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78. 헤롯 대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8. 19:46

78. 헤롯 대왕

 

(1)   헤롯(Herod) 대왕의 이름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영웅이었으며 그의 시대는 격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롯 역시 영웅이었다. 간략하게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C 2세기 로마의 팽창으로 시리아의 셀루시드 왕조가 위기를 맞이했다외세에 맞서고자 시리아 왕조는 제우스 신 숭배사상으로 헬라세계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했다그러나 그 종교정책은 후유증이 심각했다먼저 여호와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BC 167년 맛다디아 제사장과 그의 용맹한 다섯 아들이 독립전쟁을 시작한 것이다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가장 용맹한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가 중심이 되어 독립전쟁을 계속했다결국 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BC 142년 맛다디아의 둘째 아들 시몬이 유다의 통치자가 됨으로써 하스모니안 왕조가 유대 땅에 탄생했다. BC 134 시몬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영토확장에 나섰으나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7세에게 패했다그러나 BC 129년에 숙적인 안티오쿠스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사망하자 영토확장에 성공하게 되었다그래서 사마리아와 요단 강 동편 그리고 남쪽의 이두매까지 차지했다옛날의 에돔 땅에 속하는 이두매에는 네 번째의 총독을 세웠다그런데 BC 67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이두매 총독 집안의 안티파테르가 재빨리 로마의 융성을 알아채고서 하스모니안 왕조를 버리고 로마의 폼페이 장군을 도왔다그 결과 BC 63년 내분에 휩싸인 예루살렘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멸망하였다그 공로로 안티파테르는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함께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이 되었다그는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왕조가 사라진 유대 땅을 전부 차지하고자 했다그 방법이 그의 아들 헤롯(Herod)을 하스모니안 왕가의 딸과 정략 결혼시키는 것이었다헤롯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영악했으며 더 큰 야망을 성취했다그는 로마의 새로운 실세 안토니우스 장군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그리고 BC 40년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사마리아와 이두매 뿐만 아니라 유다갈릴리 땅까지 모두 다스리는 유다의 왕으로 책봉되었다그러나 가나안 땅의 유대인들이 이두매 출신인 헤롯 왕의 통치를 반대했다그러자 그는 BC 37년 군대를 이끌고서 무력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그 때부터 유다 땅을 다스리는 헤롯 왕가가 정식으로 시작이 되었다육 년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켰을 때 헤롯 왕은 위기를 맞이했다그러나 그는 옥타비아누스를 직접 찾아가서 그를 설득하였으며 오히려 그 통치능력을 인정받아서 갈릴리 동편의 땅 드라고닛과 요단강 동쪽의 베레아까지 영토로 얻게 되었다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탈바꿈시킨 영웅 헤롯 왕은 마침내 헤롯 대왕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1:5).

(2)   영웅의 아들 헤롯 대왕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를 죽이고자 획책했다(2:3-18). 세상적인 성공과 지배를 의미하는 영웅의 논리와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메시아의 논리가 양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누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인가? 헤롯 대왕은 자신 하나외에는 그 누구도 왕이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혹 그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왕권을 인정하거나 살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 지배와 통치만을 생각하는 자, 권력의 화신이 바로 헤롯 대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만민구원의 메시아 논리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한 세상을 영웅의 논리로 살다가 역사책에 태평성대를 가져온 대왕으로 기록된다면 그 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여(2:20) 유대인들의 환심을 샀으며 또한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많은 로마식 건축물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멀리서 찾아온 동방 박사들에게 협조하는척 하면서 메시아를 죽이고자 했다(2:1-8).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한 후 꿈에 계시를 받아 딴 길로 돌아갔다(2:9-12). 이에 속은 줄 알고서 뒤늦게 헤롯 대왕이 그 지역의 두 살미만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지시했다(2:16). 요셉 부부는 아기를 데리고 사전에 애굽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2:13-15) 죄없는 아기들의 핏물이 베들레헴 땅에 흘러내렸다. 그 핏값을 하나님이 헤롯 대왕에게 치루게 하셨다(4:10-12).  

(3)   그 해(BC 4년경) 헤롯 대왕은 갑자기 심신이 병들어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권력을 잃어버린 채 멀리 유폐되고 말았다. 그가 남긴 열 명의 아내와 열다섯 명의 자녀들은 그를 버린채 권력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최후의 승자가 된 세 사람의 왕자가 권력을 나누었다. 헤롯 아켈라오(BC4-AD6)는 알짜배기 유다 땅과 사마리아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헤롯 대왕의 후계자라고 불렀다(2:22). 헤롯 안디바(또는 분봉왕 헤롯임, BC4-AD39)는 갈릴리와 베레아 땅을 차지했다(3:1). 헤롯 빌립2(분봉왕 빌립, BC4-AD34)는 이두매와 드라고닛 땅을 차지했다(3:1). 이 가운데 헤롯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하게 통치하다가 유다 백성들이 로마 황제에게 직소함에 따라 AD6년에 폐위당하였다. 그 결과 로마 총독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AD37년이 되자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가 로마의 새 황제 옹립에 공을 세워 그 보답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1세가 AD44년에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그해 병으로 죽고(12:1, 19) 구 년후에는 그의 아들이 갈릴리의 분봉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헤롯 아그립바2(AD53-70) 였다(25:13-17, 26:1-32). 그러나 이들 분봉왕과 로마 총독들이 민심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자 반로마 무장투쟁이 격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AD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되고 동시에 헤롯 왕가도 끝장이 나고 말았다.

(4)   참고로 성경상에 헤롯 대왕의 후계자들의 행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는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된 그의 이복동생 헤롯 빌립1세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차지했다(14:3).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의 질책을 받았다(14:4). 그는 세례 요한을 참수했다(14:5-12). 그리고 혹시 나사렛 예수가 이를 문제삼지 아니할까 전전긍긍하기도 했다(9:7-9). 훗날 빌라도가 마침 유월절기간이라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었던 자신에게 체포된 예수를 보내어왔을 때 그는 이 점을 슬며시 심문해보았다(23:6-9).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자 마음껏 예수를 희롱한 후 총독 빌라도에게 되돌려보내고 말았다(23:11-12). 훗날 집사 스데반이 이 일을 다시 거론하면서 순교했다(4:27). 둘째로,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1세는 유대 분봉왕 시절(AD37-44) 기독교인들을 탄압함으로써 유대교를 신봉하는 대다수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사도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사도 야고보를 살해했다(12:1-11). 이 때문에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충으로 갑자기 죽게했다(12:20-23). 셋째로,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아그립바2세는(AD53-70) 헤롯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는 로마 총독에게 그의 누이 버니게와 함께 문안하려 가이샤라에 갔다가 우연히 그 곳에 잡혀있었던 사도 바울을 만났다(25:13-27). 그는 사도 바울에게서 다메섹 도상의 계시와 바울의 회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내용을 소상히 들었으나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아니했다(26:1-30). 그렇지만 그는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인정하였으며(26:31-32) AD70년 폐위된 후에도 30년간 더 생존했다. 넷째로, 헤롯 왕가의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성경상에는 아리스도불로(16:10)와 마나엔(13:1)의 이름이 등재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헤롯 왕조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 그리고 사도들의 행적과 깊이 관련되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초대왕인 헤롯 대왕과 그 뒤를 잇는 왕들이 하나같이 동시대에 등장했던 메시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한 채 끝까지 왕의 논리로서만 세상을 다스리다가 결국은 골고다 십자가 사건이후 40년만에 왕조의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