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26강(요14:16-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20. 20:13

요한복음 강해 제126(14:16-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21(주일새벽)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죄를 범한 인간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특별한 조치를 이 세상에 은혜로 베푸시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청산할 수 있도록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1:29) 이 세상에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어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게 했습니다(22:13-14, 12:13).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자신을 위한 속죄의 피임을 알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칭의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3:14-15). 그 둘째는,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는 것입니다(14:16). 칭의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건설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고자 하십니다. 성령님의 강림과 임재는 성도들의 남은 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고자 하는 조치입니다. 땅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결코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들의 남은 평생을 전부 바쳐서 매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영이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임재하여 그 목숨이 다하도록 영원토록 그 인생길에 동행하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임재와 동행의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임재는 헬라어 전치사로 보면, ‘에피에 해당합니다. 그 말은 완전히 성도를 감싸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를 빈틈이 없이 감싸고서 완벽하게 보호를 하고 있습니다(15:1, 소위 완벽한 방패막이입니다). 수동적으로 보호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사역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능력이 모자라면 성령님이 계속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채워주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부어서 충만한 상태를 만들어 주고 있는 모습은 마치 1:2’ 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면서 우주를 보호하고 그 수면에 능력을 부어주고 있는 모습이 실제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동행은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마치 동무처럼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 전치사 파라의 뜻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종말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른 비늦은 비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일찍이 요엘 선지자가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2:23, 28).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역사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예언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도들의 남은 삶을 통하여 예언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의 인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주인님으로 모시고 살게 되면 성도들은 거듭 난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시민권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이 임재하여 도와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그 옆에서 항상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모두 이 땅에서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진리는 똑 같은 것입니다. 서로 모순이 되거나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그것은 어느 하나가 진짜이고 다른 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틀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두 번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의 뜻이 서로 어긋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두 보혜사가 모두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파송을 받아서 이 세상에 왔다는 가설을 뒤집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창조주 하나님 안에는 복수의 형상과 모양이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독자적인 인격체로 사람들에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3:22),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5:1). 복수이신 하나님, 그 분의 말씀이 모두 하나로 통일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우리 피조물들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세 분의 말씀이 모두 하나의 의미로 피조의 세계에 전달이 되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생까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님이 성도들을 움직이고 있을까요? 내주하여 역사하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에 거주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 전치사 의 의미입니다. 속사람 속에, 심령 속에 성전을 삼고 계실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 temple)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여기서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들의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성도들의 몸과 인생은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이 점령하여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8:1-2, 9). 하나님 나라의 영토로 편입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께서 그 몸을 사용하여서 만민구원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영적으로 성도의 중심에 좌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헬라어 전치사 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