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0강(요17:5-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2. 02:25

요한복음 강해 제140(17:5-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4(주일새벽)

 

창세 전에 독생자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는 무엇인가?(17:5)

 

사도 요한은 창세 전에 독생자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화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을 하면서 그의 복음서의 기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1-5).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보다 더 잘 표현을 하고 있는 문장이 없을 것입니다(1:14). 굳이 사도 요한의 기록에 필적할 수 있는 깨달음을 찾아보자면 그것은 사도 바울의 신관일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

위의 두 문장으로부터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첫째, 독생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했으며 그는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본체에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1:1, 2:6). 둘째,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1:1-3, 1:1-3) 독생자가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1:26, 1:3, 10). 셋째,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생명을 불어넣고 특히 인생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는 역할까지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1:4, 11:27, 2:8). 넷째,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독생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인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날 때까지는 그 정체가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11:27, 1:5, 3:12-17). 다섯째,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시는 이유는 피조물들이 구원을 받아 창조주께 돌아와서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영생을 얻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1:11-13, 17:2, 2:11).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독생자의 정체성과 사역의 특징 가운데 당장 본문과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잠시 그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겨 두고서 스스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성육신을 했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무덤 속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창조주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자신의 신원을 회복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당장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승천을 하게 되면, 독생자의 영광의 회복이 다시 필요합니다”. 그 내용이 고스란히 17:5’절 말씀 가운데 숨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역사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그의 글 2:8-11’ 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17:6a)

 

아버지의 이름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의 구좌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만이 그 구좌에 접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의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기존 창조의 질서를 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능력을 함부로 피조세계에 선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수소폭탄보다도 더 두려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실체가 잠시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엿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6:9-15).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두 마리의 생선요리로 이만 명이나 되는 청중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곳간이 열린 결과입니다. 그 곳간의 열쇠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관리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날 때부터 소경인 거지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서 새로운 눈을 얻도록 해주고 있습니다(9:1-7).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 능력을 인출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을 드려서 그 이름을 빌려서 창조의 능력을 행하고 있다고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둘째, 하늘 나라의 출입증과 모든 거주권이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발부가 될 것입니다(8:35).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가서 그 거주권을 얻어서 오겠다고 말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14:2-3). 그렇게 이해를 할 때에 여기서 예수님이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하여 그토록 열심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17:6, 9-11).

 

아버지가 아들에게 넘겨준 것들은 무엇인가?(17:6b-11)

 

첫째, 사람들을 넘겨주었습니다(17:6a).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도록 만들었습니다(28:20, 17:6c). 그 말씀에 의거하여 제자들은 그들의 소속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옮겨진 것을 알았습니다(17:7). 둘째, 말씀을 넘겨주었습니다(17:8a). 그 말씀을 예수님은 복음으로 잘 정리하여 다시 제자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17:8b). 말씀의 계시와 설명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온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를 이 땅에 성육신시키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17:8c).

셋째,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을 넘겨주었습니다(17:9-10). 본래 모든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께만 올려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20:3-5, 6:13). 그런데 이제는 그 영광을 하나님과 그 아들인 어린양에게 동시에 올려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5:13). 넷째,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17:11b). 그 이름을 다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의 제자들을 온전하게 지켜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7:11c).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합니다(17:11a).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되면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그곳에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곳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3:34-35, 14:15-17). 그 계명을 지키면 성령님이 강림하여 제자들에게 내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전에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예수님이 지극히 원하고 있습니다(17:11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