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42강(렘7: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7월 2일(월)
여호와를 섬기는 진정한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렘7:1-7)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크게 보아 두가지 사실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깨달아 동족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깨닫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선민들은 자신의 길과 행위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바르게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로,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렘7:1)라는 특이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영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인 예레미야에게 말씀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렘7:1). 영이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방법으로 선지자에게 말씀을 걸어오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물질적인 공기의 떨림이라고 하는 소리라고 보기 보다는 우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져 있는 사람의 심령속에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말씀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수많은 생각과 사상과 인식이 스쳐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영적인 그 심령속에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이 깊은 깨달음으로 울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를 하자면 하나의 득도와 같으며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하시는데 그 창조의 이치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져서 그것을 선지자가 사람의 말로 전달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여호와께서 실제로 사람의 음성으로 말을 걸어 오기도 하십니다. 그것이 “이르시되”(렘7:1b)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제19장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정상을 빽빽한 구름이 가리고 있는 가운데 두려운 우레와 번개 그리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십니다(출19:16a, 17-18).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그 광경을 두려워하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출19:16b). 그때 갑자기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음성으로 모세와 대화를 하시기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출19:19).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십니다(창18:1). 가나안 땅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이신 줄 알고서 경배를 합니다(창18:2-4). 그리고 식사대접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창18:7-15).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여서 선지자와 능히 말씀을 나누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3) 셋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두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①하나는 예레미야의 심령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울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환상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를 깨달으면서 사람의 음성으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경우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르시되’(렘7:1b)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계십니다;
1) 첫째,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두가지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서 성전으로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하여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러한 노력을 성전 바깥에서 일상생활 가운데 하는 일이 없이 그냥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2) 둘째, 전자의 경우에는 그들의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며 약속의 땅에서 계속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렘7:3). 후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렘7:4).
3) 셋째, 여호와의 뜻대로 인생길을 가고 있지도 아니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도리를 행하지도 아니하고 있는데 어떻게 성전에서 여호와를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성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렘7:7) 다음과 같이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웃들에게 정의를 행하며, 생계가 어려운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며,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렘7:5-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렘7:1-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렘7:1);
1) 약관의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렘1:2). 그것은 여호와의 영으로 제사장의 아들인 예레미야를 감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여호와로부터 오고 있는 말씀이고 또한 무엇이 사이비 신으로부터 오고 있는 말인지를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님의 임재로 예레미야가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와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귀에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이 들려오고 있습니다(렘7:1). 그것은 때로는 그의 심령속에 커다란 깨달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지금과 같이 직접 그 말씀이 여호와의 음성으로 들려 오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동족들에게 대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 구절입니다.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렘7:2a);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성전의 동쪽문으로 가서 선민들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성전의 대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는 것일까요? 보통의 경우에는 그곳에 신실한 유대교인들이 많이 몰려들기에 많은 백성에게 효과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외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내용이 예루살렘성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3)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렘7:2b);
1) 예루살렘성전의 기능은 여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기능은 여호와 하나님께 각종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안식일과 여러 절기에 제사를 드리고 또한 여호와의 말씀을 레위인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민들이 듣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예배’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2) 참고로 출애굽기 제33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배’의 모습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출33:9-10).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성전에는 그 옛날 회막 안에 건설을 한 성막이 들어 있습니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3) 지극히 거룩한 방인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고 금으로 만든 그 뚜껑이 있는데 그것을 ‘속죄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새겨서 준 그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돌판이 그곳에 보관이 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속죄소에 임재를 하십니다. 그리고 수시로 모세를 그곳으로 불러서 말씀을 나누십니다(출25:21-22).
4) 대제사장인 아론은 일년에 단 하루 유대력으로 7월 10일 ‘대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레16:29-30). 그날 속죄물의 피가 언약궤와 속죄소에 뿌려지면 그 제사를 받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모든 백성들이 지은 지난 1년 동안의 죄를 전부 용서한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대제사장이 즐거워하며 성막의 뜰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여호와의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게 됩니다.
5) 그러므로 지성소에 임재하여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선민들이 예루살렘성전으로 나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와 같은 전통적인 성전예배에 참석을 하고자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의 문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혀 뜻밖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다음의 몇 구절입니다.
둘째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3-4); 역시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렘7:3a);
1) 여기서 ‘만군(萬軍, almighty)의 여호와’(렘7:2aa)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떠한 군사력보다도 더욱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늘도 모든 피조물의 생사와 운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애굽제국의 가정이나 앗수르 원정군의 진영에서처럼 일시에 죽음의 천사를 보내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습니다(출12:29-30, 왕하19:34-35).
2)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피조물인 인간들이 군대의 힘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고자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와 같으신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주권자이십니다(렘7:2ab). 이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운명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심판의 말씀을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루살렘성전의 대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렘7:3b);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명쾌한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계속 잘못된 인생길을 선택하고 여호와를 진심으로 섬기지 아니하는 행위를 지속하게 되면 가까운 장래에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민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여호와의 뜻을 실천하는 올바른 인생길을 선택하며 여호와를 진심으로 섬기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러한 선민나라의 멸망을 예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1) 그런데 선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예루살렘성전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또한 안식일마다 성전예배를 여호와께 드리기만 하면 언제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성전의 예배가 그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될까요? 그렇지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고 경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기본적으로, 인간들이 지은 예루살렘성전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지성소에 임재를 하시고 아니하시고 하는 문제는 여호와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선민들이 여호와를 외면하는 인생길을 살아가고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계속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세상을 탐내어 육신적인 삶만을 즐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영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떠나 버리십니다. 창세기 제6장에 벌써 다음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셋째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7:5-7);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렘7:5); 선민들이 어떠한 인생길을 선택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되면 환란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다음과 같이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먼저, 선민사회에서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하고 있는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는 옳은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선민사회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만 하는 인간의 도리를 확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사회의 구성원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렘7:6);
1) 그런데 선민사회 내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 이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하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창1:26-27). 그러므로 선민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 마음과 믿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해야만 합니다(마5:43-48, 막12:30-31).
2) 특별히 생계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자들부터 구해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내(하나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천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계가 막연한 이방인 나그네, 고아, 과부 등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입니다(렘7:6a).
3)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와 똑 같은 인간을 죽여서는 안됩니다(렘7:6b). 그 반대로 구원해주어야 합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땅에 흘리게 되면 땅이 저주를 받아 그 땅과 함께 거주민들이 전부 여호와의 멸망의 심판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창4:10-11, 6:11-13, 15:16, 왕하21:11-16). 더구나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제 혼자 잘 살겠다고 현세적인 기복신앙에 빠져서 우상을 섬기게 되면 십계명의 가장 큰 항목을 어긴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의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출20:3-5, 렘7:6c).
(3)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7:7);
1)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말하게 되면 그것은 굉장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해석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영적으로 보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히11:1).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세상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적인 세상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구약상의 모든 믿음의 인물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라고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히11:13-16).
3) 그와 같은 소망이 실제로 성도들에게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결론적으로, 익명의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구약상의 믿음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주님을 만나 하늘에 있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그들이 소망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첫째,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부터 정의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을 뛰어넘어 모든 피조물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방인 나그네, 고아, 과부 등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3) 셋째,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되면 그 땅이 백성들과 함께 저주를 받아 여호와의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선민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4) 넷째,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만을 생각하면서 그 뜻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시험과 육신적인 유혹을 이기게 되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당장은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족들에게 위와 같이 행동하여 유다 왕국의 멸망을 면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성전예배와 제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형식적인 율법생활만으로는 결코 선민의 나라의 멸망을 예방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깊은 뜻을 음미하시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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