눅13:8). 그러하지 아니하게 되면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찍혀 나가 영원한 불에 태워지고 마는 것임(눅3:9, 13:9).
4. 예루살렘에 가까운 유대 땅에서 그것도 안식일날 회당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눅13:10-14)
(1) 우호적인 변방 갈릴리와 비우호적인 예루살렘과 유대 땅;
1)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눅13:14);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에서 발생한 일임.
2)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18년된 꼬부랑 할머니를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 병을 고쳐 주심(눅13:10-13). 그러자 그곳의 회당장이 안식일 율법을 강조하면서 그 규정을 어겼다고 대놓고서 회중들 앞에서 예수님과 병자를 한꺼번에 질책하고 있는 내용임(눅13:14).
3) 그에 비해서 갈릴리 지역의 회당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공공연하게 그렇게 대놓고 예수님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있음(눅4:44, 6:6-11). 그 이유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임(눅7:16-17).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으로 말미암아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침 받은 백성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임(눅4:31-41, 6:19, 7:21, 8:2, 8:54-55).
(2) 산헤드린 대공회의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1) 한 마디로, 갈릴리의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유대인들보다 예수님께 대하여 훨씬 우호적이며 개방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임. 그에 비해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공회는 예수님을 처치하려고 공공연하게 노리고 있는 것임.
2)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가 나사렛 예수를 처치하려고 하는 이유는 크게 보아 두가지임; ①첫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유대교지도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선민만의 구원사상 그리고 현세적인 하나님의 축복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임. ②둘째, 예수님의 치유능력이 놀라워서 선민 유대인들이 그 혜택을 많이 받고서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추종하고 있기 때문임.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의 말씀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임.
3) 따라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이 유대 땅에 있는 회당장들과 랍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시킨 것으로 보임; “율법을 위반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잘못에 대하여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크게 질책하고 그가 유대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이단이라고 하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강하게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일에 여러 회당장들과 랍비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기를 바란다”.
5. 일신상의 위험이 다가오는 줄 번연히 아시면서도 18년된 꼬부랑 할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장애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눅13:15-16)
(1) 유대교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경우;
1) 만약 예수님께서 유대교지도자들과 타협하게 되면, 선민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물들어 있는 유대교의 잘못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마는 것임.
2)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선민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에게 돌아가게 됨. 구체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외면하였기에 멸망을 당할 것이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구원의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되어 회개의 기회를 상실한 채 영벌로 들어가고 말 것임.
3) 그와 같은 미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신 바가 있음. 그것이 40일 금식하신 다음에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세가지 시험을 당하여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으로 물리치신 것임(눅4:1-13).
4) 특히 마귀가 자신이 천하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한번만 경배를 하면 그 권세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임(눅4:5-8). 그 이유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 말씀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기 때문임.
(2)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실천하는 경우;
1)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천국복음으로 계속 선포하는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놓아야만 하는 것임.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가 무슨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자신들의 유대교사상과 완전히 다른 만민구원사상을 주장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처치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임.
2) 유대교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풀이하여 받아들이지를 아니하고 이기적이며 현세적으로 말씀을 계속 왜곡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만 함.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의 멸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임. 그러한 불행한 미래를 예방하자면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만 함. 그 방법이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임.
3) 마찬가지로 모든 이방인들도 마치 선민 유대인들처럼 끝끝내 자신들만의 구원과 자신들만의 제국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으므로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장차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임.
4) 그와 같은 결심을 이미 하신 예수님이심. 따라서 본문에서와 같이 자신이 죽음의 위기를 맞이할 줄 뻔히 아시면서도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의 회당에서 그것도 안식일에 18년된 할머니의 꼬부랑 병을 귀신을 쫓아내고서 당당하게 고쳐 주시는 것임(눅13:10-14).
5) 그와 같은 예수님의 결단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이 되고 있는 것임;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5-16). 한 마디로,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의 정신이라는 것임.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여호와의 종인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분명하신 복음의 선포인 것임.
6. 유대교지도자들의 시각과 선민인 백성들의 시각은 어떻게 다르며 만민을 아우르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눅13:17-21)
(1) 유대교지도자들의 시각과 선민 유대인 백성들의 시각의 차이;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13:17);
2) 첫째,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크게 질책을 하고 있던 회당장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듣고서 당장은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것임(눅13:17a).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유대교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처단하는 쪽에 가담하는 세력이 되고 마는 것임.
3) 둘째, 그에 비해서 선민 유대인인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회당장과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시고 18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서 꼬부랑으로 지내고 있는 장애 할머니를 고쳐주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음. 꼬부랑 귀신을 쫓아내고 멀쩡하게 고쳐 주시는 것을 보고서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임(눅13:17b).
(2) 만민구원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특성에 대하여;
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18-21);
2)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말하고 있는 천국복음은 성도들의 심령속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임.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합치하는 구원의 방법인 것임. 그와 같은 하나님나라의 특징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3) 첫째, 하나님나라는 마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서 자신의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나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 같다는 것임. 그 말은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음.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 복음의 씨앗을 얻어야만 한다는 것임.
4) 둘째, 하나님나라의 씨앗은 이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 겨자나무 아래에 많은 새가 깃들 듯이 그렇게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는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임. 마찬가지로 누룩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부풀어올라 모든 가루를 발효시킨다는 것임.
5) 결국 예수님의 비유는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나라의 생명력에 관하여 다음 두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임; ①하나는 복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임. ②또 하나는 그 안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어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며 세상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킨다는 것임.
7. 유대인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기특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주시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눅13:22-30)
(1) 어떤 경우에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며 누룩이 전체 가루를 부풀게 하는가?(눅13:19-25)
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때에 비로소 겨자씨가 자라나며 누룩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임(눅13:18-20, 24). 여기서 ‘좁은 문’은 집주인이 열고 닫는 문이며 반대로 ‘넓은 문’은 종들이 제멋대로 열고 닫는 문을 말하고 있음(눅13:25-27).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가 다음과 같음;
2) 첫째,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하늘에 계신 여호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임(마7:14, 2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종에게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임(눅13:25, 30).
3) 둘째,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임(마7:13). 조금 더 풀이를 해보자면, ‘넓은 문’은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과 현세적인 소원성취에 맞게 왜곡하여 풀이를 하고 있는 것임.
4)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웃의 눈을 의식하면서 영위하고 있는 것임.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인 것임. 예를 들면, 사람들이 보고 있는 회당에서는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면서 그 바깥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 외양간에서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물가에 데려 가서 거리낌 없이 물을 먹이고 있는 것임(눅13:14-15).
(2)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회개하고 고쳐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가?(눅13:14-16, 26-30)
1)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13:22-27);
2) 공생애 전반기에 주로 변방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사역을 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공생애 후반기에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심. 그때 기특하게도 예루살렘 사람이 구원을 받는 자가 적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 오고 있는 것임. 차제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시는 것임;
3) 첫째, 많은 사람들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임.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으로 당장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종교적 교리를 따라가기를 즐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임.
4) 둘째,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만민을 구원하고 영생을 함께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 아니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임. 셋째,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있는 이때가 바로 회개를 하고서 만민구원을 위하여 나서야만 하는 때라는 것임.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천국문이 닫히고 만다는 것임. 넷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만민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한 제자로서의 삶이 없게 되면 결코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임.
5)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13:28-30);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즉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만 하는 것임(마7:5). 그때야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올바르게 보고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임. 그것이 선민 이방인의 구분을 떠나서 누구나 하나님나라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관건이 되는 것임.
8.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많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쫓아내려고 시도하고 있는가?(눅13:31-32)
(1)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책략(눅13:31);
1)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13:31);
2)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바리새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복음과 다른 것임; ①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음. ②둘째, 그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시므로 선민들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시다고 믿고 있음.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는 외세와 주변의 강대국들에 대해서는 멸망의 심판을 내리시며 메시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실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임.
3)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계속되지 못하도록 계략을 사용하고 있음. 그것이 바리새인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지금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명절을 기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는데 나사렛 예수를 체포하고자 획책하고 있다고 넌지시 거짓 정보를 전해주는 것임.
4) 그리하면 나사렛 예수가 단단히 겁을 집어 먹고서 명절 기간에는 다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변방 갈릴리로 되돌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임.
(2) 이미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답변(눅13:32);
1)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눅13:32);
2) 그러한 교묘하기 이를 데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계략이 예수님께는 씨알도 먹히지 아니하고 있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벌써 때가 되면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속죄의 희생양으로 바치고자 결심을 하고 계시기 때문임.
3) 그러므로 그렇게 엉터리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그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시는 것임; “갈릴리에서 온 저 고약한 여우와 너희들의 상전인 더 고약한 대제사장들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하라. 나는 백성들의 연약함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다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제3일의 기적을 너희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눅13:32 의역).
9. 예수님의 답변 속에 들어 있는 임박한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여호와의 만민구원의 뜻을 배척한 선민들과 그들의 예루살렘의 미래는 어떠한 것인가?(눅13:33-35)
(1) 마지막 유월절이 이를 때까지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예수님의 답변(눅13:33);
1)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2) 예수님의 마지막 복음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문장임.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것임.
3) 그와 같은 예수님의 결심과 예언의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에 전한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그들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체포하여 유대교의 적으로 정죄하고 처단하는 방법 밖에는 이제 별 도리가 없겠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추정이 되는 것임(요11:47-53).
(2)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처단하려는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하여(눅13:34-35);
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4-35); 세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문장임;
2) 첫째, 예수님 이전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와서 하나님말씀의 본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했다는 것임. 그러나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말았다는 것임.
3) 둘째,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와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으로 전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임.
4) 셋째, 하나님의 뜻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이익만을 종교생활을 통하여 얻고자 하고 있으므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임. 먼 훗날 그 자손들이 모두 회개하고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이 황폐화될 것이라는 예언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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