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공화국(손진길 소설)

너와 나의 공화국9(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6. 12. 02:29

너와 나의 공화국9(손진길 소설)

 

새해 19851월이 되자 강훈은 아내 김가영 및 아들 강한수와 함께 여의도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집안 숙부 강하삼 내외를 찾아가서 새해인사를 드린다. 숙부도 기뻐하지만 숙모 김미령 여사가 오래간만에 문안인사를 드리고 있는 김가영과 꼬마 한수를 보고서 그렇게 좋아하신다.

사실 강하삼 부부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다. 강하삼이 일찍 정치판에 뛰어들었기에 부부가 물심양면으로 고생을 제법해서 외관상으로는 다소 늙어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강하삼이 아직 환갑이 되지 못한 50대 후반의 나이이고 김미령 여사는 50대 중반에 불과하다;

슬하에 외아들 강지만이 있고 며느리 안순임이 있는데 아들부부가 지금은 하와이 주립대학에 유학을 떠나 있다. 그러니 새해가 되었지만 두 내외가 적적하다. 마침 집안의 조카인 강훈이 일찍 정초에 고향을 다녀와서 이제는 여의도에 살고 있는 친척인 자신들을 방문하여 주니 그것이 고맙다.

특히 김미령 여사는 개인적으로 강훈의 아내인 김가영의 종고모이다. 일찍이 김여사가 시집의 조카인 강훈을 보고서 마음에 들어 했다. 따라서 그녀는 친정의 사촌 오빠의 딸을 강훈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서울 토박이인 김미령 여사의 친정 집안은 모두들 서울 강북에 살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김가영은 종고모의 주선으로 강훈을 만났는데 서로 종교가 같고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만난지 일년만에 결혼을 했다;

그후 새해가 되면 종고모 김미령의 집에 김가영이 남편과 함께 아들 한수를 데리고 세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다. 김가영은 종고모 김미령 여사와 친하기에 그냥 고모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리고 강훈도 강하삼 숙부가 촌수로는 9촌이지만 그냥 숙부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촌수를 떠나서 친밀하게 불러주니 강하삼이 일가 조카인 강훈을 좋아하고 무척 아끼고 있다. 특히 경북의 시골 소도시 출신인 그들이 서울대를 나오고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흔하지 아니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니 더욱 그러한가 보다.

그날 강훈은 숙부 강하삼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강하삼이 두사람만 따로 술잔을 기울이게 되자 조용하게 집안 조카에게 말한다; “훈아, 이 숙부에게 또다시 출마할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이번에는 왠지 당선이 될 것만 같다. 그것도 변두리이지만 서울 강북 지역에서 공천이 될 것 같다… “;

강훈이 깜짝 놀란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럴 것도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숙부님, 다음달에 있을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그 성격이 정치규제에서 어렵게 풀려난 해금인사들이 대 설욕전을 펼치는 총선이 되겠지요. 그런데… “.

강훈이 잠시 숨을 쉬고서 천천히 말한다; “사실 그들의 인적자원이 부족하니 그 옛날 야당에서 오래 전문위원으로 일한 숙부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차제에 공천을 하는가 봅니다. 짧은 시간에 창당이 되는 신민당의 공천이면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저는 찬성입니다”;

그 말을 듣자 강하삼이 조용히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신중하게 말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회사는 이제 내가 없어도 같이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잘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볼 만해. 훈이 너는 국가 공무원이니 중립을 지켜 주기 바란다. 내가 과거의 동지들을 모아 한번 선거에 임해볼 테니까!... “.

그런데 118일에 뒤늦게 정식으로 창당이 된 신한민주당이 한달도 남지 아니한 212일 총선에 뛰어 들었는데 그 성적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양 김씨의 지지를 받아 당을 이끌고 있는 이민우 총재가 정치 1번지로 불리고 있는 서울 종로, 중구의 중선거구에서 예상을 깨고 비록 2등이지만 당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발맞추어 수도권과 대도시 지역에서 신한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어 전국적으로 지역구 50석을 얻고 있다. 전국구 17석까지 합하면 그 의석이 무려 67석이나 된다. 애초에는 양 김씨가 배후에서 아무리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급히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전국적으로 20석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여권의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게다가 신군부가 1981년에 제11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관제야당으로 허용한 제1야당 민한당이 신한민주당에 대패하여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 조짐은 진작에 나타난 바가 있다. 왜냐하면, 벌써 신한민주당 창당과정에 그동안 민한당에 남아 있던 민주인사들이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선이 끝나자 민한당 소속으로 당선이 된 국회의원들조차 제1야당이 된 신민당에 들어가고자 대거 당적을 옮기고 만다. 그 결과 신민당은 103석을 가진 제1야당이 되고 민한당은 겨우 4석만이 남아 끝내 교섭단체조차 결성하지 못한 채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와 같은 돌풍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정치부기자 이민욱은 정치발전과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다. 그는 18세기 말에 프랑스 대혁명 때 나타난 시민들의 구호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 20세기 말엽에 한국에서 다시 크게 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거듭 놀라고 있다;

생각해보면, 20년 가까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계속 성공적으로 수행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그 이듬해 1980년에는 처음으로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러자 국민들이 다시 배고픈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크게 염려하여 신군부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오로지 경제성장을 다시 회복하기를 열망했다.

그런데 1981년 후반에 뜻밖의 3저현상이라는 국제적인 호재를 만나게 되어 한국의 경제가 다시 고도성장기로 접어 들었다. 그러자 4년이 지난 1985년에는 국민들이 이제는 정치민주화까지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한 국민들의 생각을 뒤늦게 바라보고서 전두환 정권은 경악을 하면서도 내심 속이 상하고 있다. 한마디로, 믿을 것이 없는 것이 민심이다. 경제를 되살린 자신들의 고충을 조금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

혹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할지 몰라서 총선의 시기를 가장 추운 212일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이 별로 도움이 못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한겨울의 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군부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물론 의석으로 보면 여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제도가 결정되어 있어 과반수를 훨씬 넘기고 있다. 그렇지만 창당한지 한달도 못되는 양 김씨의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고 벌써 103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4년후에는 과반의 의석을 차지할 지도 모른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에 개헌을 단행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자신은 7년 단임으로 대통령을 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렇게 듣기 좋게 나는 한국의 워싱턴이 될 것이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이제는 느끼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신군부의 리더를 국민들이 과연 용서할 것인가? 서서히 역사적인 단죄가 두렵게 느껴지고 있다. 그 불안 때문에 전대통령은 장차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와 같은 집권자의 생각을 정치부기자인 이민욱과 입법관료인 강훈이 1985년 봄부터 읽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상록회의 모임에서 그 문제를 계속 토론하고 있다. 과연 장래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