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32강(요15:2-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24. 21:21

요한복음 강해 제132(15:2-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27()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방법(15:2-5)

 

예수님은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5:2). 과수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가지는 실과를 많이 생산하기 위하여 먼저 많은 열매를 싹트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열매들이 모두 제대로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작은 가지에 너무 많은 열매가 열리게 되면 서로 상처를 내고 양분을 서로 얻고자 다투게 됩니다. 그러다가 필경에는 서로 크게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과의 크기가 작아져서 별로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지와 열매의 싹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먼저 전지를 해주고 그 다음에는 벌레 먹고 상처 난 가지를 찾아서 깨끗하게 치료를 해줍니다. 그리하여야 건강한 가지에서 좋은 실과를 얻을 수가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열매를 많이 얻자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일관해야만 합니다.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을 하고 있는 신앙생활로써는 좋은 열매를 맺기가 힘듭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15:3).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자면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당장은 예수님이 일러준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렇지만 깨끗하고 경건한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둘째, 계속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제자들이 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5:4). 신앙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 가지가 된 성도 혼자서만 깨끗하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5:4-5).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서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예수님처럼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생활화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각별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어떻게 되는가?(15:8, 11)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한 마디로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15:8). 하나님 아버지가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15:1). 농부가 포도나무를 키우는 이유는 좋은 포도열매를 많이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그 열매를 가지고 농부가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그 최상품의 포도주는 천국잔치자리에서 사용이 될 것입니다(2:10, 3:29, 22:18).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많이 양성해내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도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8:18-20).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하여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것이 바로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고전15:24).

거듭난 자가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주인을 발견하고 삶의 목표를 발견한 자가 그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 기쁨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을 말씀 가운데서 깨닫고 부활과 영생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나가는 삶이기에 후회나 미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3:8-16). 그러한 기쁨을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후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사도 바울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처럼 이방인 사도로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보면, 물과 같은 밋밋한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향취가 나고 값진 인생으로 변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의 인생이 쓰임을 받고 있다고 깨닫게 되면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기쁨을 사도 요한이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2:9).

 

어떤 경우에 버림을 받게 되는가?(15:6, 9-10, 12)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생명의 기운이 마르게 됩니다(15:6a). 매일 말씀을 공급 받지 아니하게 되면 영적인 기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음식을 매일 섭취하지 아니하게 되면 육체가 마르고 병드는 것과 같습니다. 병든 육신은 마른 나뭇가지보다도 못한 것이 될지 모릅니다. 마른 나무는 땔감으로라도 사용이 되지만 말입니다(15:6b).

그렇다면, 사람이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충실하게 생활화하는 것입니다(13:34, 15:1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깨끗하게 씻겨준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처럼 행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을 따라 서로 섬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3:14-17, 34). 그리고 그렇게 스승이 행한 것처럼 행하는 자들이 제자로 여김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35).

결론적으로,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영적으로 언제나 사도들의 사역에 동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사역의 현장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아니하게 되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성도의 삶이 건조해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침내 생명력을 공급받지를 못하고 말라져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15:6).

그런데 그 사랑의 계명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요?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세족의 의식이 행해졌습니다(13:4-17). 그 의식을 행하면서 새로운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여기서 천국이 경영되고 하나님의 유일성이 유지될 수 있는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남을 동정하고 도와주며 아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스스로 상대방의 종이 되고 상대를 주인으로 섬겨주는 것입니다(2:1-4). 선생이 되고 주인이 된 자가 제자이며 종인 사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13:34).

그 모습의 원형이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인 독생자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더불어 창조의 역사를 이룬 장본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4). 사도 바울은 독생자가 하나님의 본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2:5-11). 그러나 독생자가 이 세상에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을 하였다는 것은 스스로 피조물이 되고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독생자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창조주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끝까지 그 뜻을 따르며 섬기고 있습니다(14:36, 5:30, 10:36-38). 한 마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3:16-17).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렇게 행하고 있기에 창조주 하나님이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도 함께 하시고 부활의 창조를 베푸실 것입니다. 승천과 신원의 회복이 천국에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사랑을 하고 있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하나의 의사결정으로 귀결이 됩니다. 마치 한 분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사도 바울이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5-6). 만약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관계가 깨어져버린다면 하나님의 유일성도 유지가 되지를 못하고 천국마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