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75. 공회원 요셉(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8. 08:38

75. 공회원 요셉

 

(1)    아리마대출신의 부자인 요셉은 존귀한 공회의원이었다(27:57, 15:43, 23:50, 19:38).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2KM쯤 떨어져 있는 촌락의 이름이다. 아리마대 출신인 요셉은 어릴 때부터 아리마대에 인접한 협곡 통로를 따라서 많은 물동량이 예루살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중해 연안 길을 따라 남방의 애굽과 블레셋 그리고 북방의 두로와 시돈, 아람 지역이 서로 교역을 하였으며 서방에서 바다 길로 들어온 물품도 이 길을 따라 운반되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반입되는 물량은 유일한 진입로인 아리마대-엠마오 협곡 길을 따라 운반되었던 것이다. 수도 예루살렘은 서쪽 협곡 길과 동쪽 요단 강변에 이르게 되는 베다니-여리고 길이 막히게 되면 생필품 부족과 물가고에 시달리게 되는 전형적인 대규모 소비 도시였다.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운반업과 유통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요셉은 어른이 되자 무역 유통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특히 그는 외국에 살고 있는 그의 친척들과 연락망을 튼튼히 하여 국제적으로 물가 정보도 얻고 로마 제국이 돌아가는 이야기도 빠르게 많이 듣고 있는 소위 귀가 밝은 부자였다. 그러므로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 가운데에서도 국제 정세에 밝은 소장파 엘리뜨였던 것이다.

(2)    당시 유대와 갈릴리는 로마의 총독과 에돔 출신의 헤롯 왕가가 협력체제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외세가 통치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민족 독립의 날을 꿈꾸고 있었다. 요셉이 부자가 되어 예루살렘 상류층으로 살게되자 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그 가운데 열심당원인 민족주의자들도 있었고 외세와 적당히 타협하여 산헤드린을 이끌어 가고 있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도 있었으며 나아가서 백성들의 정신적 존경을 받고 있는 바리새파 랍비들도 있었다. 그들 세 부류 가운데 요셉은 니고데모와 같은 온건주의 개방노선을 가진 소장파 랍비들이 좋았다. 그 이유는 그가 국제 정세에 밝아 무력으로서는 민족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고 외세와 타협하여 동족들을 종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마음에 들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내에서 소수파였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을 돕고자 그의 재력을 동원하여 공회원이 되었다. 공회속에서 요셉이 친구 니고데모와 함께 주장하고 있는 것은(19:38-39, 7:50, 23:50-51) 유대교 개혁주의 노선이었다;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폐쇄주의 선민우월사상을 벗어나자. 히브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계 만민에게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19:5, 19:18, 34, 19:18-25, 17:3). 요컨대, 유대교를 히브리 성경의 본 뜻에 맞게 개방노선으로 개혁하여 로마 제국내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가장 우월한 것임을 입증하자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선은 국제 감각이 있는 소수 엘리뜨 공회원에게만 호응을 받았을 뿐 다수파 사두개인들과 강경노선의 바리새인들 양쪽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다.

(3)    이와 같이 외로운 처지에 있는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나사렛 예수가 나타났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내에서 장사치들을 채찍으로 쫓아내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2:13-23). 이를 주시했던 공회원 가운데 친구 니고데모가 먼저 움직였다. 은밀히 예수를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3:1-21). 예수의 만민 구원사상이 바로 요셉과 니고데모가 함께 꿈꾸어오던 유대교 개방 개혁주의 노선과 직결되고 있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심적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서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27:57, 19:38). 그러나 대중앞에 공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수행 제자가 아니었다. 산헤드린 공회내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세력이 된 것이다(7:47-53, 19:38, 23:50-51). 그들은 예수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더욱 경건한 삶에 힘써며 은인자중했다(23:51, 19:38, 15:43).

(4)    유월절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저녁에 대제사장과 당국자들이 전격적으로 예수를 체포해왔다(22:2-6, 54). 날이 밝자마자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더니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22:66-71). 너무도 기세가 흉흉해서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소극적인 반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19:38, 23:51). 마침내 그들의 영적인 스승인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 처형이 되고 말았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이 유대인들의 손을 떠나서 완전히 빌라도 총독에게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로마 총독을 찾아가서 당돌하게 부탁했다. 시신을 내어주면 그들이 장례를 치루어 주겠다고 제안했다(15:43).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에 시달리고 있었던 빌라도는 얼른 예수의 죽음을 거듭 확인한 후 그 시신을 넘겨주었다. 요셉은 자신 소유의 바위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고 큰 돌로 그 입구를 막았다(15:46). 이와 관련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700년전에 메시아가 죽어서 부자의 묘실에 들어간다는 예언을 한 바 있었다(53:9). 그 예언 그대로 부자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새 바위굴 묘실에 모신 것이다. 이사야 예언을 요셉이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눈앞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 단 53일만에 예루살렘에서 전부 발생한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 경악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가 고대하고는 있었지만(23:50, 15:43) 그의 살아 생전에 이렇게 생생하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 공회원 요셉은 더 이상 은인자중하거나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고 공회원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섰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산헤드린이 발빠르게 제동을 걸지 아니하도록 그 자신이 발벗고 나섰다.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공회에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바리새파의 거물인 가말리엘 선생도 같은 의견이었으므로 이 주장은 관철되었다(5:33-42). 요셉은 또한 초대 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4:31-35). 성령충만한 삶을 공회원 요셉이 누릴 수 있게된 것이다. 요셉은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 감격스러웠으며 그 일에 그 자신 일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루살렘에서 기쁘게 한 평생을 살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