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70. 베드로(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6. 03:02

70. 베드로

 

(1)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며 요나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불렀다(16:17).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보통 두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시몬의 아버지도 요나 또는 요한이었다(1:42). 그래서 예수님이 시몬에게 또 하나의 좋은 이름을 붙여 주셨다. 그것이 게바였다. 유대식 이름 아람어 게바는 그 뜻이 반석이므로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페트로스)였다(1:42, 16:18-19). 시몬이 게바라는 이름을 얻게된 계기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을 예수님앞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계시로 고백했을 때이다(16:15-19). 그 때 예수님은 자상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시몬의 이름과 그의 신앙 그리고 그의 일생을 둘로 나누고 있는 개념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첫 번째 개념은 혈육에 의한 것(by man)이고 두 번째 개념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에 의한 것(by Jesus Father in heaven)이다(16:17, NJV).

(2)   혈육에 따른 안목으로 시몬의 내력을 들여다 보면 그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갈릴리의 작은 어촌 벳세다출신이며 그 직업이 어부였다(1:44, 4:18-22).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거나 큰 야망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4:13). 그저 건실한 어부였으며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하여 집안에 아내가 있었으며 그 아내의 친정 어머니까지 함께 모시고 사는 착한 유대인이었을 뿐이다(8:14). 그가 평범하다는 사실은 그의 형제나 교우 관계를 둘러보아도 명백하다. 모두가 변방 갈릴리 사람들이며 한결같이 어부들이다.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4:18-22), 한 동네 사람인 빌립과 서쪽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1:43-45), 그리고 도마 등이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그와 함께 한 세상을 보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21:2-3).

(3)   시몬이 예수를 알게된 것이 복이었다.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며 야고보와 요한과는 이종사촌 사이였다. 시몬이 어선이 많은 세베대의 어로작업을 도와주려고 가버나움에 들렀을 때 예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옮겨와 살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교분도 돈독해졌다. 시몬은 예수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기에 그가 좋았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살면서 세상 공부도 하고 두루마리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으며 그 이치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몬은 평소 생각했다. 이 친구는 평범한 우리들과 무엇인가 다르다. 앞으로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여 무엇인가 큰 일을 할 만한 인물이다. 은근히 그 일이 무엇인지 기대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이 삼 십이된 예수가 요단 강 하류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친구들을 전부 불러모았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모두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 때 예수가 시몬 자신에게 특별한 약속을 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반석인 게바가 될 것이다(1:42). 그리고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와 교통하며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놀라운 일을 보게될 것이다(1:50-51). 그래서 나다나엘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예수를 장차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자라고 믿고서(1:49) 그를 따라나섰다. 그 때부터 그들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 일에 평소 적극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시몬 자신이 앞장을 선 것이었다.

(4)   시몬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16:17). 이 고백은 나다나엘의 고백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라는 표현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표현으로 살짝 바뀌어져있는 특이성이 있다. 이와 같은 차이를 혈육에 따른 안목으로서는 알아챌 수 없었지만 영적으로 밝으신 예수님은 금방 알아보셨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19:25027) 알게하신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신앙고백하며 평생 그 분을 신뢰하고 살아가면(일종의 헤세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16:17-20절 내용풀이임). 그리하면 시몬게바가 되고 베드로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게될 것이라는 취지의 설명이셨던 것이다. 그 때부터 시몬이 새로운 이름 베드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직 베드로(반석)와 같은 믿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 삼년반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예수와 동행하면서 놀라운 광경을 많이 보고 또한 자신도 능력을 행해 보았다(9:6). 시몬은 귀신이 떠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나는 기적을 보았을 뿐아니라 귀천을 따지지 아니하고 또한 선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뜻을 풀이해주고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혁명적인 말씀 선포를 경험했다. 그러나 막상 예수가 허무하게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모로 로마 총독에 의하여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자 베드로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의 꿈도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백일몽과 같았다. 이 세상에 믿고 신뢰할 만한 영원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감을 맛보며 베드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서 갈릴리 어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5)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나사로처럼 단지 인간의 몸이 되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변하여 옛날 변화산상에서 미리 보았던 그 형상과 같았다. 부활과 영생의 영광스러운 주님이 되신 것이었다.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좌우편에서 보좌하고 있었던 것처럼(9:2-8)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권위가 그 분에게 종속되고 있었다(11:27, 24:44-48).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가 함께하고 있었다(28:18). 이를 직접 보고나서야 베드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다(8:16, 29, 32, 51, 10:30)라는 예수님 말씀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그의 눈의 꺼풀이 벗겨졌다. 그래서 디베랴 바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에수님을 다시 만난 베드로는 그 발앞에 무릎을 꿇고서 다시 고백해야될 입장이 되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 똑같은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셨다(5:6, 21:11).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사죄할 엄두조차 못내고 있었다. 그만큼 염치도 없고 면목도 없어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누구보다 먼저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온 베드로였지만(20:5-6, 21:7) 막상 그 앞에 서자 자신이 얼마나 몰염치한 죄인이며 주님을 배신한 인간인가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 실망하고 그 분의 아버지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목숨에 연연하여 다시 고기잡이를 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베드로는 영락없이 그 옛날의 시몬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그 분의 신뢰는 영원한 것이었다. 그 분의 사랑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를 믿고 사랑한다. 너는 어떠하냐?(21:15-19). 베드로는 인간의 신뢰와 사랑이 결코 영원하거나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래서 그 분께 말씀드렸다; 이제부터 인간의 생각, 혈육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살지 않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삼고 그 분과 한몸이 되어서 그 분의 손과 발로서 남은 생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부활하고 영생을 얻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약속과 깨달음위에서 남은 생을 열심히 살아갔다는 사실은 사도행전이 오늘도 묵묵히 증언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