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21강(요13:31-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7. 03:23

요한복음 강해 제121(13:3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16()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

 

모든 계획은 이제 변개함이 없이 그대로 실시가 될 것입니다. 세부 계획이 방금 확정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스승 예수를 팔고서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자 최종선택을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가 나간 후에”(13:31a)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지만 가룟 유다가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내부고발자가 되어버렸기에 이제 만민구원의 계획은 그렇게 확정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은 조금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확정된 세부계획대로 차질이 없이 실시하실 것입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 그 내용에는 두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일단 합의가 되면 하나님은 그대로 시행을 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합의의 과정에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계약이 성립이 되면 그 다음 실현의 문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을 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로 약속을 하셨으면 그 언약에 상대방이 충실하기만 하면 100% 그대로 실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으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이기에 그대로 믿어도 됩니다. 다만 문제는 항상 신실하지가 못한 인간의 성품입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에는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 상대방이 사람이기에 당사자 본인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앙의 길을 달려갔다면 반드시 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영적인 삶 가운데 그 예언이 성취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헤세드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철저하게 믿고서 지금 확정이 된 계획이 그대로 실현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제가 이미 성취가 된 것과 진배가 없기에 과거형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사랑으로 그리고 영광을 주고 받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13:31, 17:21-24).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만민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할 것입니다(3:16-17).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17:4). 아들이 작은 것을 드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덤 속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입니다(17:5). 그 영광을 장차 예수님이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13:32).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 중국에 대한 조공관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변방의 왕이 조공을 바치면 중원의 황제는 여러 배로 답례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공사절을 자주 보내고자 합니다. 중국에서는 그 수를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플러스섬(Plus-Sum) 게임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구태여 그 수를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자로부터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수 없이 많이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빠짐없이 수십 배, 또는 수백 배로 되돌려주십니다. 그 점을 이해하게 되면 신앙생활이 한결 즐거워질 것입니다.

 

작은 자들아의 의미(13:3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1:1). 그러므로 피조된 세계는 결코 하나님만큼 위대하거나 클 수가 없습니다(13:16, 15:20).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청지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1:26, 2:7). 그 사람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서 하나님이 손수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2:8-9, 15-17). 그런데 아담부부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죄 가운데서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버리고 맙니다(3:22-23). 영생의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면서 놀라운 생명력을 계속 공급 받던 그곳 에덴동산이 낙원입니다. 이제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났기에 사람들은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줄곧 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실락원의 죄인들이 의인이 되어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될까요? 창세기 이후 그것이 성경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실락원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1:12-13). 그렇다면, 실락원의 사람들은 초라한 죄인들이고 천국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인이며 큰 자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와 대비되고 있는 작은 자의 개념이 도출되고 있습니다. 그 개념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일단 회복하기 때문에 남은 인생을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은 초라한 죄인들이기에 작은 자입니다. 나아가서 경쟁사회에서 뒤쳐지고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생존의 위기에 처해져 있는 자들도 작은 자의 개념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18:6, 14, 25:40).

따라서 예수님의 관심은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하면 실락원의 죄인들을 의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할 것인가? 둘째, 고아나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돌볼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그들 작은 자들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13:33). 지금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나중에는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13:34-35’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13:34-35)

 

사도 요한을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새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34-35). 그 명제를 그의 서신서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요일4:7-12). 그 명제의 출발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의 의식입니다(13:4-17). 공관복음에 없는 사건을 사도 요한이 대서특필하면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세족의 사랑을 제자들이 서로 실천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요한복음 제14장부터 제17장 사이에 기록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통하여 재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13:33’ 절 때문입니다. 지금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만약에 사람들이 새 계명을 실천하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4:21, 15:9-17). 그 새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10:11). 그 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또한 선한 목자로서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21:15-19). 그렇게 실천을 할 때에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주어졌던 영광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 영광이 바로 무덤 속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21:7, 22:1-4).

참고로, 사도 요한이 AD 90년경에 이 글을 쓰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아시아 땅의 교회들이 서로 분파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었을 때에는 성도들이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칭송을 받았습니다(2:43-47). 그러나 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서로 이견을 보이고 쉽게 용납을 하지 아니하는 풍조가 생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AD 60년대에 그의 서신을 작성하여 초대교회에 공람을 시킬 때에도 이미 분파는 있었습니다(고전3:3-9).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교회 내에서 성도간에 사랑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의 지적과 같이 성도간에 서로 섬기며 사랑을 하여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김을 받게 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얻으신 부활과 영생을 제자들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 점을 명심하시고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