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너는 망대와 요새가 되고 은이 되며 놋과 납이 되지 말라(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12. 08:25

제목; “너는 망대와 요새가 되고 은이 되며 놋과 납이 되지 말라”(6:27-30)

설교일; 주후 202271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12일 화요일 작성)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영적이며 지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살아가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4:24, 4:26).

사람이 아무리 창조주 여호와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본질적인 차이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1:26-27).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지만 그 의미의 전달에 있어서 그러한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물질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그 놀라운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생생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당시 백성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건축물과 금속류를 이용하여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6:27-30);

그러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망대요새와 같은 건축물 그리고 , , , 이라는 금속의 특징이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은 금과 마찬가지로 광택이 나고 가공하기가 쉽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좋은 금속이지만 한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오염된 공기에 들어있는 황화합물을 만나게 되면 회색이나 검은색 녹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녹을 제거하자면 소금물이나 우유에 10분 정도 담근 다음에 마른 천으로 잘 닦아주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요령을 모르고 있으면 변색이 된 은을 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금과 은에 비하여 은 단단한 금속입니다. 물론 이 가장 단단합니다. 따라서 선지자 다니엘은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의 꿈 풀이를 하면서 나라, 나라, 나라, 나라의 순서로 지역패권국의 강력함을 나열하고 있습니다(2:32-33, 38-40). 그러한 특징을 반영하여 흔히 사람들이 뻔뻔하기가 놋이나 철과 같다또는 철면피라는 말을 지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3)  철과 비교할 때 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은 가장 녹이 잘 생기는 금속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놋그릇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부인네들은 놋으로 만든 식기류에서 자주 생기는 녹을 제거하기 위하여 잿물을 짚에 묻혀서 박박 문질렀습니다. 그것이 몸에 해로운지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녹이 생기지 아니하는 스테인레스 스틸곧 스덴 제품이 발명되어 사용되기 이전시대에는 그러한 큰 불편함과 주부들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4)  모든 금속은 반감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속이 계속 변화하게 되면 맨 나중에는 무슨 물질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입니다. 흔히 납처럼 무겁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납에 중독이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납이 무거운 중금속이며 맹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귀한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을 풀무불에서 녹일 때에 잘못 납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금과 은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납이 스며들게 되면 못쓰는 물질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악한 누룩이 거룩한 백성을 타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8:15).  

(5)  목축사회에서 양떼나 소떼를 치는 목자들이 두 군데에서 주로 근무하게 됩니다. 가축을 몰고 목초지로 이동하였을 때에는 높은 망대에 올라가서 목자가 파수꾼이 됩니다. 늑대나 사자와 같은 맹수가 접근하는 것을 빨리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얼른 가축을 이끌고 안전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이 맹수의 습격을 막아줄 수 있는 일종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일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백성들이 참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지혜 이전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그 점을 오늘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생생하게 느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한 결과 얻게 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27. 가 이미 내 백성(이스라엘 자손, 19:4-6) 망대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28. 그들은(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 비방하며 돌아다니는(비방거리를 전파하는 자), 그들은 (뻔뻔하기가 마치) 놋과 철이며 다 (목이 뻣뻣한, 32:9) 사악한 자라”(6:27-28);

(1)  27절 전반부에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선택하여 선지자로 삼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27a, 1:1-3). 그런데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할 일이 두가지입니다; 하나가 망대의 역할이고 또 하나가 요새의 역할입니다(27b). 이미 모두(冒頭, 글의 머리부분)에서 말씀드린 그대로 목축사회에서 망대의 역할은 목자가 멀리 보기 위한 것입니다. 가축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자가 높은 망대에 올라가서 사자나 늑대가 침입하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야 합니다(27c).

(2)  그래야 맹수들이 풀을 뜯고 있는 가축 떼에게 달려들기 전에 저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지게 되면 주위가 어두워져서 목자가 높은 망대에서 멀리 살피더라도 맹수의 습격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가축 떼를 몰고 안전한 우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맹수와 같은 그들이 과연 누구일까요?(27c)  흔히 선민 이스라엘은 양떼와 같고 그들을 습격하는 이방인들이 맹수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다음절인 제28절의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3)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의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동족인 선민 유대인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데 대체로 그 내용이 3가지입니다; 첫째, 선민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제는 이방인처럼 우상을 섬기며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하지 아니하면 조국 다윗왕조 유다왕국이 멀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셋째,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빨리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서 그 옛날 니느웨 사람들처럼 멸망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3:5-10, 12:41, 4:4, 7:5-7).

(4)  그와 같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외침에 비추어보면 본문에서의 그들은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타락상을 예레미야가 제28절에서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    다 심히 반역한 자; 심히 반역하는 것을 선지서에서는 패역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였기에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은 창조주 여호와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나의 장자이며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계십니다(4:22).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3:38). 그런데 자식과 같은 선민 유대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패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다윗왕조 유다왕국이 여호와를 주권자로 삼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반역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이 패륜과 반역을 일삼고 있기에 선지자들은 동족들의 패역함을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1:5, 29:16, 28:16, 2:5);

그와 같은 의미가 본문에서는 다 심히 반역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2)    비방하는자; 비판이 정당한 평가라고 하면 비방은 불공평한 평가로서 일종의 폄하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이나 훌륭한 점을 외면하고 단점과 잘못한 것을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여 격하시키는 것이 비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방은 일종의 상대방 인격에 대한 모독 행위입니다. 그와 같은 비방은 민주적인 선거에 있어서도 네가티브의 수단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상대후보를 깎아내림으로써 반사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치졸한 술수인 것입니다.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말기인 예레미야의 시대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선지자를 비방하기에 열심입니다(20:1-2, 28:10-11, 37:13-15). 여기서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비방거리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불공정한 비방을 일삼는 자도 문제이지만 백성들 사이에 다니면서 그 말을 퍼뜨리고 있는 자도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비방의 글을 만들어서 SNS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방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그 글을 읽고서 항간에 널리 퍼뜨리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방의 글을 발췌하여 널리 퍼뜨림으로써 시민들의 공정한 비판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누구이거나 간에 민주발전을 해치고 있는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선지자를 비방하는 거짓선지자의 말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백성들도 여호와의 역사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28);

4)    놋과 철과 같은 자;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용하고 있는 금속 놋과 철은 한마디로 완악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말씀을 애굽제국의 황제인 바로에게 전달하고 있지만 바로와 신하들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며 그 목을 뻣뻣하게 쳐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있어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행태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얼마나 교만한지 여호와의 말씀을 잡신의 말 정도로 취급하고 맙니다. 무당에게 많은 돈을 주면 우상의 도움을 언제나 이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선지자와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는 뻔뻔한 자들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32:6-10, 왕하17:21-23).

5)    사악한 자; 온갖 술수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자신의 이익을 크게 취하고자 하는 자가 바로 사악한 자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여 그 생명을 아끼고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와 달리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서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선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계십니다(3:4). 특히 하나님의 선한 일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인들을 죄와 사망의 길로 끌고가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악한 영들입니다. 그들이 진짜 사람들의 원수이며 사악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싸움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6:12). 역사의 종말이 되면 주님의 심판으로 악한 영들과 그들의 하수인이 되고 있는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이 전부 영벌의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20:10).

둘째로, “29.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이 살라져서 (귀중한 금속을)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세상풍조의 누룩이 되어 악한 영향력만 끼치고 있으니, 8:15), 30.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노아의 시대처럼, 6:3) 버렸음이라”(6:29-30);

(1)  대장장이가 금과 은을 제련하기 위하여 풀무불을 높은 온도로 상승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옆에 있는 그릇에서 납이 쏟아져 나와 풀무불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납이 묻은 금과 은은 쓸모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맹독성인 납이 금과 은의 표면에 묻어 있어 사람들이 그것을 몸에 지닐 수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장장이의 고된 작업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29a).

(2)  그렇다면 언제 납을 금과 은에서 제거하게 될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역사심판이 이루어지는 그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29b)라는 문구가 유효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노아의 시대에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들의 사회를 여호와께서 떠나 버리시고 나중에 전면적인 홍수심판을 시행하고 계십니다(6:3-8);

(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온세상에 전파가 되고 있는 신약의 시대에 있어서도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1장에서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단적으로는 역사의 끝에 종말심판이 임하고 개인적으로는 육신적인 죽음 다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13:30, 24:29-31, 25:40-46, 5:25-29).

(4)  고대시대에 금과 은은 참으로 고귀한 귀금속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의 가치는 의 가치보다 15배나 높습니다. 그만큼 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 차이가 크게 보아 3가지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금은 황금색 광채가 휘황찬란합니다. 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은의 광채보다는 그것이 더 고상한 것입니다. 둘째, 금의 생산량이 은의 생산량보다 더 적기 때문입니다.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 금값이 은의 값보다 고가입니다. 셋째, 금이 은보다 더 안전한 금속입니다. 은의 경우에는 공기중에 퍼져 있는 황화합물을 만나게 되면 녹이 생겨서 변색이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흰색 광택이 사라지고 검게 되므로 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내버린 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0a).

(5)  그런데 그것을 여호와께서 버려 버리신 것이라고 예레미야가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30b). 그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하게 은의 녹이나 변색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선민들이 세상의 풍조에 물이 들어 여호와신앙의 광채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세속화되어 버린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8:15). 그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이중적인 바리새인들의 종교생활을 조심하고 명분 없는 외세의 지배를 계속 허용하지 말라는 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금과 은에 납성분이 섞이게 되면 그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중독물질이 되고 맙니다. 결국 버려지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풍조라는 누룩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성도들은 단정한 신앙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완악한 무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 옛날 애굽의 바로가 모세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외면하고 놋이나 철처럼 완강하게 저항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7:22, 8:15). 여호와 앞에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완악한 무리는 출애굽 당시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32:9-10).

그와 같은 패역한 사회일지라도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은 양떼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여야 합니다.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낮에는 높은 망대에 올라가서 망을 보아야 합니다. 저녁에는 양무리를 우리에 몰아넣고 밤새 요새의 병정처럼 맹수의 침입을 방비하여야 합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라고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말세에 더욱 휘황한 믿음의 빛을 발휘하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