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7강(눅18:1-4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년 1월 18일(목)
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를 하시며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치를 하시는가?(눅18:1-8)
(1) 원한을 풀어 달라고 계속 기도하는 성도의 사정을 살펴보라고 명령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조치(눅18:1-7);
1) 예수님의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가 다음과 같음; ①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다는 것임(눅18:2). 그는 무신론자이며 권위주의자임. 그러므로 엔간한 사람의 청원에는 귀를 기울이지를 아니하고 있음. ②둘째, 하지만 한 과부가 자신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끈질기게 청원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임(눅18:3). ③셋째, 과부가 자주 찾아와서 귀찮게 하므로 재판관이 그 사정을 파악해보라고 지시를 한다는 것임(눅18:4-5).
2) 그와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기도를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정을 살펴보라고 주님께 지시를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임(눅18:6-7).
3) 따라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음; ①하나는 끈질기게 원한을 풀어 달라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사실관계를 파악하신다는 것임(눅18:1-5). ②또 하나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생기지 아니하도록 공의의 입장에서 관계당사자 모두의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인생을 살아 보신 경험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는 것임(눅18:6-8a, 요5:27).
(2)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는지 주님께서 살피시는 그 ‘믿음’의 특징들(눅18:8, 17:10, 18-19, 21);
1) 창조주께서는 피조물들을 모두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시기를 원하심.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며 판결의 기준임. 따라서 주님을 통하여 그 청원자의 기도 내용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의 형편을 골고루 파악하시는 것임.
2) 요컨대, 그 청원자의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만 한다는 것임. 그 말이 여기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음.
3) 그 ‘믿음’이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미 앞장(章, chapter)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믿음’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바가 있으시기 때문임; ①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일을 종인 자신이 당연히 실천한 것이라고 하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임(눅17:10).
4) ②둘째, 불치의 병을 치유하여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나타났으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임(눅17:17-19). ③셋째, 현세적인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임(눅17:20-21).
2. 바리새인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반면에 죄인인 세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8:9-14)
(1) 바리새인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8:9-12)
1) 첫째로,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멸시하고 있기 때문임(눅18:9).
2) 둘째로, 그 의로움의 근거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율법적 행위이기 때문임(눅18:11-12).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①첫째, 다른 사람들이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여 죄인이 되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의인들이라는 것임(눅18:11a).
3) ②둘째, 세리들 가운데 관세를 거두어서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세관원들이 있는데 그들은 민족 반역자이며 죄인들이라는 것임.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의인들이라는 것임(눅18:11b). ③셋째,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2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여호와께 바치고 있으므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있는 의인들이라는 것임(눅18:12).
4) 셋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임.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앞에 서있는 두려움과 정직한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는 것임. 바리새인들이 과연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도 자신이 의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고 있음.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눈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율법을 잘 지키는 척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임.
5) 그러한 외식적(外飾的)인 바리새인들의 믿음생활로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꾸중만 듣게 되는 것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시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39-42).
(2) 죄인인 세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8:3-14)
1) 세리는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심히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서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있기 때문임(눅18:13).
2) 이방인 사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은 과거 바리새인들 가운데 바리새인인 랍비였음. 그 옛날 랍비 사울은 당연히 율법선생으로서 바리새인인 자신이 의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행8:1, 빌3:5-6).
3)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 음성을 듣고서 그만 그의 신념체계가 모두 무너지고 말았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
4)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한 기도가 있기에 죄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긍정적인 응답을 받고 있는 것임(눅18:13-14).
3.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자면 어찌해야 하는가?(눅18:15-17)
(1) 부모의 손에 끌려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에 나온 어린아이들(눅18:15);
1) 사람들이 어린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음;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눅18:15a).
2) 여기서 예수님의 만져 주심이란 두가지를 의미하고 있음; ①하나는 그 어린 아기의 장래에 대하여 축복의 기도를 해주시는 것임. ②또 하나는 질병과 장애를 치유해주시는 안수기도인 것임.
3) 그런데 어른들에 대한 치유사역만을 하는데 있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으므로 어린 자녀들까지 데리고 나온 백성들을 보고서는 그만 짜증이 나고 있음. 따라서 그들을 꾸짖고 있는 것임(눅18:15b).
4)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 다르심. 그 이유를 본문 제16-17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앞장에 수록이 되고 있는 “나병환자 10명 가운데 한사람”(눅17:15-19)의 교훈과 절묘하게 그 의미가 통하고 있는 것임.
(2) 어린아이들에게서 예수님은 무엇을 발견하고 계시는가?(눅18:16-17)
1) 첫째,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선입견이 없음. 그러므로 누구나 동무가 되고 순수하게 받아 들임.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선민구원사상과 현세적 축복이라고 하는 강한 선입관을 가지고 여호와의 역사와 메시아의 사역을 바라보고 있는 것임.
2) 바리새인들은 과연 나사렛 예수가 그들의 선민사상을 지지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줄 것인지에 정치적인 관심을 우선적으로 두고 있는 것임. 그렇지 아니하면 배척하고 처형해버리려고 함.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전혀 그러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아니하다는 것임. 어린아이들은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을 받고 영원히 동무가 되어 함께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임.
3) 둘째, 어린아이 시절의 놀라운 체험은 평생을 좌지우지하게 됨.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축복의 기도를 해주신다거나 혹은 자신의 질병과 장애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 주신다고 하면 그 체험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놀라운 감동으로 평생 그 어린아이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임.
4) 그런데 어른들은 그러한 감동이 없으며 그러한 영적인 체험이 그들의 남은 인생을 지배하지도 못함. 그 이유는 여호와는 무조건 선민들에게 복을 주시고 질병과 장애를 고쳐 주시며 이방인과 외세를 쳐부수고 선민의 제국을 만들어 주시는 그러한 존재여야만 한다고 하는 선입견과 기대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임.
(3) 선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사람이거나 갈릴리 사람이거나 모두 예수님께 복음사역의 은혜를 입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늘 그렇게 바라고 살면서 실제로 그러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데 익숙해져 버렸기에 이제는 생경한 놀라움과 동경심,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와 그 종으로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각오 등이 벌써 사라지고 없는 것임. 그 점에서 그들은 무감각한 9명의 나병환자와 같다고 할 수가 있음(눅17:17).
2) 둘째, 선민으로서 당연히 그들은 여호와와 메시아에게서 선민에 대한 치유와 구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얻어서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임. 따라서 그러한 복을 주시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들이 섬길 필요조차 없는 가짜 하나님이나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출17:7).
3)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하심이 너무나 감사하여 자신의 남은 인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각오가 없는 자들이 선민들임(눅17:14-19) 오히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자들인 것임(출17:7).
4. 상대적인 선을 행하고 있는 율법생활과 절대적인 선을 행하고 있는 복음생활과의 엄격한 차이가 무엇인가?(눅18:18-22)
(1) 상대적인 선을 행하고 있는 율법생활의 특징(눅18:18, 20-21);
1)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8:18),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눅18:20-21);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념이 다음과 같음;
2) 첫째, 선지자인 나사렛 예수가 ‘선한 선생님’이라는 것임(눅18:18).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할 수가 있으면 선한 선생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관념임.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영생의 존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임(롬7:21-25). 한 마디로, 세상적인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고 하는 일종의 상대적인 선함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임.
3) 둘째, 계명을 잘 지키면 선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관념임.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모두 지킨 것이지 그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앞에서는 그러하지가 아니하기에 자신의 영생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는 것임. 그것은 산헤드린 대 공회원인 니고데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요3:1-5).
4) 참고로, 예수님 당시는 선민 유대인들의 나라가 없으며 로마제국의 속국으로서 총독부의 군정과 헤롯 왕가의 위탁통치를 받고 있음.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과 사마리아 지역에 있어서는 로마총독이 지배를 하고 갈릴리 지역과 그 동쪽과 북쪽에 있어서는 로마황제의 위임을 받은 헤롯의 분봉 왕들이 선민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임.
5) 다만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자치권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 공회가 행사할 수 있도록 로마황제가 허락하였기에 대 공회에 약간의 유대인 관리가 있으며 기타 로마총독부와 헤롯 왕가 그리고 세관과 세무서에 유대인 관리가 일부 종사를 하고 있는 정도임. 그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유대인 젊은이는 어디에 소속이 된 관리인지 알 수가 없음. 오히려 그는 관리라기보다는 젊은 부자인데 그 이유는 부모로부터 높은 신분과 많은 재산을 상속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임(눅18:22-23, 마19:20-22).
(2) 절대적인 선을 행하고 있는 복음생활의 특징(눅18:19, 22);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18:22);
2) 첫째,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처럼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임(눅18:19). 자신이 먼저 살기를 원하고 있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임.
3) 둘째,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목숨과 육신 그리고 재산까지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음. 그러나 그것은 그 실(實)소유자가 창조주이신 여호와이시기에 그 앞에서는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임(눅18:22).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것에 대한 영원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신앙인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임. 따라서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보다도 자신의 것이라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것이므로 그 말씀의 뜻에 따라 사용을 하고 한평생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결심이 반드시 필요함(눅18:22a).
5) 한 마디로,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인 것임. 그렇게 주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재물이 주어지며 하나님나라에서 더 큰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임(눅18:22b).
5.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받자면 어찌해야만 하는가?(눅18:23-30)
(1) 큰 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기가 힘든 이유에 대하여(눅18:23-25);
1)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18:23-25);
2) 고대 성곽에는 두 짝으로 된 성문이 있음. 낮 동안에는 마차와 짐을 가득 실은 낙타들이 그 대문으로 통과를 하고 있음. 그러나 밤이 되면 성문을 쇠빗장으로 닫고 다만 대문 아래에 별도로 설치가 되어 있는 작은 문으로 사람들이 통행을 할 수가 있음. 그 작은 문을 ‘바늘귀’라고 부르고 있음. 낙타는 짐을 실은 채 그 작은 바늘귀 문을 통과할 수가 없기에 반드시 짐을 모두 부리고 나서 몸을 작게 하여 통과하는 것임.
3)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영생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천국의 작은 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그 바늘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먼저 여호와의 뜻에 따라 그 재물을 사용하고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여 그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것임.
4) 그런데 실제로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시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가 세가지임; ①첫째, 고대사회는 신분사회이기 때문임. 가문과 재산이 그 사람에게 합하여 하나의 개인의 신분을 형성하고 있음. 그러므로 그 신분을 버리고 가난뱅이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임. ②둘째, 재산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임. 남의 종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임. ③셋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도 그 보상을 해주신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기가 힘이 들기 때문임(눅18:30).
5) 요컨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생계가 어려운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현실적인 요구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 현실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영적인 것이며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임. 그러므로 불확실한 미래의 약속만을 믿고서 현재의 재산을 모두 처분할 수가 없는 것임.
(2)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성도들은 어찌해야만 하는가?(눅18:26-30)
1)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26-30);
2) 첫째, 사람의 결단으로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나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는 그러한 큰 결심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임. 더구나 큰 부자인 경우에는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를 못한다는 것임(눅18:23-25).
3) 둘째, 그렇다면 큰 부자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역사를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임(눅18:26-27).
4) 셋째, 실제로 베드로의 말과 같이 사도들의 경우에는 부모와 형제를 떠나고 또한 재산을 돌보지 아니하고 지난 3년간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사역에 참여를 하고 있음.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상이 다음과 같이 임하게 된다는 것임;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30). 사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는 주님의 약속인 것임(눅18:29).
6. 선지자들이 히브리정경에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시는가?(눅18:31-34)
(1) 상대적인 선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을 행하고 사람들이 영생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눅18:26-27, 29-30);
1) 상대적인 선을 벗어나서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앞에서 생명을 살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음; ①첫째,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정직한 신앙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것임.
2) ②둘째, 그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임.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가르침과 그 일생을 본받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임. ③셋째, 사람의 능력으로써는 그와 같은 여호와의 절대적인 생명살림의 선을 행할 수가 없음. 그 이유는 이기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육신을 지니고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의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간구의 내용인 것임.
3) 넷째, 자신의 몸과 신분 그리고 재산 등이 모두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므로 두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임; ①하나는 그 소유권과 처분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 ②또 하나는 여호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재산을 생계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 나서는 것임(눅18:22).
4) 이상 4가지를 실천하기에 무척 어려웠으므로 선민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평강과 영생 구원에의 확신이 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 그래서 니고데모나 부자청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방법을 묻고 있는 것임. 그러나 그들도 재산 때문에 그리고 높은 신분 때문에 선뜻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지를 못하고 있는 것임(눅18:23-25, 요3:1-10, 19:38-42).
(2)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자들이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눅18:31-34)
1) “예수께서 12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3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1-34); 그 의미가 다음과 같음;
2) 첫째, 사람이 상대적인 의는 행할 수 있지만 창조주께서 원하시는 공의의 정신의 실천이나 절대적인 생명살림의 의를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육신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임. 그들은 육신적인 삶을 당연시하며 그것을 선과 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의인이며 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이 상대적인 의로움 밖에 행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첫걸음이라고 하겠음.
4) 셋째,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다는 것임. 그 과정에 대한 예언이 위와 같은 것임.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방인인 로마총독에게 넘겨서 처형하게 한다는 것임(눅18:31-32). 그 결과 선민이나 아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한 죄인들이 되고 마는 것임.
5) 넷째,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그 공로로 3일만에 죽음에서 영생의 부활을 맞이하실 것임. 그러한 영적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객관적으로 3인칭을 사용하여,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3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눅18:33)라고 예언하고 계시는 것임.
(3) 마지막 구절의 의미(눅18:34);
1)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
2) 아직 그러한 엄청난 사실이 인류최초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 이른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비밀에 속하고 있음(눅18:34).
3)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이어서 제3일 부활의 아침이 역사 가운데 성취가 되고 나면 그 부활과 영생이라는 구원의 복음이 온세상에 전파되기를 시작할 것임(눅24:46-48).
4) 그때부터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선민 이방인 차별이 없이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절대적인 생명살림이라는 복음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임.
7. 여리고의 맹인 거지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크게 부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눅18:35-39) 예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보시고 그 맹인 거지의 소원을 더 크게 들어 주시는가?(눅18:40-43)
(1) 여리고의 맹인 거지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큰 소리로 부르고 있는 이유(눅18:35-39);
1)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데,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18:35-39);
2) 첫째, 여리고 성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맹인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마가복음에 적혀져 있음(막10:46). 아직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소년으로 보임. 그 젊은이는 평생의 소원이 맹인신세를 면하는 것임(눅18:41). 눈만 뜨고 사물을 바르게 볼 수만 있다면 새로운 인생,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
3) 둘째, 맹인신세를 면하게 해줄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가 메시아 예수라고 믿고 있음. 그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 성을 지나가고 계신다고 하는 것임(눅18:36-37).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잠잠할 수가 없는 것임. 힘을 다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 39)라고 목이 터지도록 계속 외치고 있는 것임.
4) 셋째, 맹인이기 때문에 거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포착한 것이므로 결코 주위의 제지와 따가운 시선에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것임(눅18:39). 오로지 그 맹인 거지가 소원하고 있는 것은 하나 뿐임. 맹인신세를 면하고 자신도 한번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임.
(2)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그 맹인 거지의 소원을 더 크게 들어주고 계시는가?(눅18:39-43)
1)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눅18:40-43);
2) 첫째, 너무나 익숙한 질문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생소한 질문임. 왜냐하면, 맹인 거지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고 계시기 때문임. 바디매오는 실로 당연한 듯이 보기를 원한다고 답하고 있음. 그런데 그 단순하고 정직한 대답을 예수님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겠음.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메시아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임.
3) 둘째,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인 눈을 떠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님,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여과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메시아가 그것을 달성해주기를 소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두가지임; ①하나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 달라고 하는 것임. ②또 하나는 주변의 이방인들이 선민들의 종이 되며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주변의 속국들이 모두 시온의 영광을 찬양하고 조공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모여 드는 것임.
4)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그러한 소원을 결코 들어 줄 수가 없는 것임. 그 이유는 두가지임; ①하나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선민과 이방인 구별을 하지 아니하고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기 때문임. ②또 하나는,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모범을 보여주고자 했으나(창12:1-5, 출13:1-2, 19:4-6) 하나님의 그 뜻을 선민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임(눅11:29-32).
5) 결국,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바디매오의 사례를 통하여 앞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배우라고 하시는 것임. 부디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눈을 뜨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임(눅18:41-43). 그것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씀이신 것임.
(큰 성문 아래에 있는 바늘귀라고 불리는 작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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