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13강(요12:44-5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5. 08:12

요한복음 강해 제113(12:44-5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9()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는 누구인가?(12:44-45)

 

보통 철학적인 질문은 세 가지로 귀결이 된다고 합니다; 첫째,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둘째, 나는 누구인가? 셋째,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가? 요컨대, 인생의 시작과 끝,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삶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질문이 그것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 세 가지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질문형식으로 바꾸어 보면, 그 내용이 쉽게 파악이 됩니다; 첫째,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는 누구인가?(12:44-45) 그것은 인생의 시작과 끝,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12:46-47) 그것은 삶의 목적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삶을 인도하고 있는 창조주의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12:48-50).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분에 대하여 예수님은 매우 은유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모호한 내용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12:44-45).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은 현재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전혀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보이지 아니하는 그 분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이 본질적인 믿음의 문제라고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 그대로,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창조주가 이 땅에 보낸 화신(化神, Avataara)을 보면 창조주를 볼 수가 있고 그 분이 믿을 만한지 아닌 지까지 알 수가 있다고 예수님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12:44-45). 그것은 마치 심부름 온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서 그 주인의 품성에 대해서 짐작을 하게 되는 경우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의 내면을 보고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서 파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형성이 되어 있는 형상이 신뢰할 만한 것이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담대하게 사람들에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에게로부터 이 땅에 왔습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이 땅에 왔으며 창조주와 함께 이 땅에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신의 정체성과 생명의 근원을 파악하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체성을 자신의 제자들과 나아가서, 복음을 듣는 청중들이 모두 가지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가운데 아바따라’(Avataar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신이 이 땅에 강림한 화신(化神)”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용어를 약간 변형하여 아바타’(Avatar)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서 2009년에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아바타라는 육체보다는 그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인생의 깨달음 가운데 함께 살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12:46-47)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12:47).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12:46). 어둠에서 사람들을 끄집어내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그 작업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종국적으로는 예수님은 그들의 어두움과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야만 합니다(1:29). 그러므로 생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여러 번 예수님을 실망시키더라도 마침내 회개를 하게 되면 그 대속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12:47). 그것은 구세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인들에게 주는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그 역할이 다릅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중하게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용서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신 독생자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14, 18, 3:16-17). 마치 화신과 본체의 차이와 같습니다. 창조주의 신분과 권위를 회복하신 독생자는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15:12).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죄인을 엄벌에 처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두려우신 심판주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서 구원주를 영접하는 것이 살길을 얻는 상책(上策, 좋은 방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말씀, 그 주인의 능력과 그 말씀의 능력(12:48-50)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블랙박스와 같습니다. 블랙박스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음성과 비디오가 증거능력을 가지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받은 자를 심판하는 도구가 됩니다.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회개하지를 아니하는 자는 그 말씀에 비추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12:48). 그것은 어떻게 보면, 법의 효력에 있어서 도달주의’(到達主義)를 채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의 효력은 그 법이 반포가 되고 당사자인 사람들이 인지하게 된 그 때로부터 발효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선포가 되고 당사자들에게 전달이 되고 나면 이제는 본인들이 그 말씀대로 인생을 살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심판의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왜곡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12:49-50). 예수님의 선교의 방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기속(羈束, 고삐가 매어져 있는 것, 완전한 속박을 말함)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만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현재도 내주(內住, 안에 거하심)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모든 것을 상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존중하여 그 분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전합니다. 나아가서 자신이 전한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되살린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말씀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인생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살이, 곧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무덤 속 부활과 승천, 성령님의 강림, 그리고 재림의 약속 등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복음을 생활화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처럼 부활, 승천하여 영생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하겠습니다(15:1, 8:17-18,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