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35강(요16:1-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27. 19:30

요한복음 강해 제135(16:1-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30()

 

장차 제자들에게 닥치는 두 가지 위험(16:2)

 

예수님은 다음날이면 체포를 당하고 제자들은 흩어져버릴 것입니다(14:27). 그 사실을 제자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신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은 아시고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며칠이 지나면 부활하여 제자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40일이 지나면 제자들을 남겨두고 홀로 승천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위험이 제자들에게 닥치게 됨을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16:2a). 둘째, 죽임의 위협을 당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배교자이며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유대교지도자들이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6:2b).

오늘 날 기독교가 유대교의 하나의 분파라고 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개혁하여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의 백성들에게 개방하자고 주장했던 소위 힐렐학파의 전통을 나사렛 예수일행이 잇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20세기 후반에 바울신학을 연구하면서 3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은 본문 말씀에 비추어볼 때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출교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16:2).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파는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다르기 때문에 배교자이며 이단이기 때문에 죽여도 좋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16:2).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가 유대교의 일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교지도자들의 판단과 오늘 날 자유주의 바울신학자들의 견해가 모두 틀렸다고 하는 더 확실한 증거는 사울의 회심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요청하여 유대교인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배교자들을 잡아올 수 있는 일종의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서 신나게 시리아의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입니다(8:1, 9:1-2). 그가 다행스럽게도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9:3-19). 그 결과 사울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서 이른 바 사도 바울로 거듭나게 됩니다(22:14-21, 1:14-2:1). 참고로, 다메섹 사건의 의미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로는 김세윤 박사를 손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16:3), 그리고 성령님이 오시면 그들은 어떠한 꾸중을 받게 듣는가?(16:8-9)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16:3). 유대교인들이 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 역시 이미 예수님이 설명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한 신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상세하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구약시대에는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서 이 세상에 전한 선지자들에 의하여 유대 땅에 전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은 불행하게도 선지자들의 주장과 예수님의 설명을 모두 배척하고 말았습니다(1:5, 10-11, 7:51-53, 10:3).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선지자들의 증언을 유대교인들이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모세와 이사야와 다윗의 증언을 모두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1:26),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3:22),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인간의 셈본으로 하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긴다고 우기고 있는 자들이 바로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이 그들의 신관에 맞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인들의 교리의 한계이자 그들이 자초하고 있는 역사적인 비극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의 신비와 지혜를 모두 재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이 바로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가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 신이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처신을 할 수가 있을까요? 결국 그러한 종교적인 지도자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 교리의 무류성을 주장하면서 매년 드리는 제사와 매주의 예배로 마치 의인이 된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의의 기준으로 삼으며 함부로 세상적인 권력을 사용하여 영적인 공동체를 지배하려고 할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철퇴를 맞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실 것입니다(16:8). 그 다음에는 로마의 군대가 그들의 성을 파괴하고 성전을 불태워버릴 것입니다(13:1-2). 구체적으로 책망의 내용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메시아의 죄 사함의 은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라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메시아라고 이미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교인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입니다(16:9). 자신들은 매년 드리고 있는 번제로 이미 죄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제물로 근본적인 죄 사함이 필요한데 그것을 부인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한 것을 책망 받게 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은 죄인이고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의인이 아니냐고 반론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10:2-3).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이방인까지 만민을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 책무를 수행하라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19:5-6). 그런데 그 공의의 정신은 버려버리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선민사상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선민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16:10). 그래서 유대인들이 책망을 받게 됩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을 하여서 적용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계시의 전달을 외면하고서 그 대신에 장로들의 유전과 랍비들의 주석만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세부규정을 잔뜩 만들어서 율법주의 종교생활을 강요하고 있을 뿐입니다(7:6-9). 그들의 잘못된 종교행위를 비판하고 있는 예수님을 오히려 심판하고 처형을 시켜버리려고 도모합니다(2:23, 36, 7:51-53). 그 일이 훗날 성령님의 호된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16:8). 이미 세상임금처럼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율법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들이 장차 역사적인 심판을 면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16:11).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16:1, 4, 5-7)

 

첫 번째 방법은 예고를 해두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6:1)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지(先知, 미리 아는 것)하게 되면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막상 일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필요한 대비책을 미리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많이 깨닫게 되면 누구나 선지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16:13). 하나님께서는 미리 예언하신 그대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미리 성도들은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엄청난 유익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리 예언을 해둠으로써 막상 나중에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것임을 알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16:4a).  그렇게 예언과 성취를 대조하여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을 믿게 됩니다. 환언하면, 하나님 말씀의 진정성을 신뢰하게 됩니다. 결국 믿음이 커지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유익이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주시는 것입니다(16:7). 예수님이 아니 계실 때의 공백을 성령님이 메워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굉장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공동체에는 함부로 사탄이 날뛸 수가 없었습니다. 창조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독생자가 사람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장소에 악한 영들이 틈을 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항상 잔치자리에 있었으며 그 마음 속에 영적인 고민이나 세상적인 근심이 없었습니다(9:15). 그 점을 예수님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16:4b). 예수님의 허락이 없이는 사탄조차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13:27).

이제 그 엄청난 창조주의 보호의 우산이 잠시 제자들에게 걷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견디면 엄청난 보호막이 다시 생길 것입니다. 독생자와 같은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또는 장차 어떻게 되는지에 관하여 길게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16:5-6). 성령님은 완전한 영이시기에 제자들이 장차 칭의의 은혜를 입게 되면 영원히 함께 거주하실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영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유익이며 은혜인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결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제자와 성도들을 결코 고아와 같이 내어 버려두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다만 문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기 위하여 가출을 하고 있습니다(1:28-32). 또는 아예 탕자와 같이 한 재산을 사전에 달라고 하여서 창조주를 떠나서 세상의 향락만을 즐기고 있습니다(15:12-16). 한 마디로, 구원과 영생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그 인생이 아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하나님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15:20, 10:21).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28:18-20, 10: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