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28강(눅19:1-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년 1월 25일(목)
1.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세관이 존재하는 이유와 세관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9:1-4)
(1)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세관이 존재하는 이유(눅19:1);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19:1)는 기록은 예수님의 목적지가 여리고가 아니라 그곳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
2) 예루살렘 인근의 지도를 보면 동남쪽 산기슭 사이로 난 길이 있는데 그 이름이 ‘여리고로 가는 길’임. 참고로 그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민박동네가 바로 베다니임. 그 길을 따라서 동북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여리고에 이르게 됨. 그 여리고는 요단 강을 건너오게 되면 만나게 되는 관문과 같은 위치임.
3) 따라서 그 옛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그토록 애를 썼던 것임(수6:1-20). 그곳을 점령하여야 안심을 하고서 가나안 땅으로 진격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임. 그와 같이 요단 강을 건너오는 대상들의 물동량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반드시 여리고를 지나게 됨. 그러므로 여리고에 가장 큰 세관을 설치하고 있는 것임.
4) 로마제국에서는 속국의 통치에 있어서 세무서에서 거두는 국내세는 속국의 통치자들이 알아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지만 반드시 세관에서 거두는 관세만은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제도화하고 있음. 그에 따라 세관원들은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민족반역자라고 불리며 죄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임(눅5:27-29, 19:7).
(2) 세관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이유(눅19:2-4);
1)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2-4); 삭개오가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기어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고자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 첫째, 삭개오는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지 몰라도 지위가 높은 사람임. 가나안에서 가장 큰 관세청의 기관장이기 때문임. 그러한 그가 선지자 또는 메시아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을 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삭개오는 평생을 몸바쳐 여리고의 세관에서 일하여 이제 세관장의 지위에 올라 있지만 자신을 매국노라고 멸시하고 있는 동족들의 시선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임. 자신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에서 정직하게 세관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관리에 불과한데 그 관세가 모두 로마황제에게 바쳐진다고 하여 자신까지 민족 반역자이며 죄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고 있는 것임.
4) 셋째, 그러한 때에 동족들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두가지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①하나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로마의 군정과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자고 하는 열심당의 움직임임. ②또 하나는 선민 유대인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로마제국을 물리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사자인 메시아를 기다리자는 흐름임. 그 메시아가 세례 요한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소문이 파다한 것임.
5) 넷째,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사렛 예수가 3년 동안 갈릴리 일대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이제는 남하하여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서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활발하게 하고 계시지만 결코 선민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일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임. 그 점이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는 궁금한 것임.
6) 구체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과연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메시아로서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자 하실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그러한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온세상의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그 점이 삭개오는 내심 궁금한 것임.
7) 한 마디로,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선민 유대인에게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삭개오 자신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기 때문임.
2. 여리고를 통과하시는 예수님에게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들을 피하여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9:3-4)
(1) 여리고를 통과하시는 예수님에게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고 있는 이유(눅19:3);
1)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여리고 성을 통과하고 계시는 나사렛 예수님을 보고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있음(눅19:3). 그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할 수가 있음;
2) 첫째,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사역의 소문 때문임. 어떠한 병자와 장애자도 예수님께서 모두 고쳐 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어 주셨다는 것임. 그러므로 너나 없이 잠시라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의 약한 육신을 고침 받고 싶어하는 것임.
3) 둘째, 예수님의 말씀사역이 특이하여 그의 주장이 선민 유대인들의 전승과 유대교의 교리에 맞는 것인지 여부를 알고자 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있음. 그러한 유대교지도자들 가운데 특히 바리새인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임.
4) 셋째, 열심당원들도 예수님께 관심이 많으며 실제로 어떤 자는 셀롯인 시몬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니고도 있음(눅6:15).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그 능력으로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물리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임.
(2) 무리들을 피하여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9:3-4)
1) 첫째,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의 인상착의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음. 그러므로 많은 무리들이 그를 보게 되면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삭개오는 가급적 그들을 피하고자 하는 것임.
2) 둘째, 안전하게 멀리서 여리고 성을 통과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봄철 나뭇잎이 그리 많지 아니한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것임. 그러므로 삭개오의 선택은 돌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것임(눅19:4).
3) 셋째, 선지자 또는 메시아로 알려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큰 기회인지라 세관장 삭개오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예수님 가까이 직접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고도 볼 수가 있음. 그렇지만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인지라 군중을 뚫고 나가기도 힘이 들고 또한 키가 큰 사람들 뒤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도 없는 실정임. 그러므로 자연히 나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가 있음.
4) 실제로, 의사 누가의 이 대목 표현이 그러한 것임;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3-4).
3. 나무 위의 삭개오를 찾으시며 그의 집에서 묵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며 삭개오와 선민 유대인들의 반응은 각각 어떠한가?(눅19:5-7)
(1) 나무 위의 삭개오를 찾으시며 그의 집에서 묵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눅19:5)
1)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한 마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오신 목자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대목임(눅1-7). 예수님의 의도를 중심으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함;
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들이나 제국의 앞잡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는 세관장이나 똑 같은 죄인들인 것임. 다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을 뿐임;
3) 첫째, 바리새인인 경우에는 백성들 보기에 상대적으로 율법생활을 더 잘하고 있다는 그 자긍심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임(눅18:11-12). 따라서 여호와 앞에서도 자신들은 의인으로 설 수가 있으며 자신들이 아니면 누가 구원을 얻겠느냐고 하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음(롬10:5). 그러나 그 문제점을 훗날 사도 바울이 잘 요약하고 있음(롬10:1-3).
4) 둘째, 삭개오와 같은 경우에는 백성들로부터 민족반역자인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눅18:13). 따라서 이 불쌍한 죄인에게도 부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구원의 기회를 달라고 마음속으로 회개를 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임. 요컨대, 그와 같은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의사 누가에 의하여 수집이 되고 또한 기록이 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18:9-14)인 것임.
(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와 선민 유대인들의 반응(눅19:6-7);
1)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19:6-7);
2) 첫째, 삭개오는 크게 즐거워하고 있음(눅19:6). 그는 쾌히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잘 대접을 하고 싶은 것임(눅19:5). 그 옛날 아브라함이 헤브론 자신의 장막 앞에 현신하신 여호와를 영접하고 기쁜 마음으로 대접을 하고 있는 장면과 같은 것임(창18:1-8).
3) 둘째, 삭개오는 비록 세관에서 평생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동족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것이 아닌 것임. 그는 동족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최대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눅19:8b) 장차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눅19:8a). 그러한 자신의 내심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불러 주시고 숙식을 함께 하시자고 하시니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르는 것임.
4) 셋째, 그에 비해서 여리고의 주민들은 “선민들은 모두가 의인, 이방인들은 전부 죄인”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이분법에서 전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음. 선민 유대인들을 돕는 자들은 무조건 의인들이며 자신들에게 손해를 나게 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죄인들로 규정하고 있음. 따라서 외세 및 그들의 손발이 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죄인들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진노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음. 그런데 선지자 예수가 죄인인 세관장의 집에 식사를 하러 들어가겠다고 하니 그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아니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임.
4.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대접하면서 삭개오가 밝히고 있는 결심은 무엇이며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눅19:8-10)
(1)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대접하면서 삭개오가 밝히고 있는 결심은 무엇인가?(눅19:8)
1)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을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삭개오가 다음과 같은 뜻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음;
2) 첫째, “여짜오되”(눅19:8a)라고 번역하고 있는 이유는 삭개오가 식사 도중에 일어나서 “보시옵소서, 주님!”이라고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임. 어째서 한국어 성경에 그렇게 묘한 글귀 “여짜오되”라고 적고 있는지 그것이 사실은 흥미로운 것임.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식사보다는 먼저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을 천국복음으로 설명하고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며 그 일을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가신 것임.
3)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삭개오가 식사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서 벌떡 일어나 여기서 “여짜오되”로 말문을 열고 있다고 하겠음. 삭개오는 자신이 결심한 대로 그렇게 실천을 하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지 그 점을 예수님께 여쭙고 싶은 것임.
4) 둘째, 예수님께서는 그 전에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영생의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면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임(눅18:22). 그 말씀을 들은 삭개오가 자신의 결심을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을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b)라고 밝히고 있는 것임.
5)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재산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눅18:22)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눅19:8). 그것으로 되는 것일까요? 그 대신에 착복한 재산에 대해서는 절도의 경우 2배의 배상인데(출22:4, 9) 그는 4배의 배상을 말하고 있음. 그렇게 보완하면 되는 것인지 사실은 그 점이 관심거리인 것임.
(2)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눅19:9-10)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
2) 첫째,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결심을 좋게 받아들이심. 그 정도의 결심만하고 그대로 실천을 하더라도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답을 주신 것임(눅19:9a).
3) 둘째, 삭개오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은혜가 그의 집식구들에게 모두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신 것임(눅19:9a).
4) 셋째, 삭개오와 같은 결심을 하고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심(눅19:9).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그러한 결심을 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그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라고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임(눅19:10).
5.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당장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므나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다른가?(눅19:11-12)
(1)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당장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눅19:11)
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눅19:11);
2)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여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함께 듣고 있는 자들은 선민 유대인들임. 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여기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임.
3) 둘째,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그들의 땅에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민들의 오랜 소원을 실현해주는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음. 그 소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는 것임.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시온의 영광이 다시 온세상에 비치게 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임.
4) 그런데 그것은 두가지 큰 결점을 지니고 있는 사상임; ①하나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고방식임. 선민만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므로 주변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역사적인 멸망을 받게 된다는 주장임. ②또 하나는 현세적으로 선민의 제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건해주면 여호와를 계속 섬길 것이고 그러한 세상적인 복을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
5) 만약 그와 같이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선민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이스라엘 제국을 메시아를 보내어 이 땅에 재건한다고 하면 그 즉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은 완전히 훼손이 되고 말 것임.
(2) 예수님께서 ‘므나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제국과 어떻게 다른가?(눅19:11-13)
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10을 불러 은화 10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눅19:11-13); 선민들이 메시아에게 요구하고 있는 이스라엘 제국과 예수님께서 건설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문장임;
2)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의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제국이 하나님의 나라로 건설이 되는 줄 생각을 하고 있음(눅19:11).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심. 구체적으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귀인인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다녀오는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임(눅19:12).
3) 둘째, 자신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자신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대신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눅19:13).
4) 셋째, 멀지 않아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여 제자들을 재교육시키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지상명령을 말씀하심(눅24:44-49, 마28:18-20). 주님의 종들인 제자들이 실천해야만 하는 사명은 선민사회 뿐만 아니라 이방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임. 따라서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지며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것임.
6. 하나님나라의 왕위를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서 올 때까지 그의 종들은 어떠한 수고를 하여야 하며 선민 유대인들은 어째서 그러한 수고를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가?(눅19:13-24)
(1) 하나님나라의 왕위를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서 올 때까지 그의 종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수고를 하여야 하는가?(눅19:15-19)
1) 무엇보다도, 주님의 종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지상명령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임.
2) 따라서, 주님의 종들이 선민 유대인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려고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임.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임.
3) 그와 같은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교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주님의 요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것임(눅24:49, 행1:8). 그 결과 1므나 씩의 종자돈을 받은 종들이 10배 또는 5배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임(눅19:16-19).
4) 참고로, 여기서 ‘므나’라고 하는 그리스의 은화는 431g의 무게를 지니고 있어 헬라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은전임. 그것은 4.3g에 불과한 드라크마의 100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 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의 1드라크마와 로마의 1데나리온의 가치를 같도록 통일하였기 때문에 1드라크마가 예수님 당시 장정의 하루 품삯이 됨(마20:2). 그러므로 1므나는 100일치의 품삯이 되는데 오늘날 선진국의 일당 100불을 대입하면 무려 1만불이 되는 것임.
(2) 선민 유대인들은 어째서 그러한 수고를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가?(눅19:14, 20-24)
1)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아니하고 있음.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재건해주지 아니하는 그러한 메시아는 필요가 없다고 하여 배척하고 처단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교인들임. 그 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그 종 10을 불러 은화 10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눅19:13-14).
2) 따라서 기본적으로 선민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함께 누리자고 하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임.
3) 그에 따라 선민 유대인들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종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음. 다만 그 가운데 일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을 버리고 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고 훗날 예루살렘에 초대교회를 건설하게 되는 것임(요7:5, 행1:14-15, 2:36-47).
4)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장나라가 되라고 하셨는데(출19:4-6) 그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선민 유대인들이 배신하고 만 것임(눅11: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므나를 감추어 두고서 전혀 활용하지 아니한 악한 종의 모습과 같다고 할 것임(눅19:20-26).
7. 종들에게 각각 10달란트, 5달란트, 1달란트 등으로 달리 재산을 맡기고 있다는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와 종들에게 동일하게 1므나씩을 맡기고 있다는 예수님의 ‘므나의 비유’의 차이가 무엇인가?(눅19:12-27)
(1) 달란트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들(마25:14-30);
1) 첫째, 단지 주인이 타국에 갈 때에 자신의 재산을 종들에게 위탁관리를 시키고 있는 것임(마25:14). 재산의 규모가 금으로8달란트인데 그것을 종들의 재능에 맞게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나누어서 맡기고 있음(마25:15).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라고 하는 당부인 것임(마25:16).
2) 둘째,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서 결산을 할 때에 그 기준은 종들이 재능을 발휘하여 두배의 재산으로 불리어 놓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것임(마25:16-17, 20-23). 따라서 그 두배의 재산을 다시 종들에게 맡기고 있는 것임(마25:21, 23).
3) 셋째, 그것은 세상 재물을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잘 활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가 있도록 하였으면 그것으로 좋은 청지기이며 이 세상의 선한 관리자라고 하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음.
4) 넷째, 그러하지 못하고 1달란트를 파묻어 두고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아니한 종에게는 주인의 꾸중과 형벌이 아주 대단한 것임(마25:24-27, 30). 그 재능마저 거두어 버리는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임(마25:28-29).
(2) 므나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들(눅19:12-27);
1) 첫째, 주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왕권을 받으러 가실 때에 그 종들에게 1므나씩의 능력과 축복을 똑같이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임(눅19:1213, 16-20). 그에 따라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는 것임. 그것은 은사나 재능이 아니고 똑 같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명부여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성령님의 임재라고 하는 축복이기 때문임.
2) 둘째, 성도들이 주님의 종으로서 그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제 의견과 뜻을 앞세워서 제멋대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것임. 본문에서는 1므나씩을 받았지만 누구는 10므나를 남기고, 또 누구는 5므나를 남겨서 주님의 칭찬을 받았는데 그 반면에 또 누구는 그 축복을 전혀 사용하지 아니하여 야단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임(눅19:16-26).
3) 셋째, 그 성적에 따라서 주인이 다시 맡기고 있는 것은 1므나의 축복이 아님. 그것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엄청난 권세를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임(눅19:17, 19).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종들이 고난 가운데 복음사역을 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그 열매와 상급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음(롬8:18).
4)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8.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장롱속에 감추어둔 종이 선민 유대인들과 같은 이유가 무엇이며 그들은 어째서 악한 종이 되고 마는가?(눅19:20-24)
(1) 자신들을 선민으로 삼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출19:4-6) 쉽게 잊어버린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태(눅19:20-24);
1)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면서(출19:4-5)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심(출19:6).
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큰 축복으로 함께하시는 이유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인들에게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창조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야만 한다는 것임(창20:7, 21:22). 그것이 1므나씩의 축복을 받아서 열심히 살아가는 종의 모습인 것임.
3)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여호와께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 나아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의 모습이 역사적으로 전혀 나타나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임.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는 곳마다 이방 족속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축복이 흘러 넘치던(창14:14-24, 20:17, 22:16-18, 23:6) 그 놀라운 역사가 그들에게는 발생하지를 못하고 있음(눅11:29-32).
4) 참고로, 사사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배은망덕한 행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음;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5-6).
(2) 만약 선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신실한 종이며 선지자로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어떻게 되고 만다고 예수님께서 므나의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시는가?(눅19:20-27)
1) 첫째, 하나님의 축복을 혼자만 누리겠다고 수건으로 1므나를 꽁꽁 싸매어 둔 종처럼 이기적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주인으로부터 악한 종이라고 하는 질책을 받게 되는 것임(눅19:22).
2) 둘째, 하나님의 축복이란 이웃에게로 흘러가서 함께 누리지 아니하게 되면 마치 출구가 없는 호수물과 같이 썩어서 악취를 풍기게 되는 것임. 따라서 악한 종은 가진 바 하나님의 축복도 빼앗기게 되고 형벌에 처해지는 것임(눅19:26-27).
3) 셋째,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임. 그런데 선민들이 그렇게 여호와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여 그리스도마저 배척하고 있으므로 그 대가는 다음과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임;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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