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다가오는 새 시대에 대한 언급(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26. 15:02

제목;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다가오는 새 시대에 대한 언급”(7:24-35)

설교일; 주후 202273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26일 화요일 작성)

 

주전 410년경 말라기 선지자가 유대인의 땅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외친 이후 4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여호와를 만나서 직접 백성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외친다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인사회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를 흔히 중간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고 있는 이유는 말라기 선지자의 기록에서 마태복음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그 사이에는 선지자의 말씀이 기록으로 유대인 사회에 전해지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선지자의 활동이 없는 일종의 공백기간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후 28년경 유대인의 땅에 선지자 세례 요한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식으로 다시 외칠 때까지 유대인들은 어떻게 히브리경전을 읽고 그 뜻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한 것일까요? 그것을 나름대로 4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첫째, 주전 458년경 페르시아제국의 수도인 수산궁에서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율법학자 에스라가 양성해 놓은 제자들 곧 에스라 학파가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둘째, 주전 140년경부터는 민간에서 히브리경전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랍비 곧 율법선생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 출신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율법을 어릴 때부터 배우는 수많은 생도들과 그들의 선생인 랍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루살렘성전에서는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제사장 계급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레위인들과 함께 절기에 백성들에게 일종의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예루살렘성전에는 산헤드린 대공회가 구성되어 있고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의  큰 회당에는 산헤드린 지방공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종교재판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의 율법생활을 감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동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뜻을 정확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활동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커다란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지혜를 감동으로 얻은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히브리경전을 읽고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생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이르지 못하고 동시에 그 자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발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마태복음 제11장과 누가복음 제10장에서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10:22-24).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정확하게 선포하는 자는 성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는 선지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선지자들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후 28년경 6개월의 시차를 가지고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땅에 선지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26, 3:1-3, 23). 그 가운데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이 세상에 6개월 먼저 보내어진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모든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보다 예수님은 자신이 더 중요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하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민과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 공의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 가운데 그대로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영원한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3:14-17).

그와 같은 차이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세례 요한이 비록 그리스도를 세상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먼저 온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선민중심사상에 입각하여 현세적인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신구약의 성경말씀을 참조하면, 세례 요한은 다음 3가지의 일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시게 되면 예루살렘성전에서 태양력으로 매년 1010일에 드리고 있는 대()속죄의 제사 대신에 스스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직접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다는 것입니다(1:29, 36, 16:29-34).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회개의 물세례를 먼저 받으라는 것입니다(3:4-14).

둘째, 메시아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에게 물세례를 주면서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예수님의 머리에 임하시고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음성이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3:21-22, 1:31-34). 그리고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주고 있습니다(1:35-40).

셋째, 자신은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의 위격을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1:27, 30). 동시에 세례 요한은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재건하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죄악을 범한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꾸짖고 스스로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14:3-4). 그 이유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헤롯 왕가를 쳐부수고 세례 요한 자신을 구출하여 줄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옥중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구출하여 주지도 아니하고 있으며 외세인 로마의 총독부와 헤롯왕가를 유대 땅에서 몰아낼 아무런 조치도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점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다윗의 후손이 아니며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옥중의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복음전파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에게 보내어 심각한 질문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19. 오실 그이 (유대인의 메시아)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나사렛 예수가 아닌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오리이까?”(7:19).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거나 외세를 물리치는 선민 유대인의 정치적인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을 영원한 대속물로 희생하고자 이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7:22-23).

세례 요한이 보낸 두명의 제자가 갈릴리로 돌아간 후에 본문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민 중심적인 입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 선민의 나라를 재건하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라고 백성들에게 외쳤는데 그 사상을 세례 요한이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 내용이 본문 가운데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을 더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7:24-27);

(1)  세례 요한은 오랜 세월 광야에서 엣세네인처럼 금욕생활을 하면서 경건하게 지낸 인물입니다(1:80, 3:1-4). 그가 30세가 되자 백성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주기 위하여 요단강 동편에 있는 마을 베다니에 와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멀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쳐부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할 메시아의 오심을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소개할 터이니 메시아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3:3-17).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면서 그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처음으로 400여년만에 유대 땅에 온 선지자라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사실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하기 시작하십니다. 그 구절이 일단은 제26절과 27절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들보다 훌륭한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직접 보낸 사자이며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오심을 곧바로 백성에게 알려주는 전령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7:26-27의역).

(3)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유대인들의 사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위탁 받아 백성들에게 그대로 외친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 점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두가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엣세네인들이 아무리 광야에서 금욕주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말씀의 진리를 깨닫고자 했지만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갈대와 같은 약한 존재가 자신임을 그들이 깨닫고 있지만 그 약한 갈대를 움직이고 있는 바람과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24);

(4)  그러므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먼저 인정하고 그 흐름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선지자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백성에게 전파함으로써 선지자로 세움을 받고자 노력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왕궁에서 호의 호식하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25). 그것이 종교지도자들의 세속적인 타락입니다. 요컨대, 26절은 그와 같이 종교적인 출세욕을 가진 자는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도 없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임무를 수행할 수도 없다고 하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낳은 자이기에)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7:28-30);

(1)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두번째 평가가 제28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28a). 사실 모든 선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자신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세례 요한이야 말로 여자가 낳은 자로서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는 칭찬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28절 하반부의 말씀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온 성도들을 살펴보면 모두 세례 요한보다는 더 큰 자임을 알 수가 있다고 부연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모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일찍이 율법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설명했지만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3:3-8).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선생을 따라다니고 있는 제자들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들 군중이 두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무리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이미 물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고서 이제는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칭찬하는 말씀을 그들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29).

(4)  두번째의 무리는 자신들에 대하여 유대교에서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세리와는 전혀 다르며 율법적으로 완벽한 의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자칭 의인들이 율법선생인 랍비들과 그들의 생도들인 바리새인들입니다(30a).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의인의 근거는 율법이 정하고 있는 십일조와 금식조항을 엄격하게 실천했다는 것입니다(18:11-12). 따라서 율법상 의인인 그들은 죄인이 아니기에 결코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마는 것입니다(30b);

셋째로,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광야에서 금욕하는 엣세네인과 같이)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세상적인, 18:11-12)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1-35);

(1)  예수님께서 제31절에서 이 세대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대상은 위에 기술되어 있는 제29절의 무리와 제30절의 무리를 모두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그대로 그들은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물세례를 받고서 메시아를 만나고자 하는 무리입니다(29). 또 하나는, 자칭 의인들인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막강한 외세를 물리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30).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두 부류의 사람을 한꺼번에 이 세대의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을 구원하는 속죄물로 보내어 주시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뿐만 아니라 선민들도 전부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전혀 모르고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자국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전부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대속물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창조주 여호와의 긍휼과 공의의 정신을 모르고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만 구원하여 주시고 이방인들을 속 시원하게 처벌하여 주시는 그러한 메시아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행태와 비교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피부색깔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문화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연령이면 서로가 쉽게 동무가 되어 함께 어울려 놀고자 합니다. 그것이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닮아 있는 것입니다(32).

(4)  그 반면에 어른들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이 탄다고 멀리하고 있으며 나그네를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선민우월사상에 젖어서 약소국의 백성에 불과하지만 그 도도함과 완악함이 엄청납니다. 그러한 사실을 본문에서는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7:31-3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  둘째, 33절과 제35절 사이의 구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적인 지혜를 가진 바리새인과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성도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의사 누가가 제35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세상적인, 18:11-12)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5). 율법선생인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율법을 많이 연구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는 세칙을 생활화하고 있는 집단입니다.

(6)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에 비추어보면 선민들도 죄인들이기에 이제는 만민을 구원하고자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자녀들은 장차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시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자칭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세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비난의 내용이 제33절과 제34절입니다.

(7)  먼저 제33절의 내용입니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광야에서 금욕하는 엣세네인과 같이)귀신이 들렸다 하더니”(7:33). 주전 140년경 하스몬 왕가 시대 유대 땅에서 3갈래의 유대교 종파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가, 세상적인 타협을 하더라도 유대교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둘째가, 히브리경전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종교적인 존경을 받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셋째가, 세속을 떠나서 경전을 벗삼아 고행을 하는 엣세네인들입니다.

(8)  그 가운데 대제사장을 위시한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대공회에 일부 율법학자를 영입하여 함께 종교재판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과는 그런대로 어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집단은 사회와 벽을 쌓고 금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엣세네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외딴 곳에서 고고한 척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엣세네인들을 많이 싫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엣세네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세례 요한을 싫어하여 제33절과 같이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9)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서 따르고 있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위반하였다는 시비를 예수님 일행에게 계속 걸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는 유대교인들이 동족이지만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여겨서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세관원 레위를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5:27-31). 그리고 유대 땅 여리고에서는 세관장 삭개오의 집에서 발생한 일입니다(19:5-10). 바리새인들은 공히 예수님 일행이 부자로 살고 있는 레위나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크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7:34).

(10)    바리새인들이 수군수군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다음과 같이 복음의 시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삭개오의)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들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5:31-32);

그와 같은 복음의 시대의 은혜를 그들 유대인의 자녀들이 장차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결론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35.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세상적인, 18:11-12)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1-35).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무덤속에서 3일만에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의 새날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이 틀리고 예수님의 복음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활사건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그대로 승천하여 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사도 베드로와 히브리서의 익명의 저자가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2:32-36, 7:24-28). 그러므로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녀들은 구태여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대속의 십자가를 나 대신 져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것이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율법을 해석하고 여러가지 세칙을 만들어 종교적으로 백성들을 구속하면서 자신들은 끼리끼리 의인이라고 서로 인정해주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기 힘든 부류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본문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