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19강(요13:21, 26-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6. 07:57

요한복음 강해 제119(13:21, 26-2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15()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 예수님의 심령이 왜 그토록 괴로운 것인가?(13:21)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우신 이유는 곧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13:21b)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있는 12명의 제자는 지난 36개월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자들입니다. 이제 그 가운데 하나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줄 터이니 돈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22:1-6). 한 마디로, 스승인 자신을 배신하고 돈을 받고 내부 고발자가 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 자가 지금 멀쩡한 얼굴로 자신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예수님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참담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정도의 일 때문에 그토록 심령이 괴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숙한 영적인 이유가 다음과 같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이 바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6:39)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 가룟 유다가 영원히 잃어버린 양이 되고 말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의 양심에 호소를 해보고자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떡 한 조각을 적셔다 갸룟 유다에게 건네어 주는 것입니다(13:26). 이미 그의 마음 속 계획을 알고 있으니 부디 마음을 돌리라는 권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간절한 눈빛과 괴로운 마음을 외면하고 맙니다. 마지막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사탄이 그 마음을 완전하게 장악해버립니다(13:27a). 모든 일이 끝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벌어질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말씀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13:27b)는 것입니다.

  둘째로, 긴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가룟 유다와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6:40)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릴 방도가 이제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 떠나가고 남자로는 마지막 남아 있는 자가 12제자입니다(6:66-68). 그들이 12사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이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또 떠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허무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그지 없습니다.

셋째로,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외부고발자만 있어도 됩니다(18:29-30, 19:7, 14:56-65, 15:3-4). 그런데 내부고발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도 회계와 재정의 중책을 담당하고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12:6). 신임을 하지 아니하면 결코 돈궤를 맡기지 아니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적인 것을 더 사랑하여 스승의 영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배신을 합니다(12:43, 딤후4:10). 이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쾌재를 부르며 모든 유대인들에게 흑색선전을 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와 끝까지 함께 지냈던 가룟 유다라는 제자의 말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고 혹세무민(惑世誣民, 무속적인 말과 이적으로써 세상사람들을 꾀는 것)을 하면서 유대교를 반대하고 있다고 공포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을 떠나간 모든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시간이 임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29).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제자인 가룟 유다의 죄까지 용서해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그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서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는 스승의 기대를 끝까지 저버리게 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여러 차례나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그 부활의 예언조차 믿지를 아니한 것입니다(5:21, 11:25, 8:31, 9:31).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27:3-5).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 사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구원의 방도가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제물, 곧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만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사죄의 효과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22:10-14, 1:29, 2:36-42, 4:12, 7:27). 스승 예수와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가룟 유다가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조차 믿지를 아니하고서 철저하게 자신의 판단과 생각만을 앞세우다가 결국은 자살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1:16-20). 그 결과 영광스러운 열두 사도의 반열에서 그 이름이 빠지고 대신 맛디아가 들어가게 됩니다(1:2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