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87강(요9:34-4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6. 03:04

요한복음 강해 제87(9:34-4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15()

 

죄 가운데서 난 자가 그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9:34-39)

 

날 때부터 맹인인 거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입니다. 그 신성한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을 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구걸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 이렇게 수군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 구걸을 하고 있는 소경거지를 보아라. 저 자는 부모가 죄를 범해서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자이다. 한평생 눈을 뜨지 못한 채 소경으로 그리고 거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운명을 정한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저 소경거지처럼 되지 아니하려면 바리새인들처럼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만 된다.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바치며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잘 준수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의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의인만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이 의인이고 자신과 같은 소경이나 거지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18:9-13). 더구나 아예 날 때부터 소경이며 거지인 자신은 완벽하게 죄인의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왜 자신이 죄인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때부터 온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밝다고 하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항상 캄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눈이 보이기에 열심히 일을 하여서 당당하게 먹고 산다고 하는데 자신에게는 애초부터 그러한 혜택이나 능력이 부여되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한평생 굴레가 되고 있는 이 천생소경이라는 가혹한 운명은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난 운명이라면 그 신세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일까요? 더욱 절망적인 현실은 그와 같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조차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눈을 부릅뜨고서 매일 구걸을 열심히 하여야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간신히 자신의 목숨 줄을 연명할 수가 있는 것이 자신의 눈물이 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자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들을 찾아 가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9:9-13). 나사렛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가지 아니했기에 왕년에 바리새인 랍비이며 고귀한 공회원인 니고데모도 스스로 밤중에 예수님을 숙소로 찾아온 것입니다(3:1-3). 그런데 천생소경이며 거지인 자신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닌데 그 분이 자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칭 의인 바리새인이 아니고 모두가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천생소경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어두운 눈 대신에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9:5-7). 그 운명이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밝은 눈으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9:37-38). 그러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본문 9:34-39’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경거지처럼 죄인인 자신의 처지를 의인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18:14). 그 분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의 구세주로 믿고서 영접을 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 때부터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빛의 자녀로 남은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와 같은 변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소경거지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라도 캄캄한 세상을 벗어나서 한번 빛 가운데서 의롭게 살아보고자 소원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서는 그러한 변화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암흑세상에 갇혀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맹인의 신세를 빛의 자녀로 바꾸어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 사함을 줄 수가 있으며 무덤 속 부활로 믿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고 우기며 세상을 바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10:3). 그리스도 예수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가도 그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20, 1:10-11).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유대교리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를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마음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기 그지 없는 행태입니다(삼상16:7). 그렇지만 그들은 그 점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작태가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39-41).

하나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정직한 자를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해줄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자는 그 죄를 뉘우치고 구세주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구원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7:24-25). 그리고 죄 사함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리새인들은 그 점을 끝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