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115강(요13:7-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7월 11일(목)
나중에 알게 되는 세족식과 십자가 대속의 의미(요13:7)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b)는 사도 요한의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사도 요한은 이미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그렇지만 그 말씀의 뜻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13:7).
그 말씀은 스토리의 전개를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실은 제자들이 모두 듣고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신 것입니다. 언뜻 보면, 그 말씀은 오로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식의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조만간 지시게 되는 대속의 십자가의 의미까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메시아는 다윗의 후계자이며 다윗만큼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외세를 물리치고 옛날 다윗이 점령했던 제국의 땅, 곧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사이에 있는 넓은 땅을 다시 차지함으로써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치는 자입니다(창15:18, 삼하8:1-14).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만 자신이 죽어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이상한 이야기만 하시고 있습니다(요12:31-33). 그러다가 어처구니가 없게도 대제사장과 공회에 의하여 맥없이 체포를 당하고 비참하게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맙니다(요18:11-13, 19:16). 제자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와서 그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요21:2-3).
모든 영웅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히스토리’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경우에 있어서는, 만약 그 메시아가 허무하게 체포를 당하고 처형이 되고 나면 만사가 끝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언제나 초월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두뇌로 모두 이해가 되고 예측이 가능한 일이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신을 믿을 필요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즘 말로 ‘신의 한 수’는 인간의 상상과 능력의 한계를 완전하게 초월하는 경지의 것입니다. 그 ‘신의 한 수’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부활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요17:24).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족식입니다. 그 세족식이야말로 앞으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목회를 해야만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도, 양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돌보아야만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세척을 하고서 양들을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섬기는 리더쉽’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사역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끝까지 사랑하는 방법’은 상대방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목자장이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양으로 알고서 끝까지 책임을 지고서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생명을 얻도록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이고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요한도 나중에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요13:7).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3:5)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매개체는 ‘물’입니다. 그 물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밤중에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요3: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말하고 있다고 쉽게 이해가 됩니다. 믿는 자에게 만약 하나님 영이 임재하시고 내주하여 역사하시고 있다고 한다면, 그 자는 이미 하나님을 모신 자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구원과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하나의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물로 거듭나는 것’으로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세족식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다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어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먹고 마실 수가 있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가 하나 있습니다; 일찍이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곳이 거룩한 곳이므로 모세에게 그의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출3:5). 사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신발을 벗고 세상에서 묻혀온 먼지를 씻어내어야만 그 곳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깨끗한 몸으로 그리고 의인으로 선다고 하는 것은 작게는 세족식이 필요하고 크게 보자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칭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을 사용하는 세족식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을 사용하는 칭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칭의의 은혜로 의화(義化, justification)가 되고 말씀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이루어나가야만 합니다. 그 일은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눅24:49). 비록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중차대하지마는 그 일은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있을 때에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행1:8).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순절 날에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세상을 이기고 천국으로 입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이미 깨끗한 의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상명령을 실천해야만 하는 남은 인생에 있어서 더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다시 구원을 받은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설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세상의 먼지가 묻은 발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으로써 씻겨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서로 용서하고 섬기며 돌보아주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을 때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스승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만류를 했습니다(요13:8a). 그 때 세족식을 거행하여야 예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요13:8b). 그것은 베드로가 진정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청합니다(요13:9).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대답이 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로,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주심으로 베드로의 손과 머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초대교회 이후 성도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발을 씻어주고 더불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요13:14-15, 17). 그것은 성도들이 남은 인생 동안 끊임없이 실천을 해야만 하는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요일3:23-24).
'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강해 제117강(요13:16-18)(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4.16 |
---|---|
요한복음 강해 제116강(요13:11-1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4.15 |
요한복음 강해 제114강(요13:1-6)(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4.15 |
요한복음 강해 제113강(요12:44-50)(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4.15 |
요한복음 강해 제112강(요12:36-43)(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