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22강(요13:36-14: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7. 03:25

요한복음 강해 제122(13:36-14: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17()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13:36-38)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유훈(遺訓,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13:34).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신 것처럼 그렇게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13:13-17). 그것은 상대방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자가 바로 큰 자이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5-6).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스승이신 예수님, 나아가서 독생자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된 도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3:35). 둘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보라는 것입니다(21:15-19). 양들이 이끄는 데로 목양을 하면서 남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 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 양을 넣어주시고 목자로 발령을 내시면 충성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그렇게 목양을 해야 합니다(10:11, 21:19). 셋째,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하시면서 먼저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20:21-23). 그것은 이미 30년 전에 작성이 되어 초대교회에 공람이 되고 있는 공관복음에서의 주님의 지상명령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28:18-20, 24:44-49).

  그 가운데 첫 번째의 유훈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주신 것입니다(13:3-4, 14, 34).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가슴이 섬뜩 했습니다. 수배를 받고 있는 스승이 곧 무슨 일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a). 그 질문은 유명합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가 따라가고 싶어서 외치고 있는 말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이천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그 말, “쿼바디스, 도미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고대 라틴어는 많은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되었으며 오늘 날까지 세상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의 의지와 힘으로는 자신을 따라올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13:36-38).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 그 죽음의 자리까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 제자들의 한계입니다. 주님보다 자신의 목숨 줄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육신의 요구와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외침을 잠재우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의 경우에는 스승에 대한 배신감마저 겹치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계자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외세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할 줄 알았더니 예수님이 맥없이 체포를 당하고 처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메시아인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 배신감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외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18:17, 25-27). 그렇게 될 줄 예수님이 벌써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베드로의 심령에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되면 그 마음 속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역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b).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비로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유훈들, 곧 목양을 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제자들의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에 비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항상 도움을 간구하면서 복음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14:1-4)

 

스승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 다음에 무덤 속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길을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인 성도가 따라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을 소망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고 나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2:32-36). 성령님이 강림하여 내주하시자 그 소망 가운데 사도로 활동하면서 초대교회를 건설하게 됩니다(2:37-47, 4:4, 6:7).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모두 사도로 그리고 목자로 이 세상에 파송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자신을 따라올 수 없지만 부활,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천국에까지 따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순서대로 대속의 십자가의 길부터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덤 속 부활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다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승천하신 다음에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들의 목숨이 다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 그들이 영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거처를 준비해 놓고서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고 벌써 선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님을 알게 해주기 위하여 실제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되살려내신 바가 있습니다(11:42-44).

그와 같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1-4).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는 히브리 정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제53장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는 여호와의 종이 그 보상으로 존귀하게 된다고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3:10-12). 그렇지만 당장은 스승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고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제자들이 근심에 휩싸여 있을 따름입니다(14:1). 그러나 믿음은 고난을 겁내거나 근심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고난 다음에 있는 구원과 영생을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믿을 때에는 갈 길이 확정이 됩니다. 이 세상을 믿음으로 이기고 주님이 먼저 들어가신 천국에 성도들이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앞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모두 예비하기 위하여 지금 예수님이 길을 떠나시고 있습니다(14:2-3).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남은 인생 가운데 주인님으로 모시고 살게 되면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