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9강(렘2:20-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5월 30일(수)
이방 신을 따라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레미야의 묘사에 대하여(렘2:20-25);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한 찬양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도저히 갚은 길이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애굽제국의 신(新)왕국 아래에서 100년 이상 대를 이어가면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아보시고 해방을 시켜 애굽 바깥으로 나오게 하신 여호와이십니다. 완전히 애굽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고자 애굽의 추격군대를 모두 홍해바다에 수장을 시켜버린 하나님이십니다.
(2) 둘째, 광야생활 40년을 통하여 애굽에서의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시키고 신앙훈련을 시켜서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3) 셋째,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60만 군대를 지휘하여 요단 강 동편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을 정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벌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4) 넷째, 요단 강 동편과 서편에 그 넓은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땅의 소출을 먹고 살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신앙을 전파하고 그 본보기를 보여주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실한 믿음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믿음의 열조들처럼 새로운 약속의 땅 천국에서의 영생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창49:29-33, 히11:16).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버리고 제멋대로 육신적인 탐욕에 빠져서 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렘2:20-25).
참고로, 그러한 조짐은 사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을 건너오기 전 모압 평지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짓선지자 발람의 꾀를 따라 재색을 겸비한 미디안의 여인들이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자(민25:15-18, 31:8, 16) 이스라엘의 젊은 수령들이 그녀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를 못합니다(민25:1-6, 14). 그 결과가 다음과 같이 끔찍합니다;
(1) 미디안 여인들은 이스라엘 젊은 수령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많은 모압 여인들을 이스라엘 병사들의 숙영지로 들여보냅니다. 모압의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하여 브올 산으로 은밀하게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 산에서 바알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고 2부 순서로 음란한 축제를 즐긴 것입니다(민25:1-3).
(2) 바알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에 모압의 여인들이 바알의 여사제가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풍요의 농사 신 바알과 다산의 여신인 아세라가 합방을 하고 있으므로 땅에서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사제들과 혼음을 하여 풍년이 들도록 함께 기원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그렇게 멍석을 명분도 아름답게 깔아 주고 있으니 브올 산에서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때가 되면 그 산으로 은밀하게 올라가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수가 자꾸만 늘어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여호와의 십계명을 어기고 이방 신과 우상을 섬기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가담자를 먼저 색출하여 죽이고(민25:3-5) 이스라엘 자손들을 아예 전염병으로 전멸을 시켜버리고자 하십니다(민25:8-11).
(4) 당시 그러한 엄중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게 된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장남 비느하스가 급히 사건의 수습에 나서게 됩니다(민25:7). 그 사건의 주모자인 미디안의 공주 고스비와 그녀의 애인이 된 이스라엘의 젊은 수령 시므리를 창으로 단숨에 척살을 합니다(민25:8, 14-15).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분노의 창이라고 선언합니다(민25:11-13).
(5) 그것을 보고서 여호와께서는 일단 전염병을 중지시키십니다(민25:8). 그러나 벌써 하루만에 2만 4천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민25:9).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여 정예기마병 1만 2천명을 선발하여 미디안 땅으로 원정을 보내라고 하십니다(민25:16-18, 31:1-4). 미디안 5부족국가를 치고 이번 사건을 모의한 미디안 5왕과 그 악한 계략을 제공한 거짓선지자 발람을 잡아서 죽이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민31:5-8, 16).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알 신과 이방 신들 그리고 우상들을 섬기는 모습이 마치 발정이 난 암컷과 같다고 표현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렘2:23-25). 그만큼 원초적인 본능의 유혹과 충동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삶을 살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고백하고서 영적인 도우심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입니다(창17:1). 그와 같은 정직한 맡김과 겸손한 종의 자세가 있을 때에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강력한 은혜가 성도들의 삶을 주장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네가 엿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됨이냐?”(렘2:20-21);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네가 엿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렘2:20a);
1) 사람들은 모두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멍에와 결박을 끊고서 자신의 의지로 한세상을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결코 끊어버려서는 안되는 멍에와 결박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 영적인 탯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끊어버리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올바른 영성이 사라지고 악한 영들의 유혹에 그대로 휘둘리게 되는 육신적인 삶만을 탐닉하게 됩니다(엡2:2, 6:12).
2)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알기 쉽게 (악한 영들의)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살도록 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7-19). 요컨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2)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2:20b);
1)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인 탯줄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세상사람들처럼 육신적인 삶을 즐기겠다고 마냥 뛰쳐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옛날 브올 산과 같은 높은 산을 찾아가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고 2부 순서로 그곳의 여사제들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육체적인 향연을 혼음으로 즐기는 일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민25:1-3).
2) 여기서 ‘푸른 나무’(렘2:20b) 아래라고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이 부끄러운 행위를 할 때에는 은연중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고 생각을 하고서 그것을 가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한 푸른 나무 아래에서 행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부부가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며 여호와의 부르시는 음성에 자신들의 몸을 나무 뒤로 숨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창3:6-8).
(3)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됨이냐?”(렘2:21);
1)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태초에 사람들을 지으실 때에 참으로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렘2:21a)를 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타락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는 육신적이고도 물질적인 욕심을 충족시키는 세상적인 삶의 모습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이방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창6:2-3). 그것을 여기서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렘2:21b)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렘2:22-23a);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2:22);
1) 옛날 사람들은 놋그릇을 닦을 때에 잿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녹이 벗겨지고 윤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할 때에는 비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깨끗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깨끗하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모든 것의 겉모습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2) 먼저 그 속을 들여다보십니다. 그 다음에 그 겉모습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속이 더러우면 그 겉도 결코 깨끗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안과 밖을 모두 깨끗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방법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잿물로 스스로 씻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이 더럽다고 고백하면서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으로 부디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렘2:22 의역).
(2)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렘2:23a);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과 그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십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 진단의 결과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숨어서 은밀하게 범한 일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고 가정하고서 큰소리를 치면서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럽혀지지 아니했습니다. 결코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했습니다”(렘2:23a). 과연 그러한 변명이 통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가 있을지 몰라도 가장 깊숙한 내심과 영적인 상태를 투시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2) 그것은 마치 아무도 보지 아니하는 들판 중앙에서 동생 아벨을 죽여 매장을 하고 나서 완전범죄를 했다고 굳게 믿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항변을 하고 있는 카인의 어리석은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창4:8-9). 땅에 흘러 내린 아벨의 피가 억울하다고 여호와께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창4:10). 그 피를 받아 마시게 된 땅이 견딜 수가 없어서 여호와께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창4:11). 그런데 어떻게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눈을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로,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렘2:23b-2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렘2:23b);
1) 옛말에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하는 으름장이 있습니다.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곱게 실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리를 틀 것이라는 말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심문의 방법은 사람이란 자기 잘못을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분명히 양심에 찔리는 일은 기억을 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를 않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렘2:23b)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2)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브올 산 위에 올라갔다가 그 산을 내려온 흔적이 골짜기에 너의 발자국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민25:1-2, 렘2:20). 그러므로 그 골짜기의 발자국이 여호와께 그가 행한 일을 고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②또 하나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지사라고 하여 절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3)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브올 산에 올라가서 바알에게 절을 하고 2부순서인 육체의 향연에 참여하여 음란한 행위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자신들이 발설하지 아니하는 이상 누구도 그 일을 파헤칠 수가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감은 사람들 앞에서만 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질서를 제정하신 창조주이시므로 잠시 그 시간을 뒤로 돌려서 과거의 증거를 포착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당사자들이 그 골짜기를 올라가고 내려오는 장면들이 마치 CCTV에 찍힌 것처럼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게 변명을 하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2)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렘2:23c-24a);
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십니다(창1:1). 6일간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데 그 마지막 날에 마지막 순서로 최대의 걸작을 완성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입니다(창1:26-27). 그 창조의 방법이 먼저 흙으로 사람의 육신을 만들고 그 코에 친히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영으로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창2:7).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호흡을 함께 나누고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생명력을 누릴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엄청난 타락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끊어버리게 되면 흙으로 만든 짐승과 같은 육신적인 본능으로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러한 타락된 인간의 모습을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빌려서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렘2:23c-24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풀이를 해보자면, 본능적인 육신의 정욕이 발정기에 접어든 암낙타나 들판의 암나귀들처럼 마구 꿈틀거리고 있으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치 짐승과 같아집니다.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를 채워줄 상대자를 찾아서 암낙타나 암나귀처럼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렘2:23c-24a). 참으로 직설적이면서도 적나라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렘2:24b);
1) 발정기에 접어 들어서 날뛰고 있는 암컷을 보면 수컷은 정말 좋은 기회를 얻게 됩니다. 별로 힘과 정성을 들이지 아니하고 쉽게 발정이 난 암컷과 교접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렘2:24bb). 그것이 동물들의 본능적인 짝짓기이며 종자번식의 방법입니다. 그러한 본능적인 욕구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물들의 육신 가운데 심어 놓으셨기에 그것을 피조세계에서는 함부로 제어해서는 안됩니다(렘2:22ba).
2)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생령(生靈, living soul)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창1:26-27, 2:7). 에덴동산에서 여호와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최초의 청지기인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과 합방의 모습을 보면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알 수가 있습니다; ①첫째, 중매쟁이가 하나님이십니다(창2:20-2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안에서 아담이 하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3) ②둘째, 하나님께서 신부 하와의 손을 이끌어 신랑 아담에게 인계하고 있습니다(창2:22).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부인 하와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인 아담이 함부로 아내 하와를 대접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 대접하게 되면 그것은 그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③셋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단 하나의 아내 하와를 만들어 주십니다(창2:21). 어째서 한꺼번에 두개를 취하여 두 사람의 아내를 만들어 주지 아니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monogamy)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4) ④넷째, 신부 하와를 맞이한 신랑 아담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뼈 중의 뼈이며 살 중의 살이 바로 하와라는 것입니다(창2:23). 그것은 흔히 말하고 있는 “더 나은 반쪽(better half)”이라는 고백입니다. 그와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진실로 한 몸이 되고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리고 도저히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육신의 정욕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어하여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영적으로 역사하셔서 아담과 하와의 결합과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 안에서의 결혼과 가정생활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를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한평생을 부부로 살아갈 수가 있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렘2:2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렘2:25a);
1)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그 발걸음을 과연 제어할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렘2:25aa).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를 하나 창세기 제4장에서 들어 봅니다; 그 옛날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장남인 카인의 마음속에서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죽이고자 하는 살의(殺意)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러나 카인은 스스로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를 못합니다. 동생 아벨을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창4:8).
2)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죄의 소원을 이루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렘2:25ab)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뜻은 육신적인 벌거벗은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치 벗은 발에 신발을 신기듯이 그렇게 갈증이 나서 타는 듯한 목에 시원한 생명수를 공급하여 갈증을 완전하게 해소를 시키라는 것입니다.
3) 구체적으로, 그 생명수를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서 성도들에게 공급하여 주십니다(요4:13-14). 성령님께서 오늘날 생수와 같이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하셔서 갈증을 영적으로 풀어 주시고 또한 이 세상과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눅24:49, 행1:8).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간구를 할 때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하여 주십니다(요14:12-16). 그 능력으로 피조물인 육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2)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렘2:25b);
1)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여호와 앞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다시 서기만 하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자신의 육신적인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여호와의 방법이 틀렸고 이방 신들의 방법이 더 효과적이고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렘2:25ba).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결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렘2:25bb).
2)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상사람들이 그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또한 따르고 있는 이유는 다음 두가지로 보입니다; ①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이타적인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손해만 발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론을 버려버리고 세상적인 방법론을 선택한 것입니다.
3) ②또 하나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19:18, 마5:43-48, 막12:30-31).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용서하며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선민들이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 주변의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진노로 망하거나 자신들의 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마12:38-39).
결론적으로, 정욕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사람들에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법규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범죄만 처벌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심 그 마음속에 감추어 있는 탐욕과 정욕을 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부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증이 난 목을 축이고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을 받아 자신과 세상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대속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육신을 이길 수가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하고서 주님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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