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50강(렘8:4-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7월 10일(화)
여호와께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선민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시는가?(렘8:4-7)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동족들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1) 첫째로, 새들은 때가 되면 둥지로 돌아오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악을 뉘우치고 여호와께 돌아오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렘8:4-7). 여호와께 돌아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얻고자 하지를 아니하고 그 대신에 우상을 섬기고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전쟁터로 달려가고 있으니 그것이 자멸의 길입니다(렘8:6). 그 때문에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이방인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는 미래를 자취하고 있습니다(렘7:19-20).
(2) 둘째로, 모든 인생이 여호와께 돌아 오도록 알려주기 위하여 여호와의 규례를 백성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렘8:7, 출15:24-27). 그런데 선민들부터 그 규례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제 고집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며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하고 있습니다(렘8:5, 2:17). 즉,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생과 역사의 섭리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불행하게도 선민들이 여호와의 말씀보다는 인간인 자신들의 방법론과 논리를 더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종교가 현세에서 더 쓸모가 있으며 구원의 방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그러한 논리에 빠져 있는 동족들이 그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롬10:1-4).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려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렘8: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렘8:4a);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창조주가 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십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서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두가지의 능력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 구절에서 나름대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2) “사람이 엎드려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렘8:4b); 첫째로,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부활시키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1)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서 생노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라고 하는 삶의 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번 생을 얻으면 이 세상에서 그 존재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처럼 늙고 병이 들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마침내 사멸(死滅)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이며 육신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여기서는 알기 쉽게 “사람이 엎드려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렘8:4ba).
2) 그런데 영생하시는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사람은 육신적인 존재를 뛰어 넘는 영적인 존재로 인식이 됩니다(요11:25-26).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영이시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창1:26-27, 요4:24). ②또 하나는, 흙으로 만든 육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서 인간을 만물이 영장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창2:7).
3) 인간은 그 옛날 아담처럼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창2:8-25, 3:8-10). 따라서 영과 육의 합일체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은 육신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제는 부활하여 창조주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요5:25-29). 그것은 육신을 입고 살아간 동안에 사람의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 것인지 아니면 악한 영과 함께 살아간 것인지를 판별하여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로 분류하기 위한 절차입니다(눅11:20, 22:28-30, 마25:40, 45-46).
4) 그와 같은 절차가 남아 있기에 본문에서는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렘8:4bb)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죽음으로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나지 아니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반드시 부활시켜서 심판의 과정을 최종적으로 거치도록 만드신다고 하는 강한 뜻을 시사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그러한 창조의 능력이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3)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렘8:4c);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창조주가 되시는 여호와의 또 하나의 고유한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때가 되면 그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러한 영적인 귀소본능이 매우 강한 피조물입니다(렘8:4c, 전3:21).
둘째로,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렘8:5-6);
(1) 마지막 남은 선민인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잘못을 여호와 앞에서 범하고 있다고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서 제멋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렘8:5a). ②둘째,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고서 여호와께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렘8:5c, 7). ③셋째, 세상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인생이란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렘8:6d). 조금 더 설명을 해봅니다;
(2) 첫째,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서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버리고 제멋대로 살게 되면 어떠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두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거짓을 진리라고 고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렘8:5b).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정직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렘8:6a) ②또 하나는, 악행을 뉘우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렘8:6b).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이 행한 일을 선한 것이지 아니면 악한 것인지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렘8:6c).
(3) 둘째,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고서 여호와께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아니하며 자신이 행한 일을 여호와의 말씀에 비추어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렘8:6a&b&c). 그러므로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해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롬3:20) 그러한 기능을 아예 배제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극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로마서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4) 셋째, 세상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인생이란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렘8:6d)라고 하는 표현이 절묘합니다. 그것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제각각 여호와를 떠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안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적법한 것이든 위법한 것이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2) 또 하나는, 마지막 해결의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창4:14-17, 21:20, 25:27, 27:40). 힘이 센 자가 힘이 약한 자를 잡아 먹게 되어 있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5) 참고로, 유다 왕국의 수도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예루살렘 백성이”(렘8:5a)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남조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훗날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요4:9).
셋째로,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8: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렘8:7a);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자연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생명체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한번 내린 명령을 그 유전자 속에 깊숙이 새기고서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새와 같은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귀소본능’(歸巢本能, 둥지나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는 본능을 말함)에 따라 정한 시기에 정해진 장소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학적인 ‘상수’(常數, 이미 정해져 있는 수로서 변함이 없음)에 해당합니다.
2) 둘째, 만물의 영장(靈長, 영적인 어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마치 하나의 ‘변수’(變數, 상황에 따라 변하는 수)와 같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어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선택을 하고 그 책임을 지는 자라고 하는 존엄성을 드높이고 있는 용어가 변수의 뜻입니다(창1:26-27). 그러나 그 반대 측면에서는 통제가 어렵다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3) 셋째, 사람은 자연과 달리 제멋대로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뜻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한 세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현세적인 이기주의에 익숙한 육신적인 탐욕이 너무 강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뜻을 따라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영적인 소원이 패배하기가 일쑤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2)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8:7b);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제국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시켜 애굽의 국경 바깥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마지막 10번째의 재앙은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애굽인들의 장자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출12:29-30).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에서는 장자가 모두 삶을 얻고 있습니다(출12:21-24). 그것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크게 위배가 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2) 그렇다면,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훼손하면서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 대목에 대한 여호와의 진술이 다음과 같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5-26).
3) 위의 말씀의 뜻은 출애굽과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인 율법과 규례를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잘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은혜를 배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여호와께서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선민들의 신앙생활을 보고서 그들에게 장차 영생의 구원을 줄 것인지 아니면 영벌의 심판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마25:45-46, 요5:28-29).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신앙생활은 절망적입니다. 여호와께서 규례를 정하신 뜻조차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렘8:7b).
결론적으로,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①하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성도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선민의 역사를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1) 사도 바울이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유일한 구원주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자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의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5-8:2). 동일한 신앙고백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선민들부터 장차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심판을 하십니다.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선례가 되며 타산지석이 됩니다. 선민들의 패망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이방인들도 주의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선민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시는 성도님들의 복음적인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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