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37강(요16:16-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29. 07:16

요한복음 강해 제137(16:16-2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의 의미(16:16-19)

 

오늘 날은 예수님의 위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발생한 사건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 무덤 속 부활과 승천, 성령의 강림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약간의 시간의 차이를 두고서 숨가쁘게 전개가 될 것입니다. 이미 정확한 예언이 스승으로부터 여러 번 있었지만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는 그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제자들입니다(12:7, 23-24, 13:36-38, 14:2-3). 그들의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사건의 전개를 예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성과 세상적 경험 그리고 사고방식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전히 판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16-19). 그래서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제자들끼리 수군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16:18).

예를 들면,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으면 삼일 만에 스스로 부활을 한다고 합니다(16:16-17).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그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1-35).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사흘 후 부활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합의가 된 사항이므로 변개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세 차례 똑 같은 예언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8:31, 9:31, 10:34).

그렇게 구체적으로 세 차례나 예언을 하고 그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왜 제자들이 한결같이 믿지를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라는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인 것입니다. 만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제물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29). 누구나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에 푹 빠져있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죽어서는 아니 됩니다(12:34). 영원히 살아서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고 다윗의 왕좌에 다시 앉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패권국 선민의 나라가 부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고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민에게는 영광이지만, 주변 이방민족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될 것입니다.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결코 아닙니다. 선민들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며 이 세상에서 특혜와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끼리끼리 의식에 불과합니다. 집단적인 이기주의야말로 복음에 있어서도 빈익빈, 부익부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 모두를 자신들과 자기 민족만 독차지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이며 이방인들을 모두 자신들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지배의 야욕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한 사상을 지칭하여 한 마디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8:33).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16:2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은 대조적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허무하게 스승님을 잃어버린 충격 때문에 괴로워하고 곡하며 애통해할 것입니다(16:20a). 비록 그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에는 지난 3년반이라는 공동생활의 정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유대교지도자들은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16:20b). 너무나 간단하게 그리고 손쉽게 안티 엘리트’(anti-elite)인 나사렛 예수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국론이 분열될 수도 있는 위기가 사라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가 될 것입니다.

세상 일이란 그 당사자가 죽고 나면 모두 역사 속에 파묻히는 법입니다.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며 그들의 주장이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주도하는 역사에 있어서만 적용이 되고 있는 원칙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성격이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항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21:1-2, 3:5). 하나님의 가장 큰 권력은 부활의 능력입니다(37:5-10, 11:42-44, 8:11). 그 능력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절대선의 창조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를 살릴 것입니까? 그렇게 자명한 진리를 사탄이 깜박했다는 것은 욕심에 그만 눈이 어두워지면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유혹을 받았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땅을 치고 후회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고서 40년 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반면에 후회와 더불어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감격에 겨워하게 될 것입니다(16:20c).

 

해산의 기쁨과 옥동자가 가지고 오는 큰 선물(16:21-24)

 

가임 여성이 임신을 하고 열 달간 태아를 배속에서 키우는 동안에는 고통이 심합니다. 그리고 분만의 고통은 더 심합니다(3:16). 그래서 다시는 아기를 가지지 아니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고난 끝에 기쁨이 찾아오듯이 극도의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을 닮아있는 아기가 이 세상에 탄생을 하고 고고의 함성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모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순간은 산모가 창조주만이 누릴 수 있는 창조의 기쁨을 비슷하게 맛보고 있는 때입니다(1:31). 그 해산의 기쁨은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아기를 가지고 싶다!”.

사람이 자식을 낳고 자신과 같은 생명체를 이 세상에 내어 보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보다 더 값진 일을 수행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또 수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라헬이 그러했습니다; “(라헬)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30:23-24). 그 점을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16:21).

분만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극형이기 때문에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시민에게 금지하고 있는 형벌입니다. 단지 로마의 반역자나 주인을 해치려고 하는 노예에게 가하는 극단적인 형벌입니다. 그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서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견디고 나면 어떠한 옥동자가 태어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전에 세 가지의 선물이 그 일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 몸은 시공간에 갇혀있는 유한한 몸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을 할 수 있는 몸입니다(20:19). 영생하는 몸입니다. 승천이 가능한 몸입니다(24:50-51). 한 마디로, 영적인 삶에 충실한 몸입니다(8:9-17). 둘째,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줄 수가 있게 됩니다(16:7). 그 임재와 동행의 역사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자들이 될 것입니다(1:8). 그 결과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16:23-24). 그 기도의 응답은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부활하여 승천하시게 되면 하나님의 보좌 옆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올려지고 있는 제자들의 기도를 듣고서 판단을 할 것입니다. 만약 그 내용이 지상명령의 수행을 위하여 반드시 요청이 되는 사항이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부여되어 있는 천하의 권세를 가지고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뒷받침을 할 것입니다(28:18-20, 1:21-23).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지원할 수 있도록 이미 전결규정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16:23). 창조주의 능력과 권세로 지원하는 것이기에 그 응답은 미물에 불과한 제자들과 성도들이 감히 꿈도 꿀 수가 없는 대단할 것이 될 것입니다(18:27).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면서 주님에게 감사하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성도들은 남은 평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