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116강(요13: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7월 12일(금)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요13:11)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의식을 행하시고 있습니다(요13:4-15). 그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날도 그러하지만 특히 서열이 엄격한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종이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그와 같은 소위 ‘섬기는 자의 정신’으로 서로 사랑하고 목양을 하여야 한다고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습니다(요13:13-15). 일찍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3:5) 그 때 말씀하신 ‘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세족식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 점을 이미 제115강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대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승을 배신하고 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 여기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이 바로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고 사도 요한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요13:11).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바로 배신자이며 나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에 은 30을 받고서 팔아 넘길 자라고 직접 그 이름을 말씀하지 아니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렇게까지 자세한 미래지사를 모르고 계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아니하다는 점을 벌써 모세오경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신4:36),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대강의 말씀을 교훈으로 주시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더구나 그들의 지도자로 세운 모세에게는 대면하여 직접 말씀을 나누시던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서 독생자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계시의 권한을 일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계획을 모두 통찰하고 계신 유일하신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배신의 시나리오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 요한복음 제13장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요13:26). 그렇다면, 왜 가룟 유다의 이름을 분명하게 거론하지 아니하고서 변죽을 울리고 있는 것일까요? 왜 번거롭게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주는 간접적인 방법을 취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직도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를 ‘신앙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다 품에 안고서 잘 되기를 바라면서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해서 교회가 거룩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성결의 과정을 걷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넘어지면 서로가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믿음이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세족의 정신은 그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에 비추어서 가룟 유다에게까지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한번 더 제공하고 계시는 선한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요10:10-11).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반대자들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복음을 달리 해석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나 원시적인 영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생전에 예수님을 모셨던 열두 사도들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본토 유대인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도 바울은 많은 교리서를 작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이방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자신의 사도성과 사도직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9:2). 결국 사도성을 인정하고 사도직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도들의 인정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와 똑 같은 말씀을 본문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나를 선생으로 대접을 하려거든 나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를 주인으로 대접을 하려거든 주인의 손과 발이 되라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삼고서 지난 3년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틀림이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나다나엘과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1:49),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예수님이 선생으로서 제자들에게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겼으니 종들인 너희들도 주인의 손이 되어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가르침과 명령을 어기게 되면 예수님을 선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또한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있지 아니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실천하면서 목자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방법(요13:14-15)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손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강력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듣는 것만으로써는 교육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청각은 5분의 1의 쓰임새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확신과 인식을 위해서는 다른 감각기능의 도움을 받아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각과 촉각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물론 미각과 취각이 함께 하는 밥상공동체이면 더욱 완전한 분석과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한 몸’이라는 의식이 강화되고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세족의식의 본을 손수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오감을 만족시키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그 자리에서 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서 또 하나의 가르침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장차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열두 제자들의 선생으로서 세족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장래에는 제자들이 새로 믿는 자들의 선생이 되어 그들에게 세족의식을 행하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성숙한 성도의 본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장차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고 사도들은 그들의 선생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새로 믿게 되는 자들을 열두 사도들이 선생이 되어 예수님처럼 그들을 돌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돌보는 방법은 몸소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주인과 종의 관계의 정립이 아닙니다. 서로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서 주님의 손과 발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주님이 행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관계를 가지고서 탄생하게 되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은 일반사회의 조직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주종관계, 상하관계, 서열의식에 입각하고 있는 사회적인 조직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섬겨야만 하는 새로운 조직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손수 모범을 보임으로써 새로 믿는 자들을 양육해내어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그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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