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갈릴리호수 서북쪽(Norwest)과 동남쪽(Southeast)의 깊은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2. 12:39

제목; “갈릴리호수 서북쪽(Norwest)과 동남쪽(Southeast)의 깊은 의미”(8:26-44)

설교일; 주후 20228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2일 화요일 작성)

 

예수님은 예루살렘 남방 8km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그 옛날 다윗대왕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실제로 성장한 곳은 갈릴리호수 서쪽산지의 깊은 산골마을 나사렛입니다. 따라서 흔히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는 나이 30세쯤이라고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3:23).

그 때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시작한지 반년이 지나고 있는 시점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달은 다르지만 흔히 같은 해에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것이라고 보고서 성경학자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을 깊이 있게 살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제2장의 기록에 따르게 되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있습니다(2:8-12). 그때 점성술에 밝은 동방박사들이 다윗의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를 경배하기 위하여 800km가 넘는 먼 길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세한 탄생지역을 알기 위하여 먼저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헤롯대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2:1-2).

그렇지만 이방민족 에돔의 후예 이두매 출신인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다윗대왕의 후계자 메시아의 출현을 시기하여 아기 예수를 찾아서 죽이고자 합니다(2:13-16). 그때문에 아기 예수의 부모는 애굽으로 잠시 피난을 떠나고 그 사이에 헤롯대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헤롯대왕의 별세가 역사학자들의 계산에 따르게 되면 주전 4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이 주전 4이며 그가 30세가 되는 시기 곧 주후 26년경에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누가의 기록은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이 주전 2년경이므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주후 28년경에 시작되고 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는 해,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 (안디바)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세례)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3:1-3). 차제에 누가복음 본문의 내용을 조금 풀이해봅니다;

(1)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주후 14년에 사망하고 그의 양아들인 티베리우스가 그해에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은 주후 28년에 해당합니다;

 그 해가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태어난 시점은 30년을 거슬러올라가게 되면 자연히 주전 2년경이 되는 것입니다.

(2)  헤롯대왕의 뒤를 이은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는 폭군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 때문에 장로들이 로마황제에게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헤롯 아켈라오를 폐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주후 6년에 시리아 총독이 그를 폐위하여 끌고 갑니다. 그때부터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던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로마총독이 들어와서 다스리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로마의 유다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 부임하여 36년까지 유다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헤롯 아켈라오의 이복동생인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분봉왕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은 넓지가 않습니다. 그는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호수 서쪽지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의 통치기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4)  헤롯 안디바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2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도를 헬몬산 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가이샤라 빌립보에 두고 있습니다;

 헤롯 빌립2세는 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왕위에 있었기에 자연히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기간에 포함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마태의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헤롯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아기 예수의 부모는 살그머니 유대 땅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2:19-22). 그러나 헤롯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헤롯 대왕에 이어 그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가 폭정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북상하여 고향이 있는 갈릴리지방으로 되돌아가서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조용히 살게 됩니다(2:19-23). 나사렛 지역은 주전 4년부터 헤롯 아켈라오의 이복동생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고 있는 땅이므로 그들이 안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3)  그 점을 사도 마태가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9:1,11:1, 헬라어 나사렛은 나무의 가지라는 히브리어 네체르’ 또는 '나체르'와 같은 의미임) 이루려 함이러라”(2:22-23).

(4)  여기서 예수님의 성장지인 고향 나사렛과 그가 주로 복음사역을 하게 되는 갈릴리 지역의 의미가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9: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히브리어로 나체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이 그 옛날 스불론 지파의 땅에 포함되어 있으며 예수님이 주로 복음사역을 한 큰 도시 가버나움과 그 주변의 갈릴리 지역이 대부분 그 옛날 납달리 지파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는 선민 유대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헬라시대부터 갈릴리 동편과 요단강 동편에는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일대에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갈릴리 서북쪽(Norwest)에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남동쪽(Southeast)에 살고 있는 헬라세계의 이방인에게도 빠짐없이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15:21, 6:17, 9:1). 요컨대, 그것이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선민중심의 구원이 아니라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을 동시에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만민구원의 복음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공생애의 특징인 것입니다.  

(6)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그의 선지서 제11장 제1절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이 훗날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지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나체르인데 그것을 훗날 헬라어로 나사렛이라고 번역하여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을 벌써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간략하게 풀이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을 아울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을 입지 아니하며, 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8:26-34);

(1)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호수 서북면 호안에 있는 어업기지 게네사렛에서 배를 타고 그 맞은편 곧 동남면 호안에 있는 이방인들의 도시 거라사로 이동합니다(26);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호수 서북면이 아니라 이제는 이방인 헬라인들이 살고 있는 동남면 거라사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공생애인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신 갈릴리 서북지역에서는 벌써 귀신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이 살고 있으므로 그곳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1:7-8). 따라서 돼지를 키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방문하고 있는 이방인 도시 거라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먼저 눈에 뜨이고(27) 그 다음에는 이방인 헬라사람들이 즐겨먹고 있는 돼지고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돼지 떼를 키우는 양돈업이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32).

(3)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 심령속에 영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영성을 안테나처럼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잠시 들어와서 사람의 영을 지배하게 되면 한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파할 수 있는 선지자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와 반대로 악한 영인 귀신이 들어와서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더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 특징을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짐승과 같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벌거벗었으나 수치를 모르고 지냅니다(27a).

2)    집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고자 합니다(27b). 특히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죄와 사망을 주장하는 악한 영들과 소통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27c).  

3)    귀신은 악한 영이므로 영적인 비밀을 나름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아첨하는 말이 영적으로 먼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28)

4)    귀신들린 사람은 때로 악한 영의 힘을 기이하게 육체적으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쇠로 만든 사슬과 고랑까지 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29);

(4)  선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 귀신의 수가 많아야 7이고(8:2) 최대치가 8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2:45). 그러나 이방지역 거라사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2천이 넘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는 굉장한 수의 귀신 떼가 한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군대 귀신에 들린 자입니다(30)

(5)  악한 영과 귀신들은 종말이 되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하여 구금이 되어 무저갱에 갇히게 되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로 들어가는 운명이 되고 있습니다(20:1-3, 10). 그 점을 귀신이 이미 알고서 예수님께 부디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고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31-32).

(6)  돼지는 영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신이 숙수로 선택하고 있는 것은 영성이 없는 돼지가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서 쫓겨나게 된 군대 귀신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임시로 돼지의 몸에 들어가서 잠시 지내다가 기회를 보아 이방인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그것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일시에 호수에 뛰어들어 집단 자살을 시도하고 마는 것입니다(33);

(7)  그 모습을 보고서 돼지 떼를 치고 있던 사람들이 급히 돼지 떼의 주인이 살고 있는 거라사와 그 주변지역으로 달려가서 그날의 참상을 보고하고 있습니다(34). 돼지 떼를 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돼지 떼가 몰살을 당하여 큰 손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훨씬 큰 일입니다. 과연 돼지 떼의 주인들인 부자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요?

둘째로,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8:35-39);

(1)  돼지 떼의 주인들 곧 거라사 지역의 부자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두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군대귀신에게서 해방되어 이제는 구원을 누리고 있는 멀쩡한 사람입니다(36). 또 하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그 일이 두렵기만 한 것입니다(35). 또다시 그 능력이 발휘가 된다고 하면 자신들의 돼지 떼는 더 큰 피해를 볼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부자들이 예수님께 부디 자신들의 땅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37).

(2)  이방인 부자들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일까요? 한마디로, 계속 귀신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돼지는 호수에서 살아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살아서 돼지의 몸을 빠져 나와 기회를 보아 다른 이방인들에게 들어갈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치를 모르고 양돈업을 통하여 돈 벌 생각만 하고 있는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내어 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귀신과 벗하여 살더라도 물질적인 이익만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이방인들의 잘못된 선택입니다. 

(3)  그와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군대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은 그 사람입니다. 그는 차제에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3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라사 이방 땅에 남겨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39). 그와 같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자는 그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그 사람이 복음의 일꾼이 되어 크게 실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갈릴리호수 동남방의 도시 거라사는 물론 그 남쪽 곧 요단강 동편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였기에 훗날 그곳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을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12:20-22). 참고로, 데가볼리는 이방인 헬라사람들이 10개의 도시를 형성하여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4)  이방인 헬라사람들의 방문을 받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3-24). 군대귀신에게서 해방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헬라인들이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이 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치르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선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제자들에게 언급하시는 구절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만민구원 영생구원의 복음의 새 시대가 오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12살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8:40-44);

(1)  거라사에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건너가게 되면 어선들이 잡은 물고기를 어시장에 내다파는 물양장과 도매시장이 있는 게네사렛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 일행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40).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위적인 능력으로 병 낫기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앞으로 나서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간청하고 있습니다(41);

자신의 12살된 외딸이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니 부디 왕진을 해달라는 것입니다(42a). 예수님은 그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하여 야이로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십니다(42b).

(2)   그런데 몰려든 백성들이 자꾸만 예수님의 발길을 지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42c). 회당장 야이로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병에 시달리는 경우에는 백성 모두가 그 사정이 딱하고 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예수님께 먼저 가서 병에서 놓임을 받고자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슬며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 사실을 인지한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확인하고 있습니다(46-47). 그 이유는 12해를 피가 흘러내리는 혈루증으로 크게 고통받은 한 여인이 몰래 접근하여 가만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입니다(43). 그러자 갑자기 불치의 병인 혈루증이 즉시 낫고 있습니다(44). 평소에는 어떤 병자가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도 그 치유의 능력이 일방적으로 빠져나가지는 아니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4)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실을 확인하신 다음에 다음과 같이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8:48). 그 말씀의 뜻이 두가지입니다; 첫째, 혈루증 여인의 믿음이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버나움에 근무하고 있는 로마인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창조주의 전능하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5)  그저 말씀만 하셔도 멀리 있는 환자가 나음을 입으며 그냥 그 옷자락만 만져도 즉시 불치의 병이 낫게 된다고 하는 믿음이 그와 같은 기적의 치유를 초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7:8-10, 8:43-44, 15:6). 둘째, 이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가 없는 여인입니다. 그 마지막 소원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혈루증 여인이 길에 나서게 되면 부정을 타게 되므로 유대인 율법사회에서는 돌에 맞아 죽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15:25-28, 31-33).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는 혈루증 여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갈릴리호수 북편의 대도시 가버나움과 그 이웃에 있는 어부들의 마을 벳새다, 그리고 호수 서편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와 달리 호수 동편 거라사 지역과 그 남쪽 요단강 동편 데가볼리 지역에는 이방인 헬라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갈릴리호수 서편 산지 깊숙한 산골마을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은 갈릴리 서편 유대인 마을에서 복음을 먼저 전파하신 후에 배를 타고 맞은 편 동편으로 가서 이방인의 도시 거라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준 관계로 그만 그 지역에서 내쫓기고 맙니다.

그러나 군대귀신에게서 해방을 얻은 그 사람이 고향인 거라사는 물론 데가볼리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훗날 그 지역의 헬라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희생할 결심을 굳히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12:20-2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갈릴리지방에 있어서도 선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서편지역은 물론 이방인 헬라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편지역까지 골고루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본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코비드19바이러스가 하루 속히 박멸되고 성도들이 거라사의 그 사람처럼 이방인이 살고 있는 땅끝까지 복음을 다시 힘있게 전파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