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20강(요13:22-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6. 07:58

요한복음 강해 제120(13:22-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15()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막내 요한과 그 옆에서 자신의 궁금증을 대신 물어보도록 시키고 있는 베드로(13:22-25)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 자라고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13:21).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를 살펴보면서 과연 누가 선생을 배신할 자인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13:22). 그렇게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3:23-30).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금 80대의 노인이 되어 있는 사도 요한이 자신의 젊은 시절 한 때를 무한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지고 되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현재도 눈만 감으면 그 때의 정경이 눈에 선한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은 젊은 시절에 자신이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스승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음식을 먹는 등 막내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을 재삼 기억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3:23, 25). 지금 생각해도 스승은 심령이 괴로워서 마음이 참담한 실정인데 자신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 60년 세월이 지나서야 그 때의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을 하고서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3:21). 철이 없기는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여 열두 제자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심정을 모르고서 오로지 배신자가 누구인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묻기가 곤란해서 슬쩍 막내인 요한에게 대신 물어보라고 고개를 돌려서 눈짓을 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13:24-25).

 

가룟 유다의 마지막 선택과 그 후의 역사 전개(13:26-30)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인 막내 요한의 질문에도 가룟 유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13:26). 왜 그렇게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가룟 유다의 회심을 끝까지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사자의 의사를 끝까지 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에게 보내어진 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6:39).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10:11). 그렇지만 양 자신이 목자를 믿고서 따라갈 것인지 아니할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13:26). 그리고 선생인 자신이 이미 그의 배신행위를 알고 있으므로 그 일을 고만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완곡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마지막 갈림길에 서고 있습니다; “자신의 음모를 포기하고서 스승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서 따를 것인지, 아니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스승을 팔고서 그들의 신임을 얻을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자유의지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남은 인생이 결정이 될 것입니다”(22:1-6, 27:3-8). 그는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생명의 부활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5:29).

그런데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한 가지 철이 없는 항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왜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믿고서 모두가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조치하지 아니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아니했을까요? 성경은 창세기 제1장에서부터 그 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1:26). 유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인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선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빼앗아버린다면, 동물이나 로봇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영원히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역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평생 동안 그리고 영원히 종으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고 싶습니까?”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 예수를 선생으로 그리고 주님으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인생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1:12-13, 13:13-17).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주셨고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3:5).

갈림길에 서 있던 가룟 유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승을 버리기로 최종결심을 하고 맙니다. 그 순간 사탄이 그를 완전하게 장악합니다. 그리고 미리 약속이 된 각본대로 이제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22:5-6, 13:30).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12:35-36). 만찬자리를 떠나서 그 밤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로 향하고 있습니다(13:30). 예수님이 얼마나 은밀하게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고 조용하게 그의 의사를 물으셨는지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셨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13: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