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73. 장로 야고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7. 07:10

73. 장로 야고보

 

(1)   다윗의 자손이며 의로운 사람인 목수 요셉이(1:19-20, 6:3) 배가 불러오는 약혼녀 마리아를 눈 딱감고 아내로 맞아 들였다(1:24). 동네 사람들은 정식으로 신방을 차리기도 전에 속도위반했다고 볼쌍사납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도 지키고 마리아 모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요셉이 이와 같은 불명예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1:20-24). 그리고 마리아가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순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 주었다(1:25, 1:34-35). 이와 같은 요셉의 착한 행위에 보답이라도 하시려는 듯(42:12-13) 하나님께서는 요셉 부부에게 아들 넷을 더 주셨다. 그 가운데 첫째가 야고보였다(6:3). 그러므로 야고보는 요셉의 가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둘째 아들이지만 정식 부부 생활의 결과로 보면 첫째 아들이 된다. 인간의 생각으로만 보면 이 관계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야고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이와같은 희한한 이야기를 설명듣기는 했지만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가 분명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무척 똑똑한 형이기는 하지만(2:52) 아버지 요셉의 씨가 아닌 것이다. 반쪽짜리 형이므로 야고보는 속 편하게 형 예수가 하는 일을 반신반의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형 예수가 설흔 가까이 될 때까지는 매우 모범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성실한 청년이었다. 아버지 요셉이 별세하고나자 일찍 가장이 되어 집안의 목수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모친과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결혼도 아니한 채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야고보는 그 때까지 정말 형 예수가 의지가 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총각인 형이 독립 선언을 했다. 그리고 나사렛 산골에서부터 갈릴리 해변 최대 도시인 가버나움으로 혼자서 이사를 가버렸다(4:13-17). 야고보는 형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 무거운 가장의 책무를 전부 동생인 자신에게 떠넘기고 혼자서만 살겠다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는 형이 야속했다. 역시 반쪽짜리 형인지라 동생에 대한 책임도 반만 수행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형 예수의 일은 잊고 살기로 작심했다.

(2)   야고보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명실상부한 맏아들이므로 내면적으로는 다윗 왕의 직계 혈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렇다고 이웃에게 직계 왕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이웃 나라 에돔 왕조인 헤롯 왕가가 유대 땅, 특히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유대인들의 민심의 향방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셉의 가문은 마치 다윗 왕의 방계인 것처럼 꾸미고 살고 있던 때였다. 그렇지만 언젠가 좋은 시절을 만나면 다윗 왕가를 재건하고자 꿈꾸고 있었다. 훗 날을 기약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는 다윗 가문의 장자가 바로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야고보의 민족 의식과 왕손다운 기질은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 요셉은 가난한 산골 마을 나사렛에서 목수 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일 년에 한 번씩 유월절이 되면 꼭 예루살렘을 방문했다(2:41). 자식들에게 옛 날 조상들의 위업을 잊지말도록 기억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형 예수가 열두 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삼일간 혼자 남아서 그 곳 랍비들과 히브리 성경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사건은(2:42-51) 요셉 부부가 쉬쉬하였지만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분명 형 예수는 특출한 인물이었다. 무언가 정말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일을 이루어낼 선지자감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 왕의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형 예수가 아니라 다윗 제국이 다시 선다면 왕통을 잇는 것은 마땅히 야고보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 예수와는 협력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다윗 왕의 뒤를 잇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가지고 있었던 역사 의식이었던 것이다.

(3)   나이 30에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했던 형 예수가(3:23) 두 해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그 곳에서 첫 해에는 성전청결사건을 통해서 일약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둘째 해에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단숨에 고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 때 야고보는 형이 기적과 이적으로 민심을 얻고 외세를 물리친 후 드디어 다윗 왕국을 재건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수는 고향 갈릴리로 빠져나와서 다시 두 해동안을 변방 지역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야고보는 형이 허송 세월만 하는 것같아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도 유약하기 짝이없는 것이었다. 원수도 사랑하고 이방인과 죄인도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유대 민족의 독립이나 선민 우월주의 사상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조였다. 이에 마음이 상한 야고보는 형에게 말했다; 그렇게 능력이 많고 형 말이 맞으면 아예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서 정식으로 승부를 내어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7:3). 그에게 등을 떠다밀린 듯이 형은 그렇게 그 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떠나갔다.

(4)   그 해 초막절이 지나고(10:22, 수전절인 겨울) 다음 해 봄 유월절이 다가 왔을 때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형 예수가 내란 선동죄로 체포되어 로마 총독에 의하여 십자가 형에 처해진다는 것이었다. 마침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살로메 그리고 이종 동생인 요한으로부터 정확한 소식이 전해져오기를 기다리면서 야고보와 그 동생들은 갈릴리에서 애를 태웠다(19:25-27). 며칠이 지나지 아니하여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동시에 날라들었다. 나쁜 소식은 형이 마침내 처형되어 무덤속에 금요일날 장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삼일 후 주일 날 새벽에 형이 부활하였다는 믿지 못할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희비가 엇갈리는 사상 초유의 소식을 접한 야고보는 만사를 젖혀두고 남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만약 부활한 형 예수가 다윗 왕국의 재건을 선포하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버린다면 그 것은 축하를 해야할 일인지 아니면 반대해야할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어쨋든 가문의 숙원과 관련되는 사태의 발생이므로 마냥 갈릴리에서 목수일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5)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형을 만났다(고전15:7). 그 때 야고보는 깨달았다. 그가 다시 만나고 있는 형은 예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소위 육체대로 알고 지내던 형이 아니었다(고전15:44, 49, 20:17). 그 분은 음부의 권세를 깨부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킨(1:14-15) 부활의 주님이시며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셨다. 이제 야고보는 형 예수가 아니라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이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며 생명의 주인이셨다. 야고보는 부활한 그리스도앞에서 다윗의 혈통이라든가 다윗 왕조의 재건을 들먹일 수도 그리고 그 후계자 자리가 형이 아니고 바로 야고보 자신임을 우길 수도 없었다(1:12-13). 그래도 마지막 미련의 끈을 끊지못한 야고보와 동생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서 물어 보았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1:6).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알고 계신다. 너희들은 오로지 성령 강림으로 능력을 받아 온 세상끝까지 부활과 영생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1:7-8). 그 때에가서야 야고보는 그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그 때부터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형의 말대로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가 옷입게 된다면 형의 가르침대로 남은 생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 형을 이제 그 자신의 주인이요 임금으로 모셨기에 야고보는 자신의 세력을 교회내에 만들지 아니하고 형의 제자인 사도들과 한 마음으로 화합했다. 야고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2:1-4). 그 후 야고보는 앞장서서 다윗 왕국의 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루살렘에 세웠다. 그리고 열심히 그리스도의 뜻을 묻고 또 추구하였다. 기도하는 자 낙타무릎이 그의 별명이 되었으며 그는 초대 교회의 첫 번째 장로가 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후임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기도 했다(15:13, 1:19). 사도 바울의 말 그대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들보였다(2:9). 그리고 야고보는 자신의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모습을 글로 남겼다. 그것이 야고보서였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