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3강(눅14:1-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28. 15:26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3(14: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12 7()

 

1.    예루살렘에서 안식일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하고 있는 바리새인 지도자는 누구로 보이며 그 집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14:1-6)

(1)  안식일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초대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바리새인 지도자는 과연 누구일까?(14:1)

1)    바리새인 지도자라는 표현은 의사 누가가 단 한번 여기서 사용하고 있음.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에서 일체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는 표현임. 그러므로 그 표현은 바리새인으로서 적어도 산헤드린 대 공회원인 율법학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임.

2)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복음사역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바리새인 지도자가 두 사람이 있음. 한 사람은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실이 있는 니고데모임(3:1-2). 또 한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숨기고 있다가 막상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 가시자 대담하게 로마총독을 방문하여 그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루어 준 아리마대 요셉임(23:50-54).

3)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무래도 아리마대 요셉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초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14:1a). 선민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식사 초대한 것이므로 그 자리에는 동료 지도자와 랍비들이 상당수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보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바깥에서 예수님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으로 의사 누가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음(14:1b).

4)    참고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해변으로 가는 통로를 따라서 30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마을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으며 요셉이 그곳의 촌장이라고 함(23:51). 그는 랍비로 이름이 높아 산헤드린 대 공회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임(23:50).

5)    그로 미루어 보아 아리마대 요셉은 다윗가문의 직계인 목수 요셉과 평소에 알고 지낸 인물로 보이는 것임(1:27, 2:44).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이 친척인 나사렛 예수를 예루살렘 자신의 집에 안식일날 식사초대를 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음.

(2)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한 목적은 무엇으로 보이는가?(14:2-4)

1)    첫째, 그 집주인인 바리새인 지도자가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보면, 그것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유명한 선지자 예수님이 자신의 친척이므로 자연스럽게 초청한 것이라고 하겠음.

2)    둘째,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고 다른 바리새인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청해 놓고 그가 어떠한 처신을 할 것인지 시험을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하겠음. 그렇다면, 수종병이 든 사람을 예수님 앞에 배치하고 있는 것도 순수한 목적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14:2).

3)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과연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병자를 고치실 것인지를 직접 알아보고자 하는 것임. 그것은 일종의 염탐과 검증의 절차인 것임.

4)    그렇지만 만약 예수님에게 호의를 지니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식사 초대라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집에 수종병이 든 병자가 있으므로 차제에 예수님께 그 치유를 은근히 부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임.   

(3)  그 자리를 염탐하고 있는 기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대담하게 행동하고 있는 그 바리새인 지도자는 아무래도 유대교의 개혁주의자로 보이는데 그는 훗날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23:50-54, 3:1-3, 19:38-42)

1)    그 집의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이 너무나 당당하게 거리낌이 없이 말씀하시고 또한 치유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리마대 요셉의 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음.

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의도를 알아채고서 차제에 그의 집 식구의 수종병을 고쳐주고자 하시는 것임. 당시 혈관에서 물이 새어 나와서 몸이 붓게 되는 수종병은 불치의 병인 것임.

3)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만 유대교 가운데 힐렐학파에 속하는 인물들로 보임.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의 종교로 굳어진 유대교를 개방하고 개혁하여 로마세계에 전파하려고 하는 힐렐학파의 사람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당시 산헤드린 대 공회에도 진출하여 있었기 때문임.

4)    그 두 사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시신을 로마총독에게서 인수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치룬 바가 있음(19:38-42).

 

2.    안식일날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식사자리에 들어와서 예수님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당시의 불치병자 수종병(dropsy) 든 한 사람은 누구로 짐작이 되며 그는 그 집 주인과 어떤 관계로 보이는가?(14:2-4)

(1)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식사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은 누구인가?(14:1-3)

1)    첫째, 바리새인 지도자인 율법학자이거나 율법선생인 랍비들이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2)    둘째, 그 집의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 그 가운데 아무래도 수종병의 환자는 가족인 것으로 보임. 그 이유는 수종병자가 서기관 또는 랍비로서 그 자리에 참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이 되기 때문임.  

(2)  수종병이 어떠한 병이기에 고대사회에서 불치의 병인가?

1)    수종병은 혈액 가운데 수분성분이 새어 나와서 몸이 붓게 되는 병임. 그러므로 그것은 치유가 어려운 증세인 것임.

2)    고대사회에서는 의학적으로 치유의 방법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고침을 받는 것이 유일한 치유책이라고 하겠음.

(3)  예수님의 치유사역으로 병이 낫게 된 그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14:4)

1)    그 집주인이 가족 가운데 불치의 수종병이 든 자가 있어 안식일에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병자인 자신의 가족을 눈에 뜨이도록 그 앞에 앉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2)    그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 주기를 원하심. 그러나 그 날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안식일이며 그 집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이므로 먼저 랍비들과 바리시인들에게 질문을 하심;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14:3).

3)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대답을 겸하여 질문을 하신 것으로 적고 있음. 그러므로 사전에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음. 예수님의 견해는 다른 복음서에 적혀 있는 내용과 동일한 것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

4)    그 다음 예수님의 행동이 다음과 같음;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14:4-6).

5)    풀이를 하자면 ①첫째,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 곧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댈 수가 없다는 것임(2:28). ②둘째, 그 수종병자를 예수님께서 데려다가 고쳐서 보내어 주었다는 것임. 그러므로 그 병자가 식사자리에 들어와 있었지만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임. ③셋째, 그 다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그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수종병자가 그 집주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음.  

(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어째서 그 불치의 병자를 낫게 하고자 하시는가?(14:5-6)

1)    첫째,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기 때문임. 창조주께서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심. 그것이 한 마디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음.

2)    그와 같은 의미를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4-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3)    둘째,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 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알기 쉽게 백성들에게 선포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심.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의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심. 그러므로 불치의 병자인 수종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이 그러한 복음사역의 일환이라고 하겠음.

4)    셋째,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율법규정의 위반이라고 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14:3, 3:4). 안식일을 제정한 이유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와 같은 목적을 잊어버리고 단지 일하지 아니하고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형식적인 규정이 본래의 안식일 제정의 목적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잘못이라는 것임. 그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 거침없이 바리새인들의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고서 수종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라고 하겠음(14:4).

5)    참고로, 어떤 성경학자들은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가축을 사람을 시켜서 바깥에 데리고 나가 우물에서 물을 먹이는 일을 행하였다고 함. 그러한 사례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들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구해내지 않겠느냐?고 바리새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질문하신 것으로 보임(14:5-6).

 

3.    예루살렘 그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식사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참석한 여러 랍비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광경을 보시고 그들에게 어떠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 뜻은 무엇인가?(14:7-11)

(1)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1)    주전 142년에 맛다디아의 차남인 시몬이 하스모니안 왕조를 건설하자 같은 레위인들 사이에 분열이 발생하게 됨; 사두개인, 바리새인, 엣세네인들이 생겨나게 됨.

2)    마카비 가문이 아론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솔로몬 대왕 때부터 대제사장의 자리를 독점적으로 계승해온 사독의 후손이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스모니안의 왕들은 대제사장의 자리까지 겸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세 파가 갈라져 나온 것임.

3)    첫째, 사독의 후손들에 국한하여 대제사장의 직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두개인들이 먼저 떨어져 나옴. 그들은 외세와 결탁을 하더라도 대제사장의 직위만은 사독의 후손들이 보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임.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인 투쟁을 하는데 바빠서 히브리정경 가운데 모세오경만을 공부하고 있음.  

4)    둘째, 유대교의 교권 및 대제사장의 자리에 연연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히브리정경과 미쉬나 등의 연구에 소홀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바리새인들이 생겨나고 있음. 그들은 기록이 되어 있는 성경과 구전이 되고 있는 성경을 동시에 연구하고 주석을 만들어 그것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철저하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음.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율법선생으로 존경을 받으며 큰 스승으로 상석에 모셔지는 것을 무한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음.   

5)    셋째, 유대교의 교권에 집착하고 있는 사두개인,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면서 존경을 받고 상석을 차지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양쪽이 모두 못마땅하여 광야나 외딴 지역으로 들어가서 고행과 경건생활, 그리고 경전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엣세네인들임.   

(2)  백성들의 존경을 먹고 사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상석의 의미(14:7);

1)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면서 율법학자와 율법선생들을 함께 초청하고 있음. 그러자 서기관과 랍비들이 서로 먼저 상석을 차지하고자 경쟁을 벌리고 있음. 그 광경을 예수님께서 유심히 관찰하신 것임(14:7).

2)    그 모습이 딱하여 예수님께서 알아 듣기 쉽게 한 가지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14:8-10).

3)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백성들이 존경과 높은 자리를 선호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의로움을 적극 주장하고 있기 때문임. 그들은 여호와 말씀의 본뜻에 대한 성찰과 자신들의 외식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대하여 반성을 하지 아니하고 있음.

4)    그 대신에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천국복음으로 밝히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유대교리에 대한 반역자로 정죄하고 처형함으로써 자신들의 상대적인 의로움을 계속 내세우고 율법학자 및 율법선생으로서의 위신과 지위를 유지하고자 열심인 것임.

(3)  이 세상의 높은 자리와 천국에서의 상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14:8-11);

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

2)    이 세상의 높은 자리와 천국에서의 상석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심. 이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희생하고 헌신한 성도들이 천국에서는 큰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임.

 

4.    그 집주인에게 주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14:12-14)

(1)  그 집주인에게 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14:12-14);

1)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이나 형제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12-14);

2)    그 바리새인 지도자가 안식일에 식사초대를 하였는데 그 초청대상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심. 그들은 그 율법학자의 친지와 부자 이웃들인 것임.

3)    그런데 친지와 부자이웃들은 식사대접을 받고서 그냥 있을 사람들이 아님. 그들은 그 다음에 자신들의 잔치자리에 그 바리새인 지도자를 초청하는 것임. 그것이 상류사회의 상호대접(reciprocal treatment)의 방식임.

4)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속적인 give and take에 연연하지 말고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라고 권유하시는 것임.

(2)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첫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이 땅에서의 상급 대신에 천국에 들어가는 영생의 상급으로 갚아 주셨다는 것임.

2)    둘째,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그리고 맹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여주면 이 땅에서 그들이 갚을 방법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신다는 것임.

3)    셋째,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음; “먼저 이 세상에서 고난의 종으로 살아간 그들이 부활하여 의인으로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임.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돌아간 것과 같은 것임(16:22). 부활한 그들 의인들의 요청에 따라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주고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는 것임”.

 

5.    예수님께서 의인들의 부활과 그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한 사람의 랍비가 그에 호응하고 있음(14:12-15). 차제에 예수님께서는 이기적인 유대교의 행태가 어떻게 변하여야 한다고  비유로써 말씀하고 계시는가?(14:16-24)

(1)  끼리끼리 사회문화에 대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14:12-14);

1)    의사 누가가 말하고 있는 바리새인 지도자’(14:1)는 산헤드린 대 공회원이며 랍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율법학자를 말하고 있음. 그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호의적인 극소수의 인물이 있는데 그 정체가 숨어 있는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임(23:5054, 3:1-3, 19:38-42).

2)    그 중에 예수님을 안식일에 자신의 집 식사자리에 초대한 인물은 아무래도 아리마대 요셉으로 보임.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요셉의 가족 가운데 수종병자를 고쳐준 것으로 추정이 됨(14:2-4).

3)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끼리끼리 문화에 대하여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심; “여호와께서는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 그러므로 상류계급들끼리 모여서 돌아가면서 잔치를 하고 서로의 결속을 다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임.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들끼리 주고 받고 모든 계산을 벌써 끝내면서 한평생 서로가 돌아가면서 즐기고 있는 잔치 문화이므로 천국에서는 아무런 크레딧이나 상급이 없다는 것임.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가난한 자와 병자들 그리고 장애자들을 초청하여 먹이고 입히며 사람대접을 해주게 되면 그것이 천국에 적립이 되고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는 영원한 상급이 된다는 것임”(14:12-14 의역).  

4)    놀랍게도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동조를 하고 있는 자가 한 사람 있음. 그 자는 부활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며(23:8)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와 병자 그리고 장애자를 돌봄으로써 천국잔치에 참석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특별한 랍비로 보임(14:15). 그 바리새인 랍비는 아무래도 선민사상과 기득권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를 개혁하여 선민 가운데 가난한 자와 병자들 그리고 장애자들을 구제하고 돌보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힐렐학파의 사람으로 보임.

(2)  그 바리새인 랍비가 믿고 있는 천국잔치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천국잔치는 어떻게 다른가?(14:15-24)

1)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비유를 통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심; 첫째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친지들과 부자 이웃을 초청하였는데 아무도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임(14:16-18a). 그 이유가 세상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세가지 일에 그들이 모두 바쁘기 때문임(14:18b-20).

2)    그 세가지는 이 세상에서 건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임; ①첫째, 열심히 일하여 농사 지을 땅을 사는 것임(14:18). ②둘째, 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도록 소를 많이 사서 투입하는 것임(14:19). ③셋째, 이제 처자식을 먹여 살릴 준비가 되었으니 좋은 신부를 구하는 것임(14:20). 그러므로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하겠다고 하는 그 건실한 백성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겠음. 그러나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모두 돌보며 죽어가는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딱하기 그지없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의 모습인 것임. 그것이 현재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습이라고 하겠음.

3)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유대교를 개혁하자면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끼리끼리 모여서 상호이익을 증대하며 자기들끼리 주고 받고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이기적인 문화를 벗어나서 생계의 위기에 빠져 있는 이웃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것임. 그리하면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신다는 것임. 그것은 기독교의 개혁의 방향과도 일치하고 있는 말씀임. 놀랍게도 그 점에 대하여 그 바리새인이 동의를 하고 있음(14:15).  그 점이 중요하기에 예수님께서 두 차례 꼭 같이 말씀하시면서 강조를 하심; “애초의 초청대상을 바꾸어서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앞을 못 보는 맹인, 다리를 저는 자 등을 잔치에 초청하라는 것이며(14:13) 실제로 비유 가운데 주인이 그렇게 조치하고 있다는 것임(14:21)”.

4)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 랍비가 미처 모르고 있는 유대교의 개방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으로 전파하고 계심.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선민 유대인들이 모두 받아 들이고 세계선교에 나서지 아니하게 되면 유대교의 미래는 없다는 것임. 그러한 취지를 비유 가운데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고 계심;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이방인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선민들은, 8:12)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2-24).

 

6.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이 현세에서 무엇을 추구하였기에 하나님의 진짜 천국잔치 초청을 거부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자리를 이방인들이 대신 채우게 되는 이유를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가 있는가?(14:12-24)

(1)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이 현세에게 추구하고 있는 것;

1)    첫째,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해방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이방나라에 대해서는 진노와 재앙과 멸망을 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믿고 있는 것임.

2)    둘째,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율법에 따른 안식일과 할례 그리고 여호와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성전과 그 앞에서 매년 드리는 대 속죄일의 제사는 모두 선민들의 것이며 선민들만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제도라는 것임.

3)    셋째, 선민들이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와 제례의식에 충실하면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변의 이방인들을 물리치시고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여 주신다는 것임. 그것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세상에 선민을 통하여 떨치게 되는 이른바 시온의 영광이라는 것임.

4)    넷째, 여호와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의 대상이므로 선민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거나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임(1:1:3, 4:1-3).

(2)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시는 것;

1)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마냥 젖어 있는 것임.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은 온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자신들만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율법사상과 메시아사상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임.  

2)    그러한 선민 유대인들의 믿음과 상상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그 사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①첫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이므로 선민과 성도들은 선민과 이방인 구별을 하지 말고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와 위기에 처해 있는 자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임(10:33-37, 25:40).

3)    ②둘째, 이 세상에서 상급을 모두 받으려 하지를 말고 천국에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 보라는 것임.

4)    ③셋째, 만민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똑똑하게 기억하라는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지 말고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정확하게 가르쳐주라는 것임.

 

7.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쫓겨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22:11-14, 14:25-27, 22:28-30)

(1)  예복을 입지 아니하게 되면 천국잔치에서 쫓겨나게 됨(22:11-14);

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구원의 복음소식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예수님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감)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1-14);

2)    하나님께서는 생존의 위기에 빠져 있는 자들을 전부 구해주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전해주기를 원하시고 계심. 그것은 마치 천국잔치 자리에 생계의 위험에 처해 있는 가난한 자와 병자들 그리고 장애자들이 모두 들어오고 이방인들까지 모두 들어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14:21-23).

3)    그런데 문제는 천국잔치 자리에 들어온 손님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한가지를 점검하신다는 것임. 그것이 예복이라고 알기 쉽게 마태복음 제22장에서 위와 같이 적시를 하고 있음(22:11-14). 그리고 의사 누가는 그 속뜻을 풀어서 제14장 제25-27절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음.

(2)  예복과 예물의 의미에 대하여(22:11-14, 28:18-20, 66:20);

1)    첫째, 가난한 자, 병자, 장애자들이라고 하여 무조건 천국잔치에서 끝까지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님. 그리고 이방인이라고 하여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님(22:11-14).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예복이며 그 두번째가 예물인 것임.

2)    둘째, 예복의 의미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삶이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으로 얼마나 변화가 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음.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공생애를 살아가며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간 그것이 예복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음(18:18-20).  

3)    셋째, 예물의 의미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고 원수와 같은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가 자신을 얼마나 희생하고 헌신했는가를 말하고 있음. 일찍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고난과 환난을 무릅쓰면서 희생하고 헌신한 그것이 성도들에게도 있어야만 한다는 것임. 그렇게 대속의 삶을 살아갈 때에 구원의 열매가 포도와 같이 열리며 그것을 기쁘게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다고 하겠음(66:20).

(3)  성도들이 예복과 예물을 준비하자면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14:25-27, 22:28-30)

1)    첫째,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진심으로 회개를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음. 그것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마치 제사장의 예복처럼 그 부끄러움을 가리워준다고 하는 것임(28:42-43). 그러므로 천국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확인하고 계신다고 하겠음.

2)    둘째,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남은 인생을 살아간 증거가 필요함. 그것이 예물로 나타나야만 함. 예수님의 경우에는 자신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는 박해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그리스도이심. 그러므로 성도들도 이방인들과 박해자들을 끝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대속의 삶을 살아간 증거가 있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이 세상에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에 예물로 올려드리는 성도의 고난의 삶인 것임.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제22장에서 다음과 같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심;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4)  본문에 대한 풀이(14:25-27);

1)    그와 같은 의미를 여기서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5-27);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그 내용이 다음 세가지임;

2)    첫째, 자기 집안과 친지와 민족을 넘어서서 세상만민을 동일하게 구원하고자 하는 성도가 되라는 것임.

3)    둘째, 이기주의와 현세주의를 넘어서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추구하라는 것임.

4)    셋째, 박해자와 원수까지 구원하고자 대속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고난 가운데 끝까지 감당하고자 하는 성도가 훗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임(22:28-30).

 

8.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써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범하게 되는 두가지 잘못은 무엇인가?(14:28-33)

(1)  망대를 세우다가 도중에 중단하게 되는 이리석은 자가 됨;

1)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14:28-30);

2)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재화로 그 공사를 완공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계산해보아야 한다는 것임. 재화가 부족하다고 하면 사전에 빌려와서 건설공사에 들어가는 것이 순리라고 하는 것임.

3)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곧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사람들의 재화를 가지고서는 완성을 할 수가 없는 프로젝트임.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하는 것임.

(2)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됨;

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1만명으로써 저 2만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1-33);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는 구절임;

2)    첫째, 성도가 자신의 힘으로 적들을 상대하려고 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임. 왜냐하면 적대세력은 그 배의 힘과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적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임(6:12-13).

3)    둘째,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적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시도를 아예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임. 지혜가 있는 자라고 하면 자신의 능력이 1만이라고 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2만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고 하는 것임.

4)    따라서 빨리 하나님과 화해를 하고서 그 힘과 지혜를 빌려서 남은 인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임. 그러한 성도가 천국잔치의 자리에 끝까지 참여할 수가 있는 주님의 제자인 것임.

 

9.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끝까지 그 소금의 맛을 변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14:34-35)

(1)  소금이 좋은 것이지만 그 맛을 잃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14:34, 5:13)

1)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2)    의사 누가 역시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4:34).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면서 수종병자를 고치시고 또한 천국잔치에 대한 말씀까지 비유로 하신 다음에 수많은 무리와 길을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임.

3)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다분히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임; “율법을 오래 연구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역할은 마치 소금과 같이 귀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짠맛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풀이하여 그대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민 유대인들의 이기적이고도 현세구복적인 목적에 맞추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풀이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온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을 전하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처럼 천국복음으로 가르쳐주어야 하는데 그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로 함께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지고 있으니 그들의 가르침 속에 소금의 짠맛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14:34 의역).

(2)  소금을 버리지 아니하자면 어찌해야 하는가?(14:35)

1)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14:35);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면 참으로 쓸모가 없는 것임. 땅에 그냥 버리게 되면 토질만 나빠지게 됨. 따라서 깊이 파고서 깊숙이 묻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임. 그것은 영벌에 처해버리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되고 있다고 하겠음(22:13).  

2)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소금이 계속 짠맛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임.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겠. [s1] 따라서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이 선민사상에 맞추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왜곡하지를 말고 창조주 여호와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에 비추어서 말씀을 다시 연구하여야 하는 것임. 그 작업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1:12-13).

3)    그리하면 마치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지니고 계심을 환상 가운데 보고서 회개를 하였듯이 그러한 변화가 바리새인들에게도 발생하게 되는 것임(9:1-22).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과 그 일을 성취하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아들의 희생을 인정하게 되면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임(14:16-20, 1:8, 2:1-4, 16:6-7).

4)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삶이 바로 소금을 영원히 짜게 만들어줄 수가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겠음. 실제로 회심한 이방인 사도 바울의 일생이 그러한 것임(8:1-4, 31-39).


 [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