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공화국(손진길 소설)

너와 나의 공화국1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6. 13. 08:36

너와 나의 공화국10(손진길 소설)

 

1985 2 12일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북에서 출마한 강훈의 숙부 강하삼이 당선된다. 젊은 시절 30대에 품은 꿈이 두번의 낙선을 맛보고 오래 고생을 하다가 이제서야 50대 후반의 나이에 실현되고 있다;

당선이 확정되자 그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아내 김미령 여사도 흐느끼고 있다. 그리고 강훈이 전화를 걸어서 숙부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강훈의 아내 김가영도 종고모 김미령에게 축하의 인사를 한다.

강하삼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지만 상당기간 오퍼상을 경영한 경험이 있기에 제12국회 원구성에서 상공위원회로 배속이 되기를 희망한다. 신민당이 명단을 제출하자 깐깐한 이재형 국회의장이 그대로 승인한다;

강하삼 의원이 상공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집안 조카인 강훈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강훈은 벌써 두차례 경제관계위원회에서 입법조사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제12대 국회에 들어와서는 상공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베테랑인 것이다.

1985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 3선 의원인 윤국노 상공위원장이 단장이 되어 4명의 상공위원들과 함께 해외시찰에 나서고 있다. 그 시찰단에 강하삼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입법조사관 강훈이 수행 임무를 맡고 있다.

당시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있으므로 업체의 해외진출이 왕성하다. 그러므로 그 현황과 애로사항을 입법부에서 직접 현지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소기업을 창업하여 성공적으로 경영하였으며 한국청년회의소에서 지역발전을 위하여 크게 헌신한 바 있는 윤국노 위원장이 그 시찰단을 이끌고 있다;

이번 시찰단의 활동을 국내에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윤 상공위원장은 언론기관에 부탁하여 주요일간지 차장급 기자 한사람을 동행하게 한다. 따라서 강훈은 기자 한사람과 함께 움직이면서 호텔방을 같이 사용하게 된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비용절감의 방법인 것이다.

강훈 조사관은 애초 시찰일정을 짤 때에 전문위원과 상의하여 동남아에 진출하여 있는 한국업체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태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 진출하여 있는 업체들이 그 대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시찰단이 일단 그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면 한국대사관에서 공사나 참사관이 마중을 나온다. 의원들은 먼저 대사관에 도착하여 브리핑부터 받는다. 상무관이 주로 보고를 하는데 그것이 실속이 있다. 현황파악에 아주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훈이 의원단을 수행하여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을 때에 그는 그곳에서 한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경제관계 참사관 박지웅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박 참사관이 먼저 강훈을 알아보고서 얼른 다가와 반갑게 포옹을 한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이며 서울대학교도 동문이다. 물론 대학에서 전공은 달랐지만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였으니 그 반가움이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기업을 시찰하는 동안 모든 일정을 박 참사관이 도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강훈이 그를 숙부인 강하삼 의원에게 소개하였더니 강의원도 매우 반가워한다. 개인적으로 조카의 친구이며 서울대 동문이라고 하는 것이 반가운 모양이다. 강훈은 인도네시아 시찰기간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박참사관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경공업 업체들이 동남아의 싼 임금을 쫓아 해외이전을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염색공장, 의류공장, 봉제공장, 완구류 생산업체, 문방구류 생산업체, 그리고 신발생산업체 등이 그러하다;

둘째, 그 대신에 한국은 중공업을 국내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업, 자동차산업, 전자산업, 철강업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공해가 심한 중화학이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갈 것으로 본다.

셋째, 그와 같이 해외의 값싼 노동력과 공장부지, 그리고 세제혜택 등을 활용하기 위하여 국내의 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하는 경우 국내에서는 자연히 산업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1980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먼저 발생한 현상인데 그것이 빠르게 한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산업공동화(産業空洞化) 현상은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해외의 값싼 노동력과 부지를 활용하고 경제발전을 위하여 그 나라가 제공하고 있는 세제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국내에서 경공업이 사라지게 되면 나중에 도리어 비싼 값으로 해외에서 상품을 수입해야 할 지도 모른다.

다섯째, 또 하나의 우려는 국내에서의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간 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에는 세계적인 분업구조 때문에 적기에 필요한 상품을 수입할 수가 없어서 서로가 고통을 받게 된다. 서로에게 없는 제조시설을 금방 국내에 설치하여 그 상품을 조기에 생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동남아의 여러 나라가 그들의 국가발전과 경제발전을 위하여 한국정부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아시아에서 중공업을 가진 나라가 당시로서는 일본과 한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일본제국이 대동아공영권운운하면서 총칼로 동남아에 진출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본이 경제적으로 동남아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 시작은 국제원조의 성격을 띤 호의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값싸게 도로나 교량 그리고 항만 등을 건설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진출이 계속되면 결국은 동남아의 경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하나의 견제장치로 동남아 제국은 한국의 경제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

동남아에서의 일정을 마친 다음 시찰단은 유럽의 몇 나라를 둘러본 후 710일경 동경에 들어온다. 그때 동경에서 운명한 김녹영 국회부의장의 부음을 현지에서 듣게 된다. 따라서 시찰단은 김부의장의 시신을 운구하여 급히 서울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경제시찰단의 마지막 임무는 조문단의 성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한해가 지나자 1986129일에 윤국노 상공위원장이 숙환으로 별세하고 만다. 현직국회의원이 별세하게 되면 국회장으로 그 장례를 치르게 된다. 따라서 1211()에 오전 10시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영결식을 가지고 장례행렬은 서울 남쪽 외곽에 있는 청계산으로 향한다;

강훈과 상공위원 강하삼도 그 행렬에 포함되어 있다. 함께 해외시찰을 한 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위원장은 슬하에 부인과 양딸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장지가 자손에게는 막혀 있지만 기타 모든 것은 참으로 길지라고 풍수담당자가 말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고인의 생전의 벗들이 윤위원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나누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하나가 강훈의 뇌리에 오래 남아 있다; “우리 고교와 대학 동창들이 윤위원장의 정치헌금을 많이 부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다… “;

가슴 아픈 한국정치인의 현실을 그들이 은연중에 지적하고 있다; “사실 국회의원의 활동비는 절반은 국고에서 절반은 헌금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도 경제사정이 좋지 못할 때에는 그에게 정치헌금을 주지 못하고 술만 사주었다. 그래서 그가 간이 나빠져서 일찍 우리 곁을 떠나고 마는 것인가 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슬프다… “;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3선 의원 윤위원장이 그렇게 청계산에 몸을 누이고 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강훈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수 성가하여 한국청년회의소의 큰 일꾼이 되고 정계에 투신하여 국회의원으로서 지역발전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신 분이시구나. 그런데… “.

강훈의 상념이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3선의원이 되고 상공위원장까지 지낸 분이시다. 그렇지만 막상 숙환으로 별세하여 청계산 중턱에 묻히고 보니 그 인생이 허망할 따름이다. 이 허무함이 최고권력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  

과연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 대통령의 앞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3주후에 전개가 될 1987년을 바라보면서 강훈이 그 점을 청계산에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