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24강(요14:7-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9. 11:36

요한복음 강해 제124(14: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19()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제자들, 그러나 이미 보여주었다는 예수님(14:7-9)

 

일찍이 바리새인 랍비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3:1).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방법과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했습니다(3:2-5). 그 때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답변했습니다(3:5).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3:4).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도대체 어떻게 또 어미 뱃속에 들어가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선지서에서 예언하고 있는 이른 바 물과 성령의 오심에 대하여 무지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실 것입니다(2:23-24). 그리하여야 약속의 땅에 풍년이 오는 것처럼 영적으로 이 세상에 추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4:36). 이른 비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의 오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2:23). 늦은 비는 종말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2:28). 만약 하늘에서 오는 구원의 빗물과 성령의 강림을 니고데모가 믿고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교의 선생인 니고데모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이르기까지 그 예언의 실현을 통찰하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3:10, 14:5, 8-9). 지금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는 저자 사도 요한도 그 때에는 그러했던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비록 빌립의 질문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위와 같은 예언에 대하여 무지했으며 특히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이해도 없고 깨달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했던 그들이 언제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을 떴으며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24:44-53, 2:1-42, 고전15:3-8). 그 때부터 그 동안 이해가 되지 아니하고 있었던 스승 예수님의 영적인 비유와 상징들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양육과 선교의 현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깨달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를 적고 있는 것이 지금 사도 요한의 제4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2:22).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들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4:8). 그렇지만 예수님은 달리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함께 오래 지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4:9).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진정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 뿐입니다(3:15, 1:18).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태어나는 메시아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성령의 사람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정체가 하나님 본체의 성육신입니다(2:6-8). 그리고 창조주의 영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1:14, 18).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으며 36개월 동안 열두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여러 차례 행사를 했습니다(2:9, 4:53, 5:9, 6:13, 9:7, 11: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창조주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12:37-40, 2:23, 7:51-53). 오로지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욕이 앞서서 온 세상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잊어버리고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19:5—6, 1:2, 3:1-2, 10:2-3). 그것이 제자들의 실수이고 동시에 유대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선민의 지위와 다윗 제국의 회복에 정신이 팔려 있어 자신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현세적인 축복과 자신들의 야망의 달성에 눈이 어두운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보이지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의 본 뜻은 드러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현실이 안타까워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4:10a)

 

육체와 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14:10a). 일반적으로,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는 육체는 동시에 두 공간에 존재할 수가 없으며 두 개의 시간대에도 거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의 육체 속에, 그리고 동시에 우주 바깥의 하나님의 처소에 거주할 수가 있습니다(1:2).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속에서도 역사하고 있습니다(14:10b). 그것이 예수님이 신성을 가졌다는 의미이고 그 창조주의 능력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 많은 표적과 이적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발생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9:1-7). 38년된 불치의 병자이며 전신장애를 가진 자를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합니다(5:6-9).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신데 그 정도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죽은 지 겨우 나흘 밖에 되지 아니한 베다니의 나사로를 되살려내지를 못하겠습니까?(11:43-44)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논리와 현실이라는 환경 속에 갇혀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논리와 현실 속에 안주해있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의 흐름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수년 간 직접 보고서도 창조주이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굉장히 둔감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월절 마지막 만찬자리에서조차 그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제국의 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이는 증거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강건하게 세우신 것과 같은 이적을 그들의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시면서 창조주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던 것입니다(14:11).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이 세상에 만민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까지 믿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하나같이 없었습니다(3:16-17).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 바리새인들과 진배가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 부활하시는 주님이 그들을 다시 찾아와서 재교육을 시키게 됩니다(20:19-31). 그리고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임재시킵니다(1:8, 2:1-4). 그 결과 그들은 초대교회의 형성의 주역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와 같은 영적인 동거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기 위하여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고 지금도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을 통하여 선교현장에서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그 믿음은 더욱 깊어집니다”(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