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8강(렘2:14-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5월 29일(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나라처럼 살아가는 악을 행하다가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하여(렘2:14-19);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중요한 개념 몇가지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언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이라고 하는 것은 ①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며 ②마음속으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렘2:19).
(2) 둘째,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반역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선민들이 여호와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맹세를 저버리고 그 옛날 죄인된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렘2:18). 구체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상의 방법을 선호하여 그 종으로 살고자 하며 대대로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온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렘2:14, 민14:3).
(3) 셋째, 언약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패역한 백성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약속의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십니다(렘2:15). 그 결과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그 옛날처럼 다시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렘2:16-17).
(4) 넷째,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끌려가서 제국의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렘2:18). 이제는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똑같은 죄악과 반역을 여호와 앞에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망하고 역시 대부분의 백성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가서 종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렘2:17-19).
(5) 다섯째, 그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섭리는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시며 장래에도 똑같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렘2:14-19).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a homeborn slave)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렘2:14-1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a homeborn slave)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렘2:14);
1) 여기서 ‘종’(從, slave or servant)은 가장 낮은 노예의 신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달리 ‘씨종’ (a homeborn slave)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이 면천이 된다고 하더라도 종 노릇을 하면서 얻은 자식들은 모두 데리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출21:4). 그들마저 면천을 시키자면 돈이 많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고대 계급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그 신분이 부모가 종이면 자식들도 종이 되는 것입니다.
2) 창세기를 살펴보면, 주전 1,876년에 가나안 땅에서 광활한 초지를 장악하고서 대 족장으로 살고 있던 야곱이(창37:12-17, 38:1, 48:22) 그의 자손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를 합니다(창46:1-7). 가나안 땅에 연속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마침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이 그들을 애굽의 고센 땅에서 봉양을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전부 이민초청을 했기 때문입니다(창45:6-11).
3) 그런데 고센 땅에서 이민자로 번성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이 죽고 또한 고센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힉소스 인들이 물러가고 나자 그만 애굽의 신(新)왕국에 의하여 노예신세가 되고 맙니다(출1:8-12).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백년 이상 대를 이어가면서 고달픈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시대에 비로서 여호와의 은혜로 주전1,446년에 노예에서 해방이 되고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출12:37-42).
4) ‘가데스 바네아 반역사건’으로 말미암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다가(민14:1-4, 28-38) 새로운 세대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됩니다(수3:1-17, 12:7-2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역사를 섭리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신앙을 파수하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신6:1-9, 8:11-20). 그러나 이스라엘 후손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 세상의 제국에서 대를 이어가면서 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렘2:14a). 과연 그 연유가 무엇일까요?(렘2:14b)
(2)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렘2:15);
1) 여기서 ‘어린 사자들’(렘2:15a)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 신흥 앗수르제국과 신바벨론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살던 이스라엘 10지파의 자손들이 앗수르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앗수르 변방으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이제는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의 백성들마저 멀지 아니하여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이방제국의 포로가 되어 종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와 같은 두려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요?
2)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아브라함과 같은 선지자들에게는 항상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치게 하십니다(창12:3).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굳게 맹세하신 언약이므로 역사 가운데 그대로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승계하고 잘 지키면서 대내외적으로 여호와의 선지자 및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과 은혜가 가는 곳마다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언약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게 되면 출애굽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서 이방제국의 포로가 되고 대대로 종이 될 따름입니다.
둘째로,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게 하였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2:16-17);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게 하였으니”(렘2:16);
1) ‘놉’은 하(下)이집트의 수도인 멤피스이며 ‘노’로도 불리고 있는 ‘노아몬’은 상(上)이집트의 수도인 테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전 19세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은 중(中)왕국의 시대입니다. 중왕국은 상이집트에서 발흥하여 나일 강변의 하(下)이집트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수도는 내륙에 있는 ‘노’ 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나일 강변의 하이집트가 천하를 지배했던 고(古)왕국의 시대에는 그 수도가 멤피스인 ‘놉’이고 그 약간 북쪽에는 종교도시 ‘헬리오폴리스’가 있는 ‘온’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中)왕국 시대가 되자 바로는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를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그곳을 다스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온’ 땅의 제사장인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의 아내가 되고 있습니다(창41:45).
2) 모세가 활약한 시기는 애굽에서 ‘신(新)왕국’의 시대입니다. 동쪽에서 쳐들어온 셈족 힉소스인들에게 애굽제국이 망하고 상이집트로 밀려난 애굽인들이 ‘노’ 땅에서 다시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모세의 왕조가 오랜 애굽인들의 꿈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힉소스인들을 물리치고 하이집트를 점령한 것입니다. 그때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동족을 출애굽시킨 때가 주전 1,446년입니다. 그때까지 120여년의 세월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인들의 노예로 지낸 것입니다.
3) ‘다바네스’는 남조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자 남은 백성들 일부가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자리를 잡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위치가 그 옛날 고센 땅의 일부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초입에 피난을 간 것이지 깊이 들어가서 피난생활을 영위한 것으로는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애굽으로 백성들을 몰고서 피난하는 지도자들에 의하여 ‘다바네스’로 반강제적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렘43:7). 타국으로 이주한 피난민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의 삶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다바네스’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곳의 애굽인들로부터 머리가 상하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렘2:16).
(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自取, 스스로 취함, 자업자득을 말함)함이 아니냐?”(렘2:17);
1)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 땅의 신왕국에 의하여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는데 다시 그들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게 됨에 따라 애굽으로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서 ‘다바네스’에서 난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의 종살이의 고달픔이 그들의 머리를 다시 짓누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어째서 여호와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고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오래 평강을 누리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러한 머리가 깨어지는 고통을 다시 맛보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2:17).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으로 육신적인 삶만을 영위하게 되자 결국은 세상의 노예로 전락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3) 만약에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뜻대로 실천했더라면 그와 같은 치욕의 역사는 되풀이가 되지를 아니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선민들이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전하고 그들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의 삶 그리고 선지자의 삶을 살아갔더라면(출19:4-6, 마12:39) 가나안 땅에서부터 시온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길이 빛났을 것입니다(사66:18-21).
셋째로,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냐?”(렘2:18);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생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샘솟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곳에 살고 있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 그런데 창조주 여호와께서 모든 피조물을 긍휼로 돌보시고 하나같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공의의 정신을(롬9:22-24) 선민들이 실천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마5:43). 그들은 세상적인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자신들만 여호와의 구원을 만끽하고 주변의 이방인들은 영원히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다가 여호와의 진노로 모두 멸망을 당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종교생활은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제국인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들이 선택하고 있는 약육강식의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우물물을 버리고 세상적인 우물에서 탐욕의 강물을 마시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지적의 말씀이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냐?”(렘2:18)는 것입니다.
(3) 여기서 ‘시홀의 물’과 ‘그 강물’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먼저, ‘시홀의 물’(렘2:18a)은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1) 하나는 ‘호루스의 연못’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호루스’는 신의 아들인데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매의 머리와 함께 호루스의 눈을 가진 현인신으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루스의 연못’은 바로가 주인인 ‘나일 강’을 의미합니다(사23:3, 겔32:2). 그 가운데 나일 강의 동쪽 지류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동북면 고센 땅에 살면서 나일 강의 동쪽 지류의 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창47:6, 11, 출1:11, 12:37).
2) 또 하나는, ‘흑의 물’을 말합니다. 그것은 맑은 물이 아니라 흙탕물을 의미합니다. 조용히 흐르는 물이 아니라 급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쪽 경계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 ‘애굽 시내’를 만나고 있는데 그것이 그러합니다(민34:5). 따라서 ‘애굽 시내’를 ‘시홀 시내’라고 적고 있습니다(수13:3, 대상13:5).
3) 다음으로, ‘그 강물’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앗수르제국은 수도가 티크리스 강의 상류에 있는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제국이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끌고가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와 그 주변의 시리아 지역에서 살도록 조치하고 그 대신에 그곳의 주민들을 이스라엘 왕국의 고토에 식민으로 들여보내고 있습니다(왕하17:23-24).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냐?”(렘2:18b)는 구절은 유프라테스의 강물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네 악이 너를 징계하였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
(1)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악과 반역에 대하여 책망을 하면서(렘2:19a) 여기서는 악에 대해서만 그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렘2:19b). 그렇다면 반역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위에 있는 구절들입니다. 먼저 위의 내용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반역의 정의에 대하여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역이란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을 부인하고서 자신들의 뜻대로 애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여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렘2:17-18). 그것은 가데스 바네아 반역사건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를 불신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불신임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지도자를 세워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달리 살길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민14:1-4).
(2) 본문에서 악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명쾌합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b). ①첫째,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②둘째, 그 마음속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종교행위는 모두가 악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은 여호와에게서 먼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는 그것이 모두 악이라고 하겠습니다. ③그와 같은 악에 대한 정의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를 악하다고 보시고 여호와께서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징벌을 가하시기 때문입니다(렘2:19b).
결론적으로,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게 한 것이 크나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이방족속들에게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온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심을 증거할 수 있도록 말씀도 주시고 기업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여호와의 은혜를 배신하고서 세상의 제국을 더 사랑하여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여호와를 멸시하면서 겉으로는 율법생활을 잘하는 척 꾸미고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또한 매사 여호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방법이 더욱 세상살이에 있어서 낫다고 판단을 하고서 행하는 것이 모두 악입니다.
그와 같은 덫에 걸리어 구원의 생수를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끝까지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복음사역에 전념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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