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59강(렘9:23-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7월 19일(목)
할례를 받은 민족과 할례를 받지 못한 민족들이 전부 멸망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렘9:23-26)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은 선민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까지 전부 여호와의 처벌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렘9:25).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민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방인들의 나라처럼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그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렘9:26).
그렇다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앙생활과 그러하지 못한 신앙생활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렘9:23-24);
(1) 첫째로, ‘마음에 할례’를 받게 되면 자신이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는 종이라고 하는 자각을 그 마음속에 지니게 됩니다(창1&:9-10). 그것은 영원히 주인집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 명령을 수행하며 살겠다고 결심을 한 종에 대하여 상전이 그 종의 귀에 구멍을 뚫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출21:5-6). 그에 따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실한 종은 평생동안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며 그 집에서 모든 일을 주인의 뜻을 따라서 처리를 하게 됩니다.
(2) 둘째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여호와의 종은 세속적인 세가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세가지가 ①세상의 지혜, ②육신적인 용맹함, ③물질적인 부유함 등입니다(렘9:23).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세상적인 지혜를 가진 자가 왕이 되고, 용맹한 자가 장군이 되며, 재산을 많이 가진 부유한 자가 귀족이 되어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여호와의 종은 선민의 나라를 이방인처럼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나라의 주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뜻은 세상적인 지혜와 군사력 그리고 재물로써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고 단지 육체적인 할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육신적인 표징을 자랑하는 율법생활만을 영위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영적인 깊은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이방나라처럼 선민의 나라를 경영하고 맙니다. 그 결과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셋째, 여호와의 종의 가장 큰 의무는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겸손하게 그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명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렘9:24a). 그러므로 ‘명철’이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①하나는, 여호와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와의 종인 자신은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말씀을 듣고 이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여호와의 종이 그 명철함을 따라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 나아가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가르침을 주실까요? 환언하면, 이 세상을 여호와의 뜻에 맞게 경영할 수 있도록 어떠한 지침을 주시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서 성도들에게 세가지를 주신다고 예레미야가 기록하고 있습니다(렘9:24b);
1) 첫째,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자신과 같이 아끼고 돌보라는 것입니다(마5:44-48, 눅10:33-37).
2) 둘째, ‘정의’입니다. 자신이 속하고 있는 그 집단과 사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는 것입니다(마25:40).
3) 셋째, ‘공의’입니다. 이웃나라의 이방인들까지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것입니다(출19:4-6).
(4) 넷째로, 여호와 앞에 서는 명철함이 있는 종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 그리고 공의를 실천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선민들이 행하여야만 하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선민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며(렘9:24c, 롬12:1-2) 그 나라를 영원히 지켜 주십니다(삼상2:30, 왕상9:4-5).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에 선민들이 그와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나라가 이방인들의 나라처럼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렘9:25-2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9:23);
(1)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집단은 셋으로 나누어질 수가 있습니다; ①첫째가 지혜로운 왕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정치를 잘 하는 법입니다. ②둘째, 군대는 용맹한 장수가 지휘를 하여야 승전을 하게 됩니다. ③셋째, 부유한 국가는 부자들이 기업을 잘 경영할 때에 건설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대국가 뿐만 아니라 현대국가에서도 지혜로운 정치인, 용맹한 장군, 국부를 늘리는 부자 등은 칭송의 대상입니다. 그들이 부강한 나라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와 같은 세상적인 지배집단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지혜와 육신적인 용맹함, 그리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하나님 앞에 자랑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세상의 흥망성쇠는 그와 같은 세상적인 가치들에 의하여 좌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뜻대로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원칙에 입각하여 이 세상을 경영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둘째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렘9:24a); 세상의 리더들은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명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렘9:24a). 지배자들은 세상의 주인이 여호와이시며 자신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겸손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창조주께서 주시는 진정한 지혜와 용기 그리고 영원한 부를 얻어서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4b);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러한 은사는 리더들이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사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오히려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세가지 뜻이 중요합니다(렘9:24b);
1) 첫째가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육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피조물을 자신과 같이 대접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막12:30-31).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 성도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대접을 받게 됩니다(마7:12, 요1:12).
2) 둘째가 ‘정의’(正義, justice)입니다. 자신이 속하고 있는 사회와 집단에서 약한 자를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생계가 어려운 자, 살아가기가 힘든 자를 여호와의 가장 작은 형제로 여기고서 주님의 이름으로 돌보는 것입니다(마25:40).
3) 셋째가 ‘공의’(公義, righteousness)입니다. 집단 이기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집단과 사회에 속하고 있는 사람을 돌보고 살 길을 마련해주는 것이 공의입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정에서는 정의의 법에 따라 심판을 합니다. 그와 달리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하는 판결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11:1-5).
(3)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9:24c);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진 그 사랑의 빚은 갚는 행위는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 가운데 생계가 힘들고 살아가기가 막막한 자를 돌보는 것은 자신의 재산과 시간이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웃나라의 백성들까지 돌본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실천하는 성도들을 보시고 참으로 기뻐하십니다(렘9:24c). 따라서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간 여호와의 종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나라에서 놀라운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마25:45-46, 눅22:28-30, 요13:32).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d);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하였듯이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여호와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공의는 여호와의 종들이 반드시 이 땅에서 실천해야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뜻입니다(롬12:1-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d)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렘9:25-26);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렘9:25); 선민은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롬3:1). 그와 달리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때가 되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이 모두 심판을 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렘9:25). 선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를 그 육체에 할례로 지니고 있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여호와신앙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처벌이 된다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그 다음 구절인 제26절에서 설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족속들에게 대하여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렘9:25). 그러한 맥락에서 예레미야 제25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5:29).
(2)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렘9:26a); 할례를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모두 포함하여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과 그들의 이웃나라 백성들에게 전부 심판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를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들고 계십니다;
1) 애굽; 여호와의 심판의 역사에 있어서 애굽이 가장 먼저 언급이 되고 있는 이유는 출애굽기의 내용 때문입니다. 유월절 사건을 통하여 애굽인들의 가정에서 모든 장자들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출12:29-30). 여호와의 명령을 애굽의 바로와 신하들이 완악하게 거절하였기에 그 땅에 10가지 재앙이 임하고 그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이라는 줄초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 유다;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7:6). 이제 곧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것입니다(왕하25:7). 그렇게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선민들의 나라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차례로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3) 에돔; 이스라엘인 야곱의 형 에서가 에돔 족속의 조상입니다(창36:43). 염해 남쪽 세일 산맥과 그 들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에돔 족속은 일찍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무력으로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암몬 자손; 아브라함의 장조카인 롯의 차남이 암몬입니다(창19:38). 암몬 자손은 몰렉을 주신으로 섬기면서 인신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렘7:31).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 인신제사를 우상에게 바치고 있으니 역사 가운데 사라지는 것입니다.
5) 모압; 롯의 장남이 모압입니다(창19:37). 모압의 후손들은 사해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브올 산에서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장정들을 유혹하여 바알 신을 섬기게 하고 육체적인 음란행위를 한 사건이 유명합니다(민25:1-3).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모압 족속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6)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 살을 일부 자른다고 하는 것은 할례를 받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할례를 받고 있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자손들입니다(창25:1-6). 예를 들면,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그러합니다. 그는 모세의 장인입니다(출2:21, 3:1).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만 할례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출4:25).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그 집의 종들이 모두 할례를 받고 있습니다(창17:10-14, 23-27, 21:4, 25:1-6). 그리고 본문에서는 광야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그 육체에 할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렘9:26a).
(3)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렘9:26b);
1)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있습니다(출19:4-6).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육신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할례의 징표를 가진 자들 가운데 여호와께서 특별하게 선택한 민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망한 다음에는 홀로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선민들은 그 자부심이 더욱 대답합니다. 자신들만이 이 세상에서 할례를 받았으며 선민의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국을 어째서 버리신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렘9:26b). 육신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자신은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매사를 자신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뜻을 따라 실천합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그러한 여호와신앙의 기본자세를 버리고 오직 육체적인 할례의 표시를 구원의 신표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멸망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옛날 모세가 ‘마음에 할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5-16).
같은 맥락에서 훗날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따라서 성도들은 마음에 여호와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리하는 신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자신의 기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끝까지 주님을 모시고 복음전파에 정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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